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좌파와 우파 살림지식총서 1
이주영 지음 / 살림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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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좌파와 우파’라고 써놓고는 목차를 보니 우파에 대한 얘기가 주를 이룬다. 서두에 좌파의 생성에 대한 내용이 잠깐 엿보이고, 이후부터는 ‘귀족좌파’라 불릴 만한 대상을 설정하고선, ‘신우파’와 ‘극우파’를 설명한다. 외부인의 객관적인 시선이라고 보면, 미국에도 꼴통은 있구나, 할 수 있겠는데, 서술하는 관점이 그다지 공정해 보이지 않는다. 대여섯 줄 되는 한 단란 안에 한번 정도 사용되고 있어 읽는 호흡을 방해하는 ‘왜냐하면’은, 도무지 이해가 닿지 않는다. 신우파나 극우파가 보여주는 꼴통 짓의 이유가 ‘왜냐하면’ 뒤에 따라오는데, 그게 다 ‘좌파’ 때문이라는 식이니까. 왜 그러냐?

 

‘왜냐하면’ 한국 땅에서 뉴라이트 따위를 해야겠거든, 뭐 그런 거 아니겠나. 저자의 저술 목록을 보니 이승만이 몇 군데 보이는데, 과연 그렇구나, 끄덕끄덕. ‘살림지식총서’ 첫 권인데 이런 걸로 시작을 한다니, 입맛 쓰네.



 
 
 
클래식 시대를 듣다
정윤수 지음 / 너머북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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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연히 음악을 들어볼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도 듣던 사람이나 들을 수 있는 것인지, 뭘 들어야 할지 모르겠어서 헤매고 있었다. 안 하던 짓을 하는 건 그만큼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그만 둘까 하다가, 무턱대고 듣기로 했다. 뭘 들어야 할지 알고 들으면 그만큼 재미가 떨어질 거 같아서. 시행착오로 인한 에너지 소모는 줄여야겠기에 내키지 않는 걸 꾸역꾸역 듣고 앉아 있는 짓은 하지 말아야겠다, 하고서.

 

내가 그런다. 뭔가를 계획하면 종잡을 수 없이 일이 커진다. 그냥 즐길 수 있으면 좋은데, 다 알아야겠다는 허황된 욕심이 크다. 남들 다 듣는 것도 들어 알아야겠고 내 취향도 차별화시켜야겠다는, 이상스러운 성품을 지니고 있다. 편집증이기도 하겠고 완벽주의 기질이라고도 하겠는데, 무척 피곤한 일이기도 하다. 가벼운 마음으로 신이 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러기 위해서는 내 의지를 접어 두고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될 터인데, 의지를 접어두면 들려오는 소리도 없고, 잘 듣지도 못하는 무신경이 되고 마니, 어쩌지.

 

이런 어정쩡한 태도가 몰취향을 낳게 되었는데, 딱히 취향이라는 게 없으니 그만큼 선택의 폭이 넓긴 하다. 선택의 폭이 넓다는 건 좋은 일인데, 이 거대한 소리들의 조합 속을 헤매다가 길을 잃기 딱 좋게 생겨먹었다. 도서관을 미로에 비유하던데, 소리의 세계도 못지않다.

 

이런 복잡한 생각들 접어놓고, 몇 개 찾아 들어보기도 했고, 나름 감상이라는 것도 해봤다. 좋기도 하고 따분하기도 하고 졸리기도 하고 신나기도 하고 등등. 이런 반응이 이끌려 나온다는 게, 음악을 듣는 재미가 아닐까, 막연히 생각해 보면서.

 

그러다가 <베토벤 바이러스>를 보기도 했고. 손에는 『클래식 시대를 듣다』를 쥐고 읽기도 하면서. 근데 이 책, 클래식이라고는 겉멋 아니고선 듣는 귀가 열리지 않는 나 같은 문외한에겐 꽤 좋다. 정윤수의 문장도 좋고. ‘클래식’에 방점을 찍어놓고 ‘시대’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음악가들의 흥미로운 스캔들 따위에 머물지 않고 ‘시대’라 불릴 만한 흐름을 차분하게 쫓아간다. 그 차분함이라는 게 조용한 것과 또 다른 게 ‘음악’이라는 소리에 대한 것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 음악이 자리하고 있는 ‘시대’라는 자리 또한 시끄러웠기 때문이리라.

 

클래식을 이야기하면서, 여타 문예 장르에 해당할 지식들을 곁들이고 있는데, 어쩌면 현학적으로 들릴 법도 하다. 다행인 건 내게는 클래식에 해당하는 분야가 가장 어려웠기에, 다른 문예 장르에 견주면서 풀어가는 이야기는 비교설명으로 읽히면서, 좀 알 듯도 한 그런 느낌.

 

개관은 이걸로 하고, 난 이제 얘들의 음악이라는 걸 좀 들어봐야겠다.



 
 
 
한국의 주체성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6
탁석산 지음 / 책세상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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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책 목록을 새로 작성하면서 어느새 또 방대해졌다고는 했으나, 문고판 같은 얇은 책들로 채워 넣었다. 읽는 행위는 계속되어야겠으나, 다른 밀린 일정들을 겸해서 소화시키려는 나름의 의도가 더해졌다. ‘시공디스커버리 총서’는 얇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백과사전처럼 보일 서술이어서 꼼꼼히 읽어야 할 필요가 있는 반면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시리즈는 비교적 무난하게 읽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더해졌다.

 

그 첫 권은 사실 『한국의 정체성』이어야 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집에 가져와보니 『한국의 주체성』이 놓여 있다. 서고에 신청해서 꺼내온 것인데 사서의 착오였을 수도 있겠고, 어쩌면 내가 이 둘이 따로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한 상황에서 잘못된 신청서를 작성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정체성과 주체성, 순서는 별 상관없지 싶어서 먼저 손에 쥐게 된 『한국의 주체성』을 읽는다.

 

한국은 어떤 주체성을 지녀야 할까? 『한국의 주체성』은 몇 가지 경우를 제시해 보이고, 저자의 주장을 피력한다. 저자가 언급한 건 아니지만 읽으면서 내내 ‘사다리 걷어차기’라는 강대국의 행태를 떠올렸다. 탁석산은 환경 문제 등을 놓고 사다리를 걷어차는 강대국에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지, 도덕적 당위를 명분으로 ‘사다리 밑’에 머물 것은 아니라고 한다. 거칠 게 옮긴 것이라 극단적으로 들리기도 하겠지만, 충분한 설득력을 갖추고 있다. 선행되어야 할 것이 무엇이냐는 것을 감안할 때, 담론이 형성되는 프레임에 종속될 필요는 없다는 거다. 강대국들이 환경을 오염시키면서 강대국으로 부상했다면 환경 문제를 거론하려거든 먼저 그들이 책임 있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그런 입장인데, 여기서 한국의 경우 어떤 주체성을 지녀야겠느냐는 반문으로 보인다.

 

핵무기의 경우도 그와 유사한 입장에서 한국은 현실적인 어려움이 따르겠지만 핵무기를 보유해야 한다는 주장도 보인다. 역시 정황이나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여지를 남기고 있지만, 적어도 강대국들이 핵을 보유하고 있으면서 약소국에게 비핵을 강요하는 건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거다. 비핵을 선택할 거라면 군사적으로, 혹은 그에 수반되는 여러 측면에서 강대국이기를 포기해야 하는 게 맞다는 거다. ‘비핵’이라는 담론 역시도 강대국들의 요구이고 그에 종속된 선택이라면 ‘한국의 주체성’이라는 건 없다고 봐도 좋다는. 그러니 한국도 핵무기를 보유하거나, 혹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강대국들에게 핵을 포기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는 그런.

 

탁석산의 몇몇 글쓰기 관련 서적을 읽은 적이 있는데, 거기서 강조하던 것이 ‘논리’였다. 『한국의 주체성』의 경우에도 그 논리라는 걸 갖추고 ‘한국’이라는 자화상을 들여다봐야 ‘한국의 주체성’이라는 게 형성된다는 식이다. 그렇지 않고선 ‘식민지 지식인’의 종속적인 이데올로기를 반복할 뿐이라는 식이다.



 
 
 
문자의 역사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1
조르주 장 지음, 이종인 옮김 / 시공사 / 199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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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컴퓨터 고장 나면서 잃어버린 독서리스트를 홀가분한 마음으로 보내기로 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독서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는데, 그 사이에 또 방대해지고 말았다. 인류문화유산을 곁눈질하려는 취지로 ‘시공디스커버리 총서’ 시리즈를 포함시켰다. 몇 권 읽은 것도 있긴 한데, 이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 될 듯. 시리즈의 첫 권 『문자의 역사』는 글이라는 걸 쓰겠다고 덤비고 있는 내게는 아득한 느낌으로 읽힌다. 시리즈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컬러화보를 들여다보는 재미 또한 쏠쏠하고.



 
 
 
예수와 묵자 - 문익환, 기세춘, 홍근수의 논쟁
문익환, 기세춘, 홍근수 지음 / 바이북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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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세춘의 『묵자』를 읽고 나서 『예수와 묵자』까지 읽는다. 기세춘의 묵자 해석을 놓고 벌이는 논쟁인데, 흥미로운 내용들이다. 묵자와 예수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놓고 전개되는 논쟁에서 뚜렷한 답을 찾을 수는 없다. 기세춘이 가설을 세웠다면, 그에 대해 동의하기도 하고, 반대하기도 하고,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기도 한다. 읽는 동안 2000년 전에 예수와 묵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흥미롭기도 하고.

 

기세춘이 예수와 묵자의 차이라고 내세운 게 많은 부분은 현실 기독교에서 왜곡되어 이해되는 예수로 인해 빚어진 것이라는 홍근수의 보충 또한 흥미롭다. 그리고 더 흥미로운 건 읽다가 우연하게 발견하게 된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최근 시사와 연결시켜 볼 여지가 있다.

 

홍근수 목사. “그런데 매우 놀랍게도 예수는 그의 제자들을 불러모을 때 젤롯 당원을 포함했습니다. 이름이 알려진 그의 열두 제자들 가운데 적어도 두 사람은 명백하게 젤롯 당원이었습니다. 시몬과 가룟 유다가 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젤롯은 “유대의 야훼 유일신 신앙에 근거하여 외세인 로마제국의 세력을 팔레스타인에서 무력으로 몰아내고 유대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쟁취하려는 목적을 내걸고 폭력적 테러와 게릴라전을 벌였던, 말하자면 ‘유대민족해방전선’이었습니다.”

 

요즘 자주 거론되고 있는 두 이름이 떠오른다. 가룟 유다의 결말인 ‘아겔다마’는 피밭을 뜻한다는데, 어쭙잖은 예지력이 들어맞는 일 없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