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 코드 - 평생 병 걱정 없이 사는 하루 6분의 비밀
알렉산더 로이드.벤 존슨 지음, 이문영 옮김 / 시공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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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만성간염으로 정기적으로 병원에 드나들게 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친구 하나가, 내 건강이 염려되었는지 이런 책을 선물로 건네줬다. 분명 내 취향의 서적은 아니라는 걸 알 텐데, 이런 책을 골라준 걸 보면 내가 나를 걱정하는 것보다 더 크게 걱정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본의 아니게 걱정 끼치게 된 게 미안하기도 하고.

 

취향이 아니더라도 선물로 받은 책은 읽어줘야 한다는 생각. 또 가급적이면 혹평도 피해야 한다는 생각. 그래서 읽었다. 혹평일지도 모를 감상문은, 그래도 써야겠다. 고마운 건 선물해준 마음이지 선물의 내용은 아닐 테니까.

 

건강과 관련된 서적인데, 이런 분야는 역시 생소하다. 일종의 심리치료로 볼 수도 있을 내용을 소개하고 있는데, 심리치료와는 다르다고 열심히 강변한다. 전체 분량에서 반 너머를 채우고 있는 게, 그런 군소리다. 심리치료는 아니라는 거, 의료행위도 아니라는 거, 효과가 있다는 걸 믿으라는 거, 그 실효가 증명되었다는 등등. 약장수가 약을 팔기 전에 울리는 온갖 변죽들. 그리고 간단한 스트레칭 비슷한 액션이 소개되어 있다. 역시 일반적인 스트레칭 하고는 다르다고 강변하면서.

 

책은 ‘심장’이라고 변역했는데, 의식과 무의식을 포함한 신진대사를 꾸려가는 신체기관으로써의 심장까지를 포함한다고 한다. 동양에서라면 ‘기(氣)치료’ 정도로 소개될 법한 걸 소개한다. 거기에 이름 붙이길 ‘힐링 코드’란다. 아무렴, 내 취향일 수는 없다.

 

장르가 내 취향이 아닌 건 둘째 치고, 서술하는 방식이 못마땅하다. 다른 것들과 다르다는 걸 너무 열심히 강조한다. 간단한 것이고 손해 볼 거 없으니까 믿고 해보라는 얘기겠는데, 엄청난 부담을 주면서 강조하고 있다.

 

실재로 병원을 오가면서 건강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있고, 또 스트레칭이나 명상이나 등에 조금씩 마음이 열리고 있을 무렵, 게다가 나를 염려하고 걱정해주는 친구에게서 선물로 받은 것이어서 호의적인 태도로, 간단하다니까 해볼까 싶은 마음이 들면서도, 장황하게 늘어놓는 군소리들이 쓴 입맛을 남긴다. 못마땅하다는 얘기.

 

그래도 다른 것들과 다르다고 강변하는 ‘힐링 코드’라는 이 짓, 해서 나쁠 건 없지 싶다. 못마땅한 건 저자들의 서술의 태도인 거지, 높아져 버린 건강에 대한 관심은 내가 뭔가를 해야 한다는 요구를 하고 있으니까.



 
 
 
거대한 뿌리 민음 오늘의 시인 총서 1
김수영 지음 / 민음사 / 199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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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의 시를 읽는 일은, 감상이기도 하겠지만 내게는 학습의 의미가 짙다. 날카로운 언어가 찔러댄 그 시절의 풍광은 이미 변화하였다. 그 시절엔 전위였겠으나, 지금에 이르러선 한 줄 역사가 되어버렸으니. 김수영은 읽는 일은 감상이기보단 학습이다. 언어가 찔러댄 그 시절의 풍광을 추체험하게 하는 학습. 다행인 건, 김수영은 시 뿐 아니라 시론도 남기고 있다는 거. ‘불온한 시’는 그렇게 쓰인 거고, 시절은 바뀌었으나 시가 지향하여 넘어서야 하는 현실은, 그 꼴만 바꾸었을 뿐 시는 계속해서 불온하다. 시의 반대말은 ‘국방부’인지도 모른다. 불온서적이라는 낙인이 시에게는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모르는.



 
 
 
분노의 포도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5
존 스타인벡 지음, 김승욱 옮김 / 민음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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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읽은 건데, 줄거리도 못되는 대략적인 흐름만 재생될 뿐 기억에 남아 있는 게 없다. 이럴 경우엔 파편화된 몇몇 장면을 다시 마주하게 되면서 재구성이라는 걸 하게 되는데, 그조차 되질 않았다. 그러면서도 삶의 고단함 같은 걸 강렬하게 느끼며 읽었었다는 희미한 잔상만큼은 떠오르고.

 

줄거리를 기억하지 못하는 만큼, 다시 읽는 효율(?)은 좋았다 하겠다. 그러나 고단하다는 느낌은 여전하다. 읽는 행위가 고단한 게 아니라, 소설 속에서 삶을 꾸려가고 있는 이들 가족의 이동이 그러하다. 소설의 끝부분에 이르러서는 이 고단함의 끝은 밝은 미래에 대한 암시가 아닐까 기대하기도 했다. 허망한 ‘캘리포니아 드림’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기대를 품게 된 건, <학마을 사람들> 때문이 아닌가 싶다. 비극으로 끝나더라도 희망의 싹 같은 걸 남겨놔야 할 거라는 이상한 기대.

 

임신 중에 이주하게 된 로저샨의 출산이 임박해 오면서 이 고단함도 끝이 날 때가 가까웠구나 싶었다. 그리고 이 생명은 기대하고 있는 희망의 싹 같은 걸 거라고 여기면서. 그런데 사산이다. 전에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엉뚱한 기대를 하고 있었던 거다. 게다가 사산 이후 옮겨간 곳에서 마주하게 된 굶주린 노파가 등장하기 전까지도, 이 소설의 결말을 기억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노파가 등장한 뒤에야, 아 루벤스의 그림과 연결되는 고리를 하나 찾아낼 수 있었고, 그제야 재구성이라는 게 가능해졌다.

 

생명을 잉태하는 것으로 밝은 미래를 암시해 놓진 않았지만, 그보다 대승적인 측면에서의 희망을 남겨놓고 있긴 하다. 비록 사산하였지만 젖은 부어오르고, 젖은 노파를 살려낸다. 핏줄로 이어지는 희망을 넘어선 공동체에 대한 소망 같은 걸 남겨놓는데, 이건 케이시를 통해서 설교(?)되었던 것이기도 하고.

 

어쩌면, 어쩌면 그게 바로 성령인지도 몰라. 바로 인간의 정신. 사람들이 아무리 시끄럽게 떠들어 대도 말이지. 어쩌면 모든 사람이 하나의 커다란 영혼을 갖고 있어서 모두가 그 영혼의 일부인지도 몰라.



 
 
 
우리 시대의 영웅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8
미하일 레르몬토프 지음, 오정미 옮김 / 민음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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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이라, 그다지 바라지도 않고 기대하지도 않고 되고 싶은 생각도 없는 그것. 19세기 러시아문학에도 등장하는 군상이구나. 숱한 영웅들이 등장하는 <삼국지>를 다시 읽고 있고, ‘일그러진 영웅’의 주인공인 편역자에 대한 기억의 잔상이 파편화되어 떠도는 요즘, 『우리 시대의 영웅』을 펼쳐든다. ‘영웅’은 반어일 수도 있으니까.

 

『우리 시대의 영웅』에서 ‘영웅’은 그다지 영웅다운 면모를 보여주지 않는다. 끼어들기도 하고 빠져나가기도 하는 밍밍함은 일면 비겁해 보이기도 해서 쉽게 감동을 허락하지 않는다. 영웅이란 도대체 어디 있는 건가, 유심히 들여다봐도 지질한 개인의 초상만 드러날 뿐이니.

 

영웅이 등장하지 않는 영웅서사를 밍밍한 기분으로 읽고 나서, 저자의 약력을 보니 ‘결투 과정에서 입은 상처로 인해 2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헐. 러시아문학 언저리에서 종종 발견되는 이런 장면들,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영웅’이라는 맥락에 견주어 봐야 하는 건 아닐까?

 

‘작품 해설’이 하나의 실마리를 남겨놓고 있다.

 

그러나 페초린이라면 진즉에 알았을지 모른다. 영웅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다는 걸. 결국엔 이러한 사람들의 이야기만이 남는다. 그렇다. 영웅담은 이런 식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실 우리의 이야기다. 그는 애초에 떠났고, 우린 그를 찾아 여기까지 왔다. 우리 시대의 영웅일지도, 아닐지도 모르는 자를.

 

하긴, 신(神)도 만들어지는 판에 영웅이라고 만들어지지 말라는 법은 없겠다. 러시아어에서 ‘영웅’은 ‘주인공’과 같은 뜻으로 쓰인다는데, 만들어진 서사의 주인공은 모두 영웅일 수밖에 없겠고, 모든 영웅은 주인공이 되어 서사에 등장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만들어져야 비루한 개인의 초상은 신화의 세계에 좀 더 다가설 수 있게 될 테니까. 신과 인간의 중간격인 영웅은, 이야기만 남아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결투라는 건, 이야기만 남기기 위한 영웅적 제스처?



 
 
 
삼국지 제1권 - 도원에 피는 의(義) 삼국지 (민음사)
나관중 원작, 이문열 평역 / 민음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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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를 또 읽는다. 읽은 횟수도 헤아리지 못하겠다. 고등학생 때만 두 차례 읽은 것 같다. 판본이 기억되지 않은 것과, 지금 읽고 있는 이문열 편역의 <삼국지>.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도 몇 차례 읽은 것 같다. 군복무 중에 한 번 읽었고, 제대한 뒤에 황석영 번역으로 읽었다. 그래도 아직 10번을 넘기지는 않았다. <삼국지>를 10번 넘게 읽은 자와는 말도 섞지 말라는데, 나와는 아직 말 섞어도 된다. 장정일 번역으로 읽어볼까 하고 있었는데 차일피일 미뤄지다가, 다시금 손에 쥔 건 이문열 편역이다. 딱히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어쩌다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