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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스 패밀리를 보고 아, 해버렸는데 그건 감동을 받았다는 말이다. 셰어와 크리스티나 리치의 아담스 패밀리가 잊히려고 하는 와중에 본 애니 아담스 패밀리는 정말 멋진 영화라고 생각했다

영화 속 대사처럼 사람들은 잔인하다. 자신과 다르면 일단 배척하고 밀어내고 그것도 안 되면 공격하고 본다. 겉모습을 보고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맞게 잣대를 잰다. 겉모습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겉모습이 완전한 모습으로 인식해 버린다

존 가드너의 소설 ‘그렌델’을 읽어봐도 그런 모습이 잘 나온다. 그렌델은 인간과 친해지고 싶어서 먼저 다가가지만 인간은 흉측하게 생긴 그렌델의 겉모습을 보고 죽여 버리고 만다. 나와 다르면 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21세기에는 더 많아진 것 같다

좀 벗어난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양희은이 박미선과 이지혜와 진행한 ‘거리의 만찬’에서 하차한다는 이야기로 한때 떠들썩했다. 그로인해 다음 내정 진행자였던 김용민이 자진 하차했다. 당사자들은 제외하고 이를 두고 각종 언론에서 사람들이 사랑으로 키워놓은 방송을 접으려 한다고 했다. 언론에서는 기존 3명의 진행자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보는 방송이라고 했는데 사실 거리의 만찬은 교양, 시사 프로그램 중에 시청률이 1.6%로 꼴찌였다. 계속 그렇게 유지를 했기에 방송국 입장에서는 개편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거리의 만찬을 주위에 물어보면 본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다. 라디오는 6개월에 한 번씩 개편을 한다. 청취율이 떨어지면 디제이는 가차 없이 교체된다. 거기에 누구도 토를 달지 않는다. 어떤 면으로는 김용민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게 깎아내리는지도 모른다

신천지에 대해서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하자면 이만희는 원래 유재열이라는 시한부종말론이라는 ‘장막성전’ 이단에서 일을 하던 직원이었다. 그런데 시한부종말론이 말하는 날짜에 종말이 오지 않았다. 아뿔싸. 유재열은 그 뒤로 튀었다. 그로인해 교단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교인들이 우왕좌왕 난리였다

그때 이만희가 그 사람들을 데리고 나와 신천지를 만든 것이다. 유재열이라는 사람은 알기 쉽게 가수 싸이의 장인어른이다. 그럼 이 신천지를 지금에 이르는 대규모로 키운 사람이 누구냐 하면 전남 광주 쪽의 베드로지파장 지재섭이라는 사람이다

이 사람이 광주민주화운동까지는 운동권이었는데 장모가 신천지라 장모 때문에 신천지에 빠졌는데 이 사람이 운동권의 시스템을 신천지에 도입을 해서 어마어마한 사람이 지금에 이르러 모이게 되었다. 이런 내용이 피디수첩에 다 나왔나? 피디수첩을 보지 못해서

신천지에 빠진 젊은 사람들이 왜 빠져 나오지 못하는가 한다면 이들이 말하는 영생의 숫자 144천명에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잘못하면 너 144천1등으로 영생을 얻지 못한다, 라고 하면 그들은 두렵다

키에르케고르의 저서 죽음에 이르는 병을 보면 그 병은 절망이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기독교의 희망은 영원한 생명인데 그 반대가 절망인 것이다. 절망은 곧 죽음에 이르는 병인데 신천지에서 144천 명 안에 들지 못한다는 배척은 바로 절망인 것이다

아무튼 아담스 패밀리는 가족 모두가 개성으로 엉망진창으로 생활을 한다. 근데 그게 정말 행복해 보인다. 가끔 망가지고 자주 엉망진창이어도 우리 인간은 괜찮다. 겉모습이 비슷한 무개성의 인간들보다 개성으로 똘똘 뭉쳐 나빠진 아담스 패밀리는 굿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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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감기에서 극렬하고 비열하고 찌질하기까지 한, 죽이고 싶었던 최동치 역을 맡은 최병모를 본 다음 영화에 최병모가 나온다고 하면 대체로 봤던 것 같다


최병모는 우리나라의 가장 쓸모없는 정치인, 관료, 인사과장, 정부관계자를 가장 밉게, 아니 가장 흡사하게 연기를 했다. 보고 있으면 저런 인간이 인간사회에 정말 속해있단 말이야? 하다가, 그래 저런 인간은 늘 있었지, 하며 욕이 대번에 튀어 나온다


최병모는 야망에 불타올라 권력과 돈을 쫓아가는 연기를 정말 잘 하는 것 같다. 그러다가 끝에는 고개를 숙이고 찌질해지는 표정까지 정말 압권이다. 최병모라는 배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채 최병모라는 배우가 나오면 그 영화는 영화의 흥망성쇠를 떠나 보게 된다


드라마는 잘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마지막으로 본 그의 영화가 허 스토리였다. 최병모가 나온대서 또 할머니들을 괴롭히겠지, 재미있겠군. 하며 봤다. 하지만 할머니들 중 한 명인 배정길 할머니의 바보 아들로 나오는데 마지막에 찡 했던 기억이 있다


공작을 받아놓고 아직 보지 않고 있는데 거기서는 또 어떤 역할일지 참 궁금한 배우다. 입을 씰룩거리며 비열한 표정을 지을 때는 정말 비열한 인간처럼 보인다. 그게 배우라고 생각한다. 재작년인가 결혼을 한 것으로 아는데 행복한 일상과 함께 지속적인 멋진 연기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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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신이 말하는 대로‘는 반복되고 무료한 생활에 권태를 느낀 고등학생의 주인공이 아!! 존나! 무료해! 뭔가 화끈한 일이 일어났으면! 하고 외치는 바람에 신과 인간들이 게임을 하는 영화다


그리고 게임에서 지면 캡처에서처럼 잔인하게 죽음을 당한다. 영화는 중반까지는 원작과 흡사하게 흘러가지만 중반을 넘어서면서 원작과는 전혀 다른 전개로 빠지면서 재미가 급 떨어진다


이 영화는 딱 1년 전에 보고 캡처를 해놨는데 밀리고 밀려서 이제야 리뷰를 하는데 잘 생각이 안 난다. 초반 신에게 게임을 져서 머리통이 터지면서 죽어가는 장면은 꽤 잔인한데 피를 빨간 구슬로 표현을 해서 또 만화스럽다


신은 무료하던 차에 공포를 줄게, 라는 식이다. 보이지 않는 웃음을 흘리며 신은 인간의 생명을 야금야금 앗아간다. 어쩐지 요즘의 팬데믹과 비슷한 것 같다. 이 영화는 영상보다는 원작으로 보는 것이 훨씬 와 닿을 것이다


신과 인간이 대결하는 영화나 소설은 몇 편 봤지만 기억에 남아 있는 소설이 이우혁의 ‘바이퍼케이션’이다. 샤프심을 세워서 손가락으로 누르면 샤프심이 여러 동가리로 부러지면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현상을 바이퍼케이션이라 하는데 소설은 그걸 아주 잘 표현했다. 총 3권으로 되어 있는데 취향이면 금방 읽어지는 것 같다


1권에서는 신이 나타나서 피의 낭자가 판을 친다. 전혀 신에게 대적할 수 없는 인간이 아무렇지 않게 살인을 저지르는 신에게 접근하며 사건을 해결해 나가려 한다. 하루키를 읽으면 음, 음, 하며 읽는데 이우혁은 와와하며 읽게 된다


소설이든 영화든 도저히 접근 할 수 없는 존재와 대결을 하면 실패와 함께 자주 무너지지만 결국 패배는 하지 않는다. 신과 실컷 대결을 하다가 뜬금없이 주인공이 마지막에 죽어버리는 영화도 있지만 대부분의 절대적 존재에게 무너지다가 마지막에는 그래도 패배는 하지 않는다


지금 숨 쉬고 있는 공기 틈으로 공포를 몰고 들어온 바이러스를 신의 장난이라 한다면 소설처럼 우리도 패배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대가를 치러야겠지만. 소설이 허구를 바탕으로 논픽션을 비틀어 진실에 접근한다면 현실의 사실이 마치 허구 같은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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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키가 언덕에 누워 라디오를 듣다가 결심을 하고 오늘 밤 떠날 준비를 한다. 키키는 올해로 13살이 된 꼬마 마녀이다. 오래된 전통에 따라 수행을 떠나 1년을 혼자 살아야 한다. 마녀 배달부 키키, 키키의 딜리버리는 낯선 곳에서 좌충우돌하며 성장하는 이야기다. 키키가 집을 떠날 것이라고 결심을 말할 때 부모님은 키키의 결정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힘들면 언제든 돌아오라고 하는 부모의 모습이 진정한 부모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키키를 떠나보내는 동네 사람들의 모습에서는 불안과 기대가 동시에 보인다. 조금 불안하지만 키키를 믿어보자. 뭐든 처음은 실수투성이고 불안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믿음을 가지고 바라봐주는 이들이 있다면 그건 금방 극복할 수 있다. 우리도 그런 과정을 겪고 지금의 모습에 다다랐다

낯선 동네에 도달한 키키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흥분을 하지만 키키의 마음과 달리 사람들은 전부 바쁘고 무신경하고 불친절하다. 복잡한 도시에서 빗자루 비행은 사람들에게 방해만 줄 뿐이다. 안녕하세요, 저는 마녀 키키 입니다. 라고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지만 흥, 하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

키키는 아무도, 그 누구도 자신에게 마을 사람들처럼 관심이 없다는 걸 알고 상심을 배운다. 사람들은 오히려 키키를 이상한 애로 보고 경계를 하는 모습에 좌절을 한다. 그것이 인생에 있어서 첫 좌절인 것이다. 그렇지만 키키는 나중에, 먼 훗날에 알지 못하는 이방인에게 사람은 누구나 경계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이 성장의 과정이니까

생각이 많아진 키키는 그래, 한 번 해보는 거야. 결심을 하고 빵집 아주머니를 도와주며 사람들은 키키에게 조금씩 마음을 연다. 그리고 빵집 아주머니는 다락방을 키키에게 내어준다. 다락방은 좁고 먼지가 잔뜩 쌓여있다. 키키는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기에, 키키는 수행을 하러 왔기에 자신의 손으로 다락방을 청소하고 가꾸어 나간다

자립에는 돈이 필요하고 돈은 일을 해야만 따라온다. 키키는 자신의 장점으로 딜리버리를 시작하다. 키키는 손녀의 생일파이를 배달하려고 한 할머니의 집에 방문을 하지만 오븐의 고장으로 케이크는 준비되지 못하고 할머니는 배달 비를 주며 배달은 한 것으로 치겠다고 한다

키키는 이 할머니를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다. 키키는 오랫동안 쓰지 않던 화덕에 불을 지펴 파이를 어렵게 굽는다. 정성을 들여 구운 파이를 할머니의 손녀에게 배달을 한다. 전 속력으로 날아간다. 거센 비가 쏟아져 홀딱 젖은 채로 키키는 파이를 꼭 안고 배달을 한다. 손녀가 얼마나 기뻐할까, 키키는 그런 생각에 힘들게 배달 한 것도 잊어버린다. 어렵게 배달을 했지만 할머니의 파이를 받아 든 손녀는 시큰둥한 반응으로, 파이 싫어한다고 했는데 왜 보냈지? 라고 한다

할머니가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키키는 생각한다. 키키는 할머니의 마음을 손녀에게 전달하지 못한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는다. 다락방으로 와서 그대로 드러눕고 만다. 키키는 톰보와 만나면서 마음을 열고 다시 배달을 열심히 한다

과연 키키는 잘 성장해나갈 수 있을까. 키키는 수많은 (마음의)방해로부터 자신만의 리추얼을 잘 형성해 나갈 수 있을까. 키키와 지지는 서로 대화를 하며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사이지만 지지는 후에 인간의 언어를 잃어버리고 만다

키키의 마법이 떨어졌을 때 지지의 언어도 잃어버리게 된다. 키키가 다서 마법을 찾아서 톰보를 구했을 때 다시 지지도 인간의 언어를 찾지 않을까 하지만 지지는 영영 인간의 언어를 하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톰보를 구하고 난 후 지지는 키키의 어깨위에 올라앉는다

키키는 언어를 잃어버린 지지가 자기 곁으로 오지 않다가 어깨위로 올라왔을 때 조금 놀라는 듯하지만 금세 웃으며 얼굴을 부빈다. 그 장면에서 이제 지지가 인간의 언어를 하지 않아도 받아들이는 성장한 키키의 모습이 보인다

키키는 그만큼 성장했다는 말이다. 어린이였을 때는 동물과도 이야기를 하고 인형과도 이야기를 하지만 우리는 어느 순간 유년기와 이별을 하는 날이 온다. 유치원에 처음 들어갈 때 엄마와 이별하기 싫어서 울고불고 하지만 다른 만남을 알게 된다

키키는 그만큼 성장을 했다. 지지가 자신과 언어를 주고받지 않아도 지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지지가 언어를 잃어버린 게 아니라 키키가 달라진 것이라고 인터뷰에서 말했는데 그 한 장면의 작화로 키키의 성장을 말한다. 정말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지지는 고양이 삶으로 돌아가고 키키는 좀 더 성장을 했다. 우리는 고양이나 개와 언어를 통하지 않지만 교감은 충분히 느낀다. 키키는 그것을 알아간다. 유년기와의 이별은 성장통을 겪지만 톰보라는 또 다른 관계를 맺게 된다. 그것이 성장이고 인간의 삶이다. 불안과 공포가 끊임없이 괴롭히지만 그러면서 키키는 성장해 나갈 것이고 그 모습을 우리는 마음속으로 영원을 한다

디오라마는 키키의 마을 떠나 바다가 보이는 첫 마을을 향해 기대를 안고 날아가는 장면을 연출해봤다. 키키가 비행하는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빗자루를 뚫고 아크릴 봉을 사용했다. 어쨌든 세상에서 하나뿐인 키키의 디오라마를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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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나라의 앨리스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두 번째 이야기로 원작도 상상에 상상을 더한 이야긴데 영화로는 거기에 보는 상상과 듣는 상상을 덧입혀서 만들었다. 루이스 캐럴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피터 팬을 만들어낸 제임스 배리의 이야기인 ‘네버랜드를 찾아서’를 보면 이 상상력이 어떻게 탄생되었는지 잘 나와 있다. 네버랜드를 찾아서는 아주 감동적이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작품보다는 그 작품을 만들어낸 작가에 관심이 더 많은 것 같다. 피츠 제럴드도 그렇고 헤밍웨이, 백석이나 조지아 오키프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 재미가 있다


거울나라의 앨리스는 시간, 시계에 관한 이야기다. 하루키의 에세이 ‘시계의 조촐한 죽음’을 읽어보면 단순한 시계이야기를 이렇게 빠져들게 써놨다니 하면서 읽은 기억이 있다


자신의 삶 속에 들어온 시계, 요즘의 똑똑한 디지털시계가 아닌 태엽을 감아주어야(만) 하는 시계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그 시계의 죽음. 덜 똑똑한 것보다 더 똑똑한 것이 낫겠지만 똑똑함이 생활의 전부를 차지하지는 않는다. 그것을 시계를 통해서 잘 전달해준다


태엽을 감아주면 하루 동안은 꼬박 영차영차하며 시간을 알려주니까 다음 날 그 시간이 되면 태엽을 감아준다. 그건 아침에 일어나서 배변을 보고 밥을 먹고 옷을 입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릴 때 외할머니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서면 외할머니의 손목에 매달린 손목시계에 시선이 가곤 했다. 금색바디에 검은 가죽의 손목시계. 외할머니는 시계를 얼마나 오랫동안 차고 다녔던지 가죽은 낡아서 손목에 힘을 주면 곧 끊어질 것처럼 보였다


외할머니를 자주 볼 수 없었지만 시골에서 내가 사는 집으로 왔을 때는 외할머니 손목에 찬 손목시계에 관심을 가지곤 했다. 요즘 아이들처럼 똑똑하지 못해서 초등학교 저학년 때에는 초침시계를 보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외할머니의 손목시계가 다른 전자시계보다 좋아 보였던 건 무엇 때문일까


외할머니는 매일 비슷한 시간이 되면 시계태엽을 감아 주었다. 시계의 밥을 주는 거란다. 사람이 밥을 먹는 건 이상하지 않은데 시계가 밥을 매일 먹는 건 참 신기한 일이었다


그런 나의 마음을 알았는지 외할머니는 자신의 손목시계를 나에게 차 주었다. 가볍지 않고 묵직한 무게의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반짝이는 금색이 빛을 받아서 빛났다. 나는 시간도 제대로 보지 못하면서 그걸 차고 학교로 갔다. 시계가 손목 밖으로 드러나기를 바라면서


매일 밥을 줘야 하기에 편리하진 않지만 그 불편함이 시계와 좀 더 친밀하게 하는 관계를 형성시켜 주었다. 태엽을 감는 것은 귀찮지만 뿌듯한 행위라고 한 하루키의 말이 떠오른다. 드르륵 드르륵 태엽을 감다보면 느슨하게 풀려있던 것이 점점 팽팽해지면서 딱 고정되는 그 의식 속에서 나와 시계를 인지한다. 시계는 또 하루를 성실하게 움직인다


요즘처럼 몇 년에 한 번 전지를 갈아주면 되는 시계는 편리하지만 시간이 뚝 끊기면 그것대로 시계가 죽어버린 느낌이 드는 것이다. 요즘도 손목시계를 오른 쪽에 차고 다니는데 외할머니가 그렇게 차고 다녀서 그런 것이 아닐까, 하고 희미하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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