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71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요즘은 가지 않지만 나의 단골 선술집이 있었다. 어촌에는 일본에서 온 사에키 씨가 운영하는 작은 술집이 있다. 도쿄의 뒷골목에서 사에키 씨의 언니가 하는 이자카야의 모습과 메뉴를 그대로 들고 와서 이곳 바닷가에서 하고 있다. 작은 곳인데 늘 사람들이 많고 혼자서도 편하게 맥주 한 잔에 맛있는 꼬치구이를 몇 개 먹고 갈 수 있다.


처음 읽는 사람을 위해 말하자면 우리 동네는 바닷가입니다.

사에키 씨는 묘한 사람으로, 말하지 않고 가만히 보고 있으면 마치 영화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 옆에서 늘 따라다니는 수행비서 같은 분위기다. 눈을 깜빡이지 않는 그런 신비한 사람처럼 보인다. 사에키 씨는 일본 사람이지만 일본 노래는 잘 모른다. 신승훈의 노래를 좋아하며 하루키가 누군지도 모른다. 당연하지만 한국말보다 일본 말을 더 잘하는데 한국 언어를 농담을 섞어 한국식으로, 게다가 여기 지역 특성상 사투리로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다. 하루키를 모르는 만큼 오에 겐자부로나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누군지 관심도 없다.


그게 누구야? 교 짱?


사에키 씨는 나를 교 짱이라고 부른다. 나의 이름을 물었을 때 교관이라고 하니 편하게 교 짱이라고 부른다. 나는 그곳에 일주일 한두 번은 들러서 책을 좀 보며 맥주를 홀짝였다. 내가 책을 보고 있으면 무슨 책이냐고 꼭 묻고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라고 말하면 위에서 말한 것처럼 표정 없는 얼굴로 그게 누규?

사에키 씨는 두세 달에 한 번씩 도쿄로 가서 비법양념이라든가, 중요 부품? 은 직접 싸들고 온다. 이 집은 전갱이 꼬치가 아주 맛있다. 물론 나의 기준이지만. 꼬치에 구워진 전갱이 구이를 한 입 먹고 맥주를 마시면 피로가 날아간다. 타지방이나 타국에서 나에게 손님들이 오면 – 친척이던, 친구든, 이모부든 사에키 씨의 가게로 데리고 갔다.


가게 안은 작아서 조촐한데 꽉 찬 분위기, 무엇보다 맛있는 꼬치구이가 있고 왁자지껄한 기분 좋은 소음이 가득했다. 이곳 어촌에도 일본인들이 많은데 그들의 아지트 같은 곳이다. 이곳에 사는 일본인들은 사에키 씨의 가게가 비좁아서 자리가 늘 없는데 일어서서 맥주를 마시고 꼬치구이를 먹으며 서로 이야기를 한다. 꼭 자리에 앉아야지, 같은 분위기는 없다.


교 짱? 어때 맛있어?라고 꼬치를 먹을 때면 사에키 씨는 꼭 물어본다. 그리고 나에게 듣고 싶은 일본 노래가 있냐고 묻는다. 좋아하는 노래 들려줄게.라고 말하지만 일본 노래는 몇 없다. 사에키 씨의 가게에는 주로 신승훈의 노래나 한국 가요가 조용하게 흘러나온다. 아직도 시디와 테이프로 노래를 튼다. 그래서 내가 듣고 싶은 일본 노래를 말하면 – 요컨대 이즈미 사카이가 있던 자드의 노래를 틀어 달라고 하면, 오케이 알았어,라고 하고는 신승훈의 노래를 튼다. 그런 식이다.


한 번은 술을 많이 마시고 나에게 있던 스메싱 펌킨스의 카세트테이프를 건네주며 틀어 달라고 했다. 스메싱 펌킨스는 대단한 그룹이지만 좋아하는 사람들만 좋아한다. 세계적인 그룹이지만 아는 사람만 아는 그런 그룹이다. 사에키 씨의 가게에 손님들이 빠져나가고 별로 없을 때 스메싱 펌킨스의 1979를 들으면 기분이 참 좋다. 몽롱하며 모호한 분위기가 뇌를 툭 건드리는 느낌이다.

빌리 코건의 목소리만큼 매력적인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어요.라고 나는 사에키 씨에게 말했다. 사에키 씨는 이 녀석이 무슨 말을 하지? 같은 표정 없는 얼굴로 나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다.


빌리 코건이 부르는 노래에는 어떤 의미가 있거든요. 시인이 한 줄의 시를 적기 위해 여러 권의 책을 읽듯이 빌리 코건 역시 한 줄의 가사를 써내기 위해 엄청난 독서를 하잖아요. 빌리 코건은 술과 담배도 하지 않는 아주 이상한 사람이에요. 마치 오노 지로가 그 좋아하는 마늘도 명절에만 먹고 외출을 할 때 장갑을 꼈듯이 스시에 철학을 담았다고 하잖아요. 빌리 코건의 노래가 그런 것 같아요.


어머 교 짱, 오노 상을 알아? 내가 존경하는 사람이야. 별일이네. 오노 상의 가게에도 몇 번 갔었지. 물론 예약을 거쳐야 하지만 말이야. 오노 상이 만든 스시를 먹고 있으면 도심 속에서 따뜻함이 느껴지는 거야. 그때 나도 그렇게 장사를 해야겠다고 다짐했지. 교 짱이 오노 상을 다 알고 신기하네.


전 다 알아요.라고 나는 큭큭 웃었다. 그랬더니 사에키 씨가 교 짱, 귀엽네(어쩐지 귀엽다는 말은 한국어가 아닌 카와이 같은 말로 들으면 더 좋을 같지만), 그런 말도 할 줄 알고.


사에키 씨, 생강 채 썬 거 좀 더 주세요. 와사비도 듬뿍 주세요. 전 여기 와사비가 너무 맛있거든요.


그랬다, 정말 와사비가 말도 안 되게 맛있다. 그냥 뜨거운 밥에 와사비를 비벼 먹기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면 사에키 씨는 파를 더 얹어줄까?라고 한다. 사에키 씨의 가게에 파는 마늘 꼬치도 아주 맛있다. 역시 와사비를 살짝 찍으면 맥주를 부른다.


이 모든 게 전부 코로나 이전의 이야기다.

사에키 씨는 이렇게 생겨서 한 번 그려봄



그래서 오늘의 선곡은 사에키 씨가 너무 좋아하는 신승훈의 그 노래

https://youtu.be/k4X0z_LvDDs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영화를 보고 나서 시간이 조금 흐르면 영화의 끝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영화를 필요 이상으로 너무 많이 봐서 그런 건지 아니면 뇌의 어떤 구간이 끝이라는 걸 애써 기억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인지. 어제도 영화를 두 편 봤는데 역시 하루가 지나니 끝이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끝은 늘 그렇다.


꿈을 꿨는데 나의 꿈은 정말 뒤죽박죽 초현실이다. 그래서 꿈을 꾸고 나면 꿈을 잊어버리기 전에 메모를 해 놓는다. 잠이 까무룩 공격을 해도 꿈의 정경을 메모를 한다. 그래야 꿈 전체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꿈이라는 건 신나게 꾸고 나면 끝은 고사하고 무슨 꿈을 꿨는지, 내용이 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꿈을 꿨다는 기억만 있다. 그래서 초현실 꿈을 꾸면 메모를 해 둔다. 으 하는 얼굴로 미친놈처럼.


아니 그런 꿈 따위 기억이 안 나면 어때?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메모를 해 놓으면 현실에서도 꼭 꿈속에 있는 것 같은 기이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 그게 꼭 좋은 것은 아니나 나쁘지는 않다. 왜냐하면 초현실이니까. 좋다고만 할 수 없는 이유는 꿈속에서도 불안에 떨고 있거나 무서운 것들이 주위에 도사리고 있어서 이다.


[꿈의 내용]

어제는 나를 잘 안다는 사람이 나를 횟집으로 데리고 갔다. 가면서 나에게 자신의 아내와 신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나는 이 사람을 모르는데 왜 따라갈까, 생각을 했지만 그것도 잠시, 곧 횟집에 들어갔다. 횟집인데 횟집 같지 않고 여느 선술집 같았다. 그 사람은 여기의 술집을 잘 아는 사람 같았다. 직원이 구십 도로 인사를 하고 우리를 한 테이블로 안내를 했다. 뒤돌아 보니 직원은 계속 구십 도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했고 직원은 구십 도로 꺾인 몸으로 나를 안내했다.


안내를 받고 따라가니 또 다른 사람이 나타나서 이 복도를 타고 가라고 했다. 또 다른 사람은 직원 복장은 아니었다. 복도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는데 앞니가 입 밖으로 튀어나와있고 머리는 아주 짧은 스포츠형에 눈의 초점이 없었다. 예를 들자면 영화 '잭 더 자이언트 킬러'에 나오는 못생긴 거인이나, 영화 '베오울프'에 나오는 그렌델을 닮았다.


나는 복도를 따라 끝까지 갔다. 복도의 끝에는 문이 달려 있고 그 문을 여니 또 다른 횟집(이건 진짜 바닷가에 붙어 있는 횟집 같은 횟집) 같은데 계단을 타고 내려가서 화장실에 가야 했다. 그런데 계단이 동남아 지역의 계단식 논처럼 타원형에 밑으로 한 없이 내려가야 했다. 계단을 내려 내려가니 횟집의 바닥이 나왔는데 화장실은 계단의 중간에 있었다. 그래서 다시 계단을 오르려 하니 내려올 때는 몰랐지만 오를 때는 말 그대로 올라야 했다. 낑낑 거리며 벽을 타듯이 계단을 올라야 이동이 가능했다.


다시 계단을 올라 중간에서 빠져야 화장실로 갈 수 있다. 거기서 화장실용 실내화를 신어야 하는데 신발이 가오리처럼 아주 컸다. 한쪽 신발에 두 발을 다 집어넣어도 될 것 같았다. 가오리 실내화를 신호 기우뚱 거리며 화장실에 가니 소변기가 3개가 있는데 2개는 망가져 있고 하나만 제대로 있었다. 제대로 된 소변기 앞에는 이빨이 사람 같은 개가 변기를 핥고 똥 같은 것을 먹고 있었다.


꿈 해석가님들, 저는 꿈을 꾸면 화장실이 압도적으로 많이 나옵니다. 저의 삶이 더러워서 그런 겁니까. 화장실도 집에서처럼 깨끗한 변기가 아니라 아주 더럽고 움직일 수도 없을 정도로 재래식 화장실에서 무서워 벌벌 떨고 있다가 결국 똥통에 빠지기도 합니다.


나는 할 수 없이 고장 난 두 개의 소변기 중에 하나의 소변기에 오줌을 누려했다. 그런데 소변기가 아예 박살이 나고 시멘트 벽에 소변기가 박혔던 흔적에 소변을 보려 하는데 사람 이빨을 가진 개가 와서 나의 다리를 핥았다. 그 순간 등으로 더럽다는 느낌이 척추를 타고 뇌를 건드렸다. 개는 온몸이 하얀 털을 가졌는데 이빨은 사람 이빨이고 입 주위에는 똥을 먹은 표가 났다. 그리고 화장실에는 또 다른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아주 더러웠는데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묻고 사람 이빨의 개와 그 사람과 함께 사진을 찍고 화장실을 나왔다.


그래서 끝은 어떻게 됐냐고 하면 모른다. 메모를 하다가 잠이 다 달아나버려서 그냥 일어났다. 꿈이라는 게 늘 이런 식이다. 그 시간이 한 6시 30분쯤 된다. 잠은 안 오지만 머리는 몽롱하고 아직 실제로 생리적 현상이 나오는 시간은 아니고, 이렇게 일어나면 애매하다. 예전에는 바닷가에 맥도널드가 24 시간 해서 일찍 일어나면 거기에 가서 커피를 홀짝이며 맥모닝 같은 걸 먹으며 책을 좀 읽고 있으면 사람들이 하나둘 출근을 하고 학교를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버지의 마지막도 사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마지막을 지켜봤는데, 그래서 그 마지막의 장면을 컴퓨터에 길게 기록을 해 놨는데, 그런데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누군가는 이 세상에 없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왜 그렇게 많이 하냐고 하는데 그렇게 많이 하지 않으며, 또 내 아버지는 너무 하찮아서 나 정도가 이렇게 언급을 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기억하지 않기 때문에 왕왕 아버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하루키도 70이 되도록 언급을 하지 않았던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2019년 문예지 문예춘추 6월호를 통해 꺼냈다. 제목은 ‘고양이를 버리다 – 아버지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이며 후에 한국에는 단편집으로 출간이 되었다. 나는 코로나가 덮치기 전, 한국 출간이 되기 전 하루키의 신작 에세이가 실린 이 문예지를 구입하기 위해 일본으로 가서 달랑 이 책 한 권을 사들고 왔다. 그러고 나서 세상에 코로나가 도래했다. 하루키라는 대작가도 아버지를 잊지 않기 위해 어딘가에 자신의 아버지를 언급한다.

 

이 세상의 어떤 유명한 사람, 지도자, 대작가, 배우, 예술가. 세상을 호령했던 자들도 일단 달의 뒤편으로 가고 나면 누구도 애써 기억하려 들지 않는다.

나는 일어를 전혀 읽을 줄 모른다


나와 아버지는 그렇게 좋은 관계도, 그렇다고 안 좋은 관계도 아니었다. 어릴 때 목욕탕에 같이 가던 사이에서 후에 혼자 가게 되면서 사이는 보통의 서먹한 부자지간이 되었다. 누군가 먼저 다가가려 하지도 않았고 으레 그것이 마땅한 것처럼 지냈다.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는 걸 아버지와 나는 알아서 그랬는지 필요 이상의 말이나 친한 척은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나는 나로서 지냈다. 서로의 영역에 침범하거나 더 멀리 떨어지지 않고 그저 관조하거나 안부를 묻거나.

 


조깅을 하고 오는 길에 이제 잘 볼 수 없는 오래전에 지어진 집과 여인숙과 슈퍼를 봤다. 메타버스 시대에 언제 없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들이다. 시작은 있지만 언젠가 끝을 맞이하게 되면 그 끝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철거되기 전에 주민은 이곳을 떠날 것이고, 철거를 하는 사람들은 늘 하는 일상이라 특별히 이곳의 끝을 기억하거나 기록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끝은 기억에서 배제된다.


매년 반복되는 가을이지만 올해 가을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래서 올해의 가을 끝을 기억하는 사람도 어쩌면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내년에 다시 가을이 오기 때문에 지나간, 그간의 가을의 끝은 그대로 기억에서 사라진다.


얼마 전에 넷플 지옥을 봤다. 연상호의 ‘사이비’를 볼 때가 떠올랐다. 그때 상영관에서 3일인가 상영을 했고 이른 오전과 오밤중이거나 마지막에 영화를 틀어줬다. 마지막 상영을 봤는데 보는 사람은 우리 둘 뿐이었다. 사이비라는 영화를 보면 지옥이 정말 무엇인지, 그 세계관에 대해서 조금 알 수 있다.


지옥 시리즈도 그 속을 살짝 벌리면 그 지옥이 어떤 것을 말하는지 보인다. 내가 구치소에서 근무를 할 때 재소자(죄수)들의 접견(면회)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듣던 소리가 “우리 애는 죄가 없어요, 다 친구를 잘못 만난 겁니다”라는 말이었다.

 

“원래 그런 애가 아니에요, 너무 착해서 그래요”가 결국 죄를 짓고 구치소를 거쳐 교도소로 가기도 한다. 그리고 제대로 그에 타당한 죗값을 받지도 않고 출소되기도 하고, 또 엇비슷한 죄를 짓기도 한다. 죄는 유전자처럼 사람에게 옮겨 붙어 계속 반복하기를 바란다.


아이러니하지만 죄를 짓고 잡혀야 보호를 받을 수 있다. 편하게 잠들 수 있고 밥도 맛있게 잘 먹을 수 있다. 피해자 가족들이 돈을 들여 사람을 사서 가해자를 괴롭힐 수 없고, 아무래도 구치소는 안전한 곳이니까.


모두가 구치소, 교도소, 그곳이 지옥이라고 하지만 그곳은 사실 아주 평온하고 고요하게 흘러간다. 밥도 맛있고, 누구든 들어오면 규칙적인 생활로 인해 살도 찐다. 그래야 교정 시절의 인식이 좋기 때문이다. 진짜 지옥은 구치소 밖이다. 이 세상이, 이 현실이 지옥인 것이다.


밖에서는 자존심 뭉개지며 하하 호호 웃으며 사회생활을 하고 늦은 밤 파김치가 되어서 집에 들어와 잠자는 아이의 얼굴을 보며 눈물을 떨구며 이를 악물고 살아가야 하는 이곳이 지옥인 것이다.


넷플 지옥을 보면서 감독은 형태가 모호한 이 사회에 대한 불만을 등장인물의 대사를 통해 전부 쏟아낸 것 같았다.


친구가 근래에 억울한 일을 당해서 약을 먹으며 겨우 잠을 청하고 있다. 친구는 보스턴에 있다가 요리를 잘해서 자신의 키친을 가지고 열심히 일을 했다. 한국으로 와서 자신의 샵을 차리고 사람들에게 쉽게 요리를 해서 맛있게 먹는 것도 알려줬다. 준비해서 출간한 책은 굉장히 인기가 좋다. 인스타그램의 팔로워도 십만 명이 넘었다. 조금 푼수 끼는 있지만 그래서 사람들이 더 좋아한다. 그런데 얼마 전에 건물주에게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었다. 서류상으로,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 세를 밀린 것도 아니고 계약기간이 2022년까지인데 강제집행 서류가 나와서 당연하게도 법원에 정지를 신청했지만 기각이 나왔다. 황당하게도 이유가 없음이었다. 너무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곧 대법원으로 가고 변호사까지 선임을 했다. 변호사도 너무 이상한 일이라 고심을 하는 것 같았다. 건물주 여자는 부동산업자로 이런 쪽으로 아무래도 잘 아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 친구는 어제 잡지사와 인터뷰까지 했다. 거기서는 헤헤 호호하며 해야 하는데 너무 힘든 것이다. 소모하지 말아야 할 일에 에너지를 쏟아붓고 매일 지옥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왜 법은 억울한 사람을 자꾸 나타나게 만드는 것일까. 내년 오늘이 되면 작년 오늘을 웃으며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아이가 없어서 부모 마음은 잘 알 수 없지만 아이에 대한 사건사고의 법 처벌은 늘 사람들과 수직적이다. 정인이 양모 감형에 대한 7가지 이유를 봐도 그렇지만 법은 우리를 지켜준다기보다 억울한 사람을 자꾸 양산해낸다. 힘이 없고 세상의 약자는 법에 의해 보호를 받아야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런 곳이 지옥인 것이다.  


끝은 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영화는 정말 끝이 어떻게 끝났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꿈도 그렇다. 꿈은 끝이라는 게 너무 모호하고 힘들다. 처음이 있으면 끝이 있을 테니까 우리의 인생도 끝이 있을 것이다. 있겠지.









저 안에서 치킨에 맥주를 홀짝홀짝하면 참 맛있겠다.


가을의 색은 아름답지



너도 이제 겨울을 견뎌야 하겠구나


오전에 걷기 좋은 날이다


여기는 어디일까. 우리는 매일 어디로 가는 걸까. 매일매일 이동하는데 도대체 끝은 어디일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stella.K 2021-12-03 19: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래 전 비슷한 꿈을 반복해서 꿨던 적이 있죠.
저는 그게 해소되지 못한 욕구불만이 있어서는 아닐까 싶기도 해요.
생각도 많고. 또 젊었을 땐 잠을 엄청 많이 자게 되죠.
잠과 꿈은 아무래도 비례하는 것 같습니다.
근데 지금은 꿈을 거의 안 꿔요. 안 꾼다기 보다 거의 잊어버리는 거겠죠.
그러니까 화장실 꿈도 거의 안 꾸죠.
잠도 줄어서 꿈 꿀 새도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나이 드니까 그건 좋더라구요.
전엔 꿈을 너무 많이 꿔서 자고 일어나도 개운하지 않을 때도 있었거든요.
쓰고 보니 나이 엄청 많은 거 같죠? 뭐 적지는 않습니다.ㅋㅋㅋ

근데 잡지 사러 일본까지 갔다 오시고.
하루키 정말 좋아하시나 봐요.
맨 밑의 사진은 비틀즈의 그 문제의 앨범 자켓을 패러디...?ㅋㅋ

교관 2021-12-04 11:47   좋아요 1 | URL
저도 꿈을 많이 꿔서 더 피곤한 것 같아요 ㅋㅋㅋ 어제도 5시간 잤는데 꿈 속은 평소에 보지 못하던 인간들이 나타나서 벽짚고 난리 옆차기를 하는 등 꿈 속도 만만찮습니다.

중학교 때 우연찮게 하루키 놀웨이숲을 읽고서는 그만, 발을 빼기가 이젠 어려워졌습니다 ㅠ
 

개좆 같다, 는 말은 표준어다. 우리는 흔히 표준어를 써야 한다고 배운다. 그래서 욕을 할 때에도 이렇게 표준어를 구사하면 표준어가 아닌, 우리가 하위 언어로 인정하는 욕보다 괜찮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개좆 같다. 의 해석도 찰지다. 어떤 대상이나 상황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이다. 발음도 표준어니까 표기를 잘해놨다.


개:졷깓따


그래서 상대방이 몹시 마음에 안 들면 개좆 같다,라고 하면 된다. 그리고 몹쓸 짓거리를 하는 상대방이 나보다 나이가 많으면 개좆 같네요.라고 하면 된다. 야, 너는 나보다 나이도 어린 게 얻다 대고 욕질이야,라고 한다면 친절하게 개좆 같다는 말입니다, 표준어거든요, 그러니 당신이 이런 식으로 상식 이하의 짓을 했을 때에는 해도 됩니다.


사전을 보면 괄호 안에 (속되게)라고 되어있다. 속되다, 라는 말은 ‘고상하지 못하고 천하다’라는 말로 욕을 할 때에는 표준어지만 고상 한 건 때려 부숴 버리고 천하게 하는 것이다. 뭐랄까 피자를 먹으며 건강을 생각하지 말자는 말이다. 피자를 먹으면서 왜 몸에 좋은 피자를 찾아? 피자는 짜고, 두툼하고, 끈적끈적한 그 맛, 그 맛으로 먹는데 피자를 먹을 때에는 건강을 버리고 그냥 맛있게 먹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들에게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방이 나타났을 때 욕을 할 때에는 표준어인 이 ‘개좆 같다’를 하라고 할 수 있느냐 하면 그게 쉬운 문제가 아니다. 어린이들이 다니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이, 정말 개좆 같네”라고 너도나도 하고 다니면 낭패인 것이다.


여기서 인간의 삶이라는 게 이미 만만찮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어린이라고 왜 욕을 하고 싶지 않을까. 억울한 일을 당하면, 친구를 빼앗기면, 누명을 쓰면 욕이 나오지만 어린이라서 그동안 잘도 참고 있다. 어른들은 여기저기서 욕을 똥처럼 싸질러 대면서 아이들에게는 욕을 하지 말라고 한다. 그럼 아이들은 표준어라도 욕을 하지 않는다. 욕이 아무리 하고 싶어도 꾹 참는다. 잘 참는다. 아이들은 제일 먼저 배우는 게 참는 것이다. 어른들은 늘 이거 하지 마라, 저거 하지 마라,라고 할 뿐이다. 아이들은 자신을 위해서라기보다 부모님, 내 형제를 위해서 참는다. 그런데 어른들은 자신을 위해서 참지 않는다. 어른들에게 표준어를 써야 한다고 배운 아이가 이렇게 ‘개좆 같다’를 들고 와서 보여주며 이거 표준언데 왜 쓰면 안 돼요?라고 말한다면 그저 욕이니까 하면 안 된다고 해야 할까. 어렵다. 어려운 문제다. 인생은 이렇게 어렵다.


어린이가 욕을 하면 어른들은 저 아이는 큰일이 난 아이처럼 여긴다. 하지만 어린이 때 욕을 찰지게 한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서 이상하게 변해버린 사람이 있냐고 하면 딱히 없다. 그래도 어른들은 아이들 앞에서 욕을 하지 않는다. 아니, 하지 않으려 한다. 어른들이 본보기가 되면 되니까. 그러나 아이들이 친구들에게 들은 욕을 집에서 내뱉기도 한다. 그러면 그 쌍스러운 말을 처음 듣게 된 어른들은 큰일이 난 것이다. 그때부터 머리의 회로가 바빠지기 시작한다.


우리는 보통 입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생존을 바라는 게 아니라 삶을 바란다. 하지만 어느 순간 보면 하루하루를 생존하고 있다. 인간의 삶이라는 게 늘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기 때문이다. 계획 따위 백날 잡아봐야 계획처럼 되지 않는다. 펜싱 해설위원이 한 말이 있는데 “생각이 길면 용기는 사라지는 법, 걱정할수록 부정적인 생각만 쌓이고 할 수 있는 일도 제대로 못하게 된다. 완벽한 계획 따위 없고 무슨 일이든 하면서 완성되는 법이다. 돈 벌고 싶고 부자가 되고 싶으면 행동하는 것이 제1 과제다. 학습된 무능에서 벗어나라. 스스로 한계를 만들지 마라.”였다. 무슨 일이든 하면서 완성되는 법이다. 우리는 그걸 잘 알고 있다.


매일 울고 싶고 욕하고 싶으면 하면 된다. 개좆 같은 세상인데 개좆 같다고 말하면 된다. 그렇게 욕을 한다고 누가 욕을 할까. 인간관계가 힘들고 복잡한 이유는 단순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스스로 한계를 만들어서 타인의 눈치를 보며 자정작용을 거쳐 검열을 해서 말하고 행동한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어떤 대상을 향해 개좆 같다고 말하면 된다.

개새끼도 표준어다. 주로 남자에게 이른다고 되어 있다. 나는 개들과 인연이 좀 있다. 유기견을 데리고 와서 키울 때 동물 병원에서 일 년도 살지 못한다고 했다. 이전 주인이 그랬는지 가위나 칼로 혀를 좀 잘라놨고 뒷다리가 꼬여서 매일 주물러 주지 않으면 잘 걷지 못했다. 무엇보다 심장이 너무 안 좋아서 데리고 왔을 당시에 동물병원에서 일 년을 못 살 거라고 했다. 집에는 또 이미 오래된 유기견 한 마리가 있었다.


사진을 찍어 전단지를 만들어 동사무소와 근처 동물병원에 뿌리고 주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는데 3개월인가 4개월인가, 기다려도 주인이 나타나지 않아서 그냥 죽기 전까지 일 년이라도 키우자 해서 그냥 키우게 되었다. 그 뒤로 11년 정도를 살다가 얼마 전에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이 녀석은 내가 집에 오면 그렇게 품에 파고들었다. 내가 앉으면 다리 위에 앉아버렸다. 조카가 어렸을 적에는 내 양반다리로 두 녀석이 서로 앉으려 했다.


다리 위에 기어 올라와 앉으면 그 뒤로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피곤해 죽겠는데 집에 오면 개 두 마리가 자석처럼 달라붙었다.


이렇게 무릎 위에서 잠든 작고 부드러운 생명체를 어루만지고 있으니까, 우리 집으로 온 주인 잃은 강아지가 나를 완전히 신뢰한다는 듯 깊이 잠들어 있는 것을 보고 있으려니까 가슴이 뜨거워졌다. 나는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고 가슴에 손을 대고 심장의 박동을 느꼈다. 작은 강아지의 심장은 희미하면서도 빨리 뛰었다. 나 또한 강아지를 안고 심장이 뛰고 있었다. 우리는 자신의 몸에 맞춰 쉬지 않고 진지하게 뛰는 심장의 시간을 나누고 있었다.


강아지는 꼭 어떤 것을 발견하려는 듯 깊이깊이 잠들어 있었다. 저 바닷가에서 울리는 것 같은 고요한 숨소리를 내며 배가 그에 맞추어 아래위로 조용히 움직였다. 나는 이따금 내게로 온 신비한 생명체가 거기에 있다는 걸 확인하게 위해 손을 뻗어 그 따스한 몸을 만졌다. 하루키의 소설 ‘태엽 감는 새’에도 나오지만, 손을 뻗으면 무엇인가가 만져지고, 그 무엇인가의 따스함이 느껴지는 것, 그것은 멋있는 일이었다. 오늘 문득, 나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상당히 오랫동안 그런 감촉을 상실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표준어인 개새끼도 이런 감촉을, 개에 대해서 이런 감촉을 알고 있는 사람이 썼으면 좋겠다. 작고, 힘없고, 세상의 약자인 아이들에게 신뢰를 받고 있다고 느낀 어른들이 그래서 개좆 같은 세상에서 개좆 같다고 말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지 못한 어른들이 훨씬 많은 이 세상에서 아이들에게 받은 그런 감촉을 알고 있는 어른들이 시원하게 욕을 할 수 있는 세상이었으면 참 좋겠는데 말이야.


고요한 시선 대치 중, 폭풍전야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stella.K 2021-12-02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11년을...!
정말 그 개는 복을 누렸네요.
개에게 그런 상처를 입히고 안 찾는 걸 보면 버린 거죠.
정말 누군지 개새끼란 욕도 아깝네요.
얼마 전에 무지개다리를 건넜다니 많이 보고 싶으시겠어요.
저는 지난 여름에 18년간 키운 다롱이(요크셔 숫컷)을 보냈습니다.
한 한 달 넘게 밤마다 울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살만큼 살다갔으니 아쉬울 건 없는데 문득 생각이나요.
허전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또 키우자니 그렇고...
애매한 상황이죠.ㅋ

교관 2021-12-03 11:57   좋아요 1 | URL
저 두 마리 다 유기견이었어요. 하얀개도 18년 동안 잘 지내다 갔어요. 잘 지냈다고 믿고 싶어요 ㅋㅋ. 개는 주인에게 마음을 한 번 주고 나면 인간처럼 밀고 당기고를 하지 않으니까, 온통 주인에게로 눈과 마음이 가 있어서 개 입장에서는 잘 모르겠지만 ㅋㅋ 잘 지냈으리라 믿고 싶어요. 동물의 영역에서 빠져나와서 인간의 곁으로 왔지만, 그렇닥고 인간이 되지는 못하고 주인만 있으면 행복충만하지만 그렇다고 24시간 붙어 있을 수는 없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딱한 동물이 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카스테라,라고 쓰면 카스텔라,라고 바꾸라고 나온다. 나는 카스테라다. 카스텔라는 싫다. 나처럼 소심한 사람이 '싫다'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카스테라는 카스텔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카스테라가 나의 삶에 부드럽고 뻑뻑하게 들어왔지 카스텔라는 머나먼 나라의 금발의 미네르바처럼 생소하기만 하다.


카스테라를 처음 맛본 그날, 그날이 확실하게 기억이 나진 않지만 대단한 일이었다고 기억된다. 카스테라가 가진 그 촉촉한 감촉이라든가 입천장에 달라붙는 느낌이라든가. 왠지 처음에는 텁텁해서 우유와 궁합이 잘 맞다, 라든가.


카스테라를 처음 먹어보기 전의 빵에서 봐왔던 모양에서 벗어난 사각형의 모양에 어린 마음을 몽땅 빼앗겨버렸다. 그동안 카스테라를 모르고 잘도 어린 삶을 헤쳐 왔는지 모를 정도였다. 처음으로 카스테라를 맛 본 그날 루벤스의 그림이 머리 위에 떠오르고 어린 나의 작은 혼이 뭉크의 그림처럼 빠져나갔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지만 그 못지않은 경험이었다.


카스테라라는 이름도 그때 처음 들어서 생소했지만 어느샌가 입으로 카스테라, 카스테라,라고 되네 이다 보면 어느 순간 친구처럼 가까이 와 있었다. 묘한데 자꾸 말하게 되는 미지의 친구 이름 같았다. 이후로 집 앞 구멍가게에 가면 카스테라를 슬쩍 집어 들고 동전을 내밀고 볕이 드는 따뜻한 대문 밑에 앉아서 그것을 제대로 뜯어먹곤 했다.


카스테라는 어쩐지 겨울에 많이 먹었다. 그늘이 아닌 따뜻한 곳에 앉아서 뜯어서 먹고 있노라면 추운 겨울이라도 왠지 따뜻했다. 집에서 먹는다면 우유를 뜨겁게 난로 위에 데워서 같이 먹었다. 그러면 카스테라는 ‘겨울은 말이야, 카스테라와 함께 보낸다면 따뜻할 거야’ 하고 말해주었다. 그 보이지 않는 말에 기대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카스테라는 기억 속에서 점점 멀어지듯이 곁에서 사라졌다. 지금은 손만 뻗으면 카스테라보다 열 배는 맛있고 백배는 예쁜 카스텔라가 세계를 점령했다. 이후로 겨울은 그렇게 따뜻하지 않았다. 덥덥하거나 춥거나. 그런 겨울이었다. 그래서 겨울은 더 이상 기다리는 계절이 아니게 되었다.


겨울을 싫어한다고 해서 마음으로 밀어낸다고 해서 뒤늦게 온다든가, 오지 않거나 하지 않는다. 겨울은 낙엽 지고 비가 오고 나면 어김없이 입에서 입김이 후후 나오면서 옆에 와 있다.


크리스마스가 20여 일 앞으로 다가온 겨울의 밤은 어느 곳이나 반짝반짝 전구와 트리가 빛을 발한다. 언제부터인지 그 반짝거리는 불빛들 앞을 지나칠 때면 빛나는 전구들은 조금은 무서운 얼굴을 하고 ‘넌 행복하니? 그래서 넌 만족하냐? 네가 있는 곳은 어디냐?’라고 자꾸 물어온다. 그 대면이 껄끄러워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반짝이는 전구를 피해서 다녔다.


카스테라 같은 여자가 있었다. 부드럽고 가만히 잠을 자고 있는 모습을 보면 부서져 없어져버릴 것 같은 여자. 그녀는 느릿하게 움직이는 나를 달리게 만들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언젠가 그녀의 긴 속눈썹을 본 적이 있다. 달빛이 긴 속눈썹에 내려앉았을 때를 기억한다. 아름다운 모습.


세계는 묘해서 눈앞에 있는 것에 손을 뻗어도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어서 빨리 그녀에게서 졸업하고 싶었다. 카스테라와 같은 그녀는 멀리 떠나가 버렸다.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린 것이다. 예고도 없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겨울비에 카스테라는 구멍이 나고 씻겨 비 비린내와 함께 없어졌다.


그녀에게서 졸업을 해버리고 나면 그동안 그녀를 좋아하고, 너무 좋아해서 미워했던 그 마음까지 모두 거짓말이 될까 봐 두려웠다. 가끔 생각한다. 요즘은 카스테라가 어디에 있을까. 다시 카스테라를 손에 움켜쥘 수 있을까. 입으로 다시 카스테라, 카스테라라고 한 없이 불러보고 싶다고.


댓글(3)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stella.K 2021-12-01 14: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맞아요. 예전엔 카스테라라고 했는데 어느 때부턴가 카스텔라라고 하는데
뭔지 모르게 불만스럽더군요.
요즘엔 그거 먹을 일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특별히 좋아하지 않아서.
그래도 예전에 저 어렸을 때 전기 오븐을 처음 사고 엄마가 계란
잔뜩 넣고 해 주시던 다소 투박한 카스테라가 문득 생각이나기도 합니다.
정말 우유와 함께 먹으면 속이 든든할 텐데.
초등학교 때 점심 도시락 대신 사 가져가기도 했었죠.^^

교관 2021-12-02 12:10   좋아요 1 | 수정 | 삭제 | URL
도시락으로 엄마가 만들ㅇ어주신 카스테라를 들고 가서 점심도시락으로 앉아서 먹으면 얼마나 맛있었을까요. 그 상상만으로도 400자 원고지 10장 정도의 이야기가 나올 것만 같습니다. 오늘 날이 추워서 더 따뜻하게 느껴져요 ㅎㅎ 감사합니다.

교관 2021-12-02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그인 하기 전에 댓글을 달았더니 이렇게나 ㅋㅋㅋ
 

아주 멋지다고 생각해.

이런 마력적인 색을 본 적이 있어?

키위는 아주 냉소적이야.


오래된 멍이 든 것 같은 얼굴로 껍질에 가려져 이 마력적인 색을 전혀 나타내지 않는다. 얄밉게도.

키위의 이 컬러, 이 색, 이 색감을 만나려면 껍질을 까야한다.


이 지정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이 녹색은 흔히 볼 수 있는 색이 아니야.

러브 크래프트의 소설에 나오는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굉장한 힘을 가진 미지의 존재가 뿜어내는 빛처럼 보여.

정말 대단하지.

우리가 눈으로 보는 모든 색에서 벗어난 색이야.

키위를 처음 봤을 때 먹기 전, 이 키위의 색에 빠져서 얼마나 쳐다봤는지 몰라.

이 색감 때문에 말이야.


초록 초록한 색감에 물감 번지듯 퍼져 있는 씨앗의 검은색이 마치 피처럼 흘러내렸다.

키위가 아니면, 키위를 까 보지 않으면 만날 수 없는 색이다.


니나가와 미카를 데리고 와도 이런 색감의 사진을 담아내지는 못할 걸.

테리 리차드슨도 마찬가지야.

녹색과 검은색이 이렇게도 퇴폐미를 뿜어내다니.


그 퇴폐미를 씹어 먹는 맛 또한 퇴폐적이다.

그래서 너무 아름답다.


이 세상의 모든 '미' 중에서 퇴폐미를 이길 수 있는 아름다움은 없을 걸.

붉은 립스틱의 입술은 자두를 먹을 때보다 키위를 씹어 먹을 때 더 퇴폐적이다.

아라키 노부요시 영감님 이리 와서 이 키위의 퇴폐를 담아주세요.


껍질을 벗겨보지 않으면 그 안을 전혀 알 수 없다. 키위가 도대체 이렇게 퇴폐적으로 예쁜 색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껍데기만 보고서는 전혀 짐작할 수가 없지. 배우로 치자면 꼭 배두나 같다. 배두나는 퇴폐미를 장착한 몇 안 되는 배우라고 생각된다. 배두나를 보고 앗! 한 영화가 배구 출신의 배두나가 하루 밤 동안에 남편 구하기 우당탕탕 이야기였다.


공기인형을 지나 아이엠 히어까지. 도대체 배두나는 얼굴을 보고 그 속에 어떤 컬러가 있는지 도무지 분간이 가지 않아.

이거다 싶으면 어김없이 빗나가고 저거다 싶으면 더 멀리 가 있다.

표정 없이 있으면 그 거기서 퇴폐미가 키위의 씨앗 색처럼 흘러나오지.


키위 같은 사람이 되어야지.

70년대 지어진 골목의 뒤편 그림자에서 길게, 더 길게 퇴폐적으로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야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71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