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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의 시대 - 공감 본능은 어떻게 작동하고 무엇을 위해 진화하는가
프란스 드 발 지음, 최재천.안재하 옮김 / 김영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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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감부재의 시대, 지금 필요한 건 <공감의 시대>


그 옛날 소크라테스는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 했다. 사회를 떠나서도 인간은 삶을 이어나갈 수 있겠지만, 그것이 곧 사람다운 삶의 길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나와 당신, 우리가 함께 만든 모종의 체계 속에서 우리는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람다운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우리를 동물과 다른 인간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인가? 이에 대한 질문은 곧 인간다운 인간으로 나아가기 위해 제일 먼저 던지는 화두로 다가온다.

 

 지난 몇 세기 간 인간은 아주 어리석은 판단을 두고 불변의 진리인 것처럼 여겨왔다. 오로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그 무언가를 찾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해왔다. 하지만 이는 동물보다 더 나은 점을 강조한 것이 아닌, 동물과 다르기 위해 더 못한 쪽을 택한 것만 같아 보인다.(오늘날 다시 바라봄에 있어서) 그것은 바로 경쟁을 사회 속에서 일종의 미덕으로, 반드시 필요한 존재로 바라본 것이다. 산업화, 자본주의의 유입을 통해서 인간은 무조건 타인보다 더 나은 위치에 있어야 하는 일종의 강박증에 빠지게 되었다. 그 속에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 아닌 이기적 동물이라고 스스로 정당화 하고 합리화했는데, 이는 타인을 이기는 것을 당연시하게 여기도록 만들었다. 물론 경쟁 사회에서 정당한 경쟁을 통해서 맨 우위에 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순리다. 하지만 우리는 오르는 과정에 있어서 떨어지는 자들에게, 발을 헛디딘 자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네는 방법조차 잊어버린 것이다! 타인을 위한 일방적인 희생은 터무니없는 것으로 다가오지만,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보면서 함께 아파하고 연민의 감정을 마땅히 느껴야 한다.

 

 만약에 이 책을 넘기지 않았더라면, 나는 또 다시 경쟁 사회의 산물로서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이기기에만 급급했을 것이다. 프란스 드 발의 <공감의 시대>는 미친 경쟁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공감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더욱이 이 책은 우리와 비슷하게 감정을 지니는 포유류, 유인원 등의 실제 사례를 통해서 인간에게 잊어버린 공감의 미덕을 가져다준다. 그리고 믿고 보는 이 시대 제일가는 동물학자 최재천의 역을 통해서 보다 쉽게 책을 만날 수 있다.

 

 <공감의 시대>가 외치는 것은 단순명료하다. 우리 사회에서, 생존에 있어서 더 이상 경쟁이란 방식을 통하여 삶을 나아가는 것은 불가능 하다는 경쟁사회의 종말을 외친다. 책은 오로지 나, 나의 이성, 나의 감정만을 외치는 탐욕의 시대가 저물고 공감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린다. 공감은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것도 아니고, 인간만이 지닌 특수한 것도 아니다. 쥐들도, 침팬지들도, 원숭이들도 공감의 상황에서 마땅하게 공감을 느낀다. 공감은 인간을 비롯한 동물들에서 점차 진화되어 온 공동체의 산물이라 볼 수 있다. 이에 저자는 공감을 거의 모든 인간에게서 발달된 확고한 특성이라 본다. 그렇기에 우리 사회가 공감에 의존하고, 공감을 포용해서 키워나갈 수 있음을 확신한다. 공감이란 인류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공감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금 느낄 수 있었지만, 돌고 돌아 이제야 공감의 중요성을 느끼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개인적인 견해로 서양적 사고와 동양적 사고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라 본다. 저자는 지난날 칸트 철학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그간 칸트철학으로 인해 인간의 감성보다 이성에 치우쳐진 사고가 계속되어왔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인간의 도덕성을 칸트 이전의 철학, 즉 감성에 기반을 두면서 진화론, 현대 신경과학과 함께 살펴본다. 이는 인간의 도덕성의, 이른바 사회적 본능이 동물의 사회성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인간과 동물의 사이는 잠시 접어두고, 칸트 이전의 철학으로 돌아가려는 저자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먼 길을 돌아가는 듯 한 느낌을 받았다. 우리네 철학, 동양적 사고에 기반해서 감정을 살펴보면 감정을 우리와 동 떨어진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동양에서 강조하는 사단(四端), 인의예지의 기본이 되는 네 가지 마음의 실마리를 통해서 우리는 자연스레 공감을 마주한다. 특히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생각하지 않아도, 경험하지 않아도 절로 공감을 가져다주는 마음의 기본 되는 단서이다. 그렇기에 내게 있어 공감은 저자가 말하는 것 보다는 덜 낯설게 느껴졌다. 이는 경중의 문제가 아니고 사고하는 방식의 차이라 생각한다. 그간 동양의 철학이 이성보다는 감정과 우주, 내면을 다스려 왔기에 우리는 자연스레 공감이란 개념에 노출되어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에는 서양적 사고들이 이미 곳곳에 침투해 있다. 그렇기에 겉보기에는 동양인일지라도 우리는 너무나도 체계적이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인간일지도 모른다. 더 이상 이성만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러 실험과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을 접하면서 우리는 깨달았다. 탐욕과 경쟁만이 존재하는 세상은 인간을 인간만도 못한, 동물만도 못한 인간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렇기에 공감 본능이 어떻게 작동하고, 우리는 작동된 공감의 미덕을 어떻게 사용해야하는지 파악하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과제로 다가온다. <공감의 시대>를 통해서 지금 이 시대 공감의 필요와 방향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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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대문 2 : 노장과 병법 편 - 잃어버린 참나를 찾는 동양철학의 본모습 고전의 대궐 짓기 프로젝트 2
박재희 지음 / 김영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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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밖으로 나온 고전, '고전의 대문2'

문은 열고 닫음을 통해서 공간과 공간을 구분 짓는다. 이때 문을 열고 닫는 행위는 행위자에게 새로운 세계로의 입장 의미한다. 문을 열고 발을 내딛음으로서 낯선 곳으로의 걸음이 시작된다. 앞서 말한 문은 도구로서의 문이다. 하지만 노자를 만난다면, 문은 도구 그 이상의 개념으로 다가온다. 일찍이 노자께서는 不出戶 知天下!’이라 했다. 문 밖을 나서지 않고도 천하를 알 수 있다는 말인데, 이때 문은 열고 닫는 문 그 이상으로 나와 세계를 연결 짓는 하나의 통로로 해석가능하다. 그렇다. 노자는 사물의 본질을 꿰뚫고 세상의 흐름을 파악하는 굉장히 직관적인 성인이다. 세상의 변화를 지긋이 바라본 성인의 눈으로 본 세상을 이야기하는 책은 곧 도덕경이다. 무위를 꿈꾸고 무위를 실천한 참 된 자연인, 노자가 열고 장자를 지나 손자가 닫는 고전의 대문으로 빠져보는 것은 어떨까.

 

앞서 노자의 언급이 많았던 탓일까. ‘고전의 대문2’노장과 병법편이다. 노장 부분에 비해 손자는 비교적 뒷부분에 와서야 처음 언급된다. 지금 이 시대에 고전을 다시 이야기하는 박재희 선생의 고전의 대문이 어느덧 두 번째 시리즈로 찾아왔다. 제 아무리 시리즈물이 전작에 비해 흥행하기 어렵다지만, ‘고전의 대문은 사뭇 다르다. 전 편에서 사서를 논했다면, 이번 편에서는 노장과 손자가 바라본 세상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고전의 대문2’라는 책 제목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고전의 세계로 빠질 수 있다. 전 편에 연연해하지 않고도 언제나 고전의 세계로 빠질 수 있는 고전의 대문이다.(1,2편에 대해서 무엇부터 읽어야 할지 망설인다면, 마음이 가는 고전부터 집어보는 건 어떨까.)

 

고전의 대문2’에서는 노자의 도덕경’, 장자의 장자’, 손자의 손자병법가 등장한다. 크게 보자면 노장과 손자가 두 축을 이루고 있다. 내게 있어 노장과 손자는 서로 다른 곳에 시선을 두고 있는 사람으로 느껴졌다. 언제나 자연을 노래하는 노장과, 각종 술책을 설파하는 손자의 모습에서 어떠한 공통점을 느끼기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허나 책을 펼쳐들고 나서 이는 내 기우이자, 고정된 관념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물론 이들은 서로 다른 방법으로 세상을 말한다. 하지만 노장과 손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무엇이 들리는가 하면 이들도 어쨌거나 사람에 대해 말한다는 사실이 들린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삶에 대해 노래하는 이들 사이에서 공통점을 찾으려면 고전의 대문2’를 펼쳐 노장과 손자를 만나야 한다. 사실 이 말은 책을 펼쳐서 차근차근 넘겨가라는 의미다. 여하튼 작가가 말하는 노자와 손자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보면, 궁극적으로 이들이 외치는 것은 제각기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우칠 수 있을 것이다.

 

가뜩이나 어렵게 느껴지는 동양고전이다. 허나 고전의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고전하며 읽던 고전이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저자는 노장과 손자의 고전을 다양한 예시와 현대어 해석을 통해서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게끔 해준다. 예를 들면 노자의 상선약수에 대한 설명이다. 노자하면 무위상선약수니 하는 이른바 자연의 대명사라는 이미지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실로 노자는 자연에 대한 애정을 노래한 성인이다. 하지만 그가 외친 자연은 속세와 떨어진 깊은 산 속의 이야기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 누구보다 실용적이고 솔직한 인간의 세상을 노래한다. 그 유명한 상선약수는 단순히 자연을 예찬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다. 노자는 상선약수의 리더십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물의 속성 일곱가지를 논하면서 리더가 갖춰야 할 기본 덕목을 말했다. 물처럼 고요하지만 강한 힘, 남에게 과시하지 않는 힘, 누구를 원망하지 않는 포용력 등 물과 같은 리더의 모습을 외친 노자의 모습을 쉽게 풀어서 설명하는 고전의 대문2’. 익히 들었던 장자의 <소요유>편 또한 소요유 편의 우화를 설명하면서 우리네 일상에서 만나는 소요유의 참 된 모습을 이야기 한다.

 

이처럼 우리네 귀에 익숙한 노장의 사상을 보다 자세히 풀어주는 고전의 대문이다. 이 뿐만 아니라 고전의 대문에서는 우리가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는 부분 또한 고전의 대목을 읽으면서 바로잡아준다. 흔히들 많은 이들이 지피지기면 백전백승라 알고 있다. 하지만 이는 원문에 있지 않은 잘못된 전달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 백번 이기는 것이 아닌, 백번싸워 위태롭지 않다는 백전불태가 옳은 전달이다. 저자는 우리가 흔히 아는 문장의 오류를 말하면서 그 속에 담긴 손자가 생각하는 장군이 갖춰야 할 다섯 가지 덕목을 설명한다.

 

당장에라도 옆에서 고전의 한 대목을 읽어주면서 그 속에 담긴 참 뜻을 설명해줄 것만 같은 고전의 대문2’. 사실 고전은 이를 전공하는 사람이 아니면 혼자서 원문읽기에 도전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고전의 대문은 고전을 이미 접해본 사람이건, 처음 접해보는 사람이건 누구에게나 활짝 열린 대문으로 다가온다. 다가오는 가을, 높은 하늘처럼 드 높은 뜻을 펼친 노장과 손자의 뜻을 만나보고 싶다면 고전의 대문을 펼쳐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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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반역실록 - 12개의 반역 사건으로 읽는 새로운 조선사
박영규 지음 / 김영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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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者道之動’,반역으로 조선사를 읽다  

조선반역실록 박영규 지음

 

 

 잠시 노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보자. 누구보다 일찍이 도의 순리를 터득한 노자는 도의 성질을 보고 反者道之動이라 했다. 무릇 극에 달한 것은 반드시 반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라는 뜻을 의미한다. 정상에서 반대를 향해 간다니. 어불성설 그 자체로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세상을 이루는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면 노자의 이치를 파악할 수 있다. 달이 차면 기울 듯이 언제나 정답, 언제나 완전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영원이란 단어만이 그 공허함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극에 달하고 다시 비움으로 향하고, 그 사이에서 새로운 것이 생성되는 만물이 겪는 일련의 과정들은 흘러온 시간들을 추적해가는 과정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역사의 흐름은 곧 정에서 반으로, 반에서 정으로 나아가는 과정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앞서 역사의 흐름에서 반의 움직임이 곧 도의 순리라 했다. 흔히 반이라 하는 것은 대개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된다. 이를테면 반역자, 반란 등등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것들이 그렇다. 그래서일까 반대를 지향하는 것에는 대개 실패한이라는 암울한 타이틀이 붙는다. 하지만 역사의 이면까지 들여다보면 반을 외치는 것이 곧 부정이자 파멸을 뜻하지는 않는다. 모두가 정을 외치는 세상에서 홀로 꿋꿋하게 반을 외쳤던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면 이제껏 몰랐던 역사의 이면이 보인다. ‘조선반역실록을 통해서 그동안 승자에 의해 쓰여진 역사로부터 잊혀진 반을 외친 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왕의 일생을 이야기한다. 이와 맥을 같이하여 조선반역실록에서는 조선의 반역자들을 말한다. 조선의 탄생부터 거슬러 올라가 조선사에 있던 반역의 순간들을 생생하게 서술하는 조선반역실록이다. 책을 읽으면서 백번 공감했던 것은 역사는 언제나 승리자에 의해서 서술된다는 것, 모든 것에는 양면성이 있다는 점이었다. 태조 이성계만 보아도 그렇다. 조선의 역사에서 그를 보면 위대한 조선왕조 500년의 시작을 알린 위대한 임금이다. 하지만 고려의 역사에서 보면 반역을 도모하여 유구한 고려왕조의 몰락을 가져온 인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의 흥망성쇠 또한 정과 반의 연속이다. 왕으로서 이성계의 마지막은 허탈 그 자체다. 어떻게 얻은 권력이고, 어떻게 만든 조선인데, 그의 마지막은 그 누구도 아닌 그의 아들에 의해 왕권을 빼앗긴다. 그가 밟아왔던 지난날을 그대로 재현하기라도 하듯이 그의 아들 이방원은 왕자의 난을 일으키면서 권력으로 한걸음 더 다가온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이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흔히 아는 왕들의 이야기만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닌, 모든 왕들의 공과사가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에 조선반역실록 또한 우리가 흔히 아는 반역자의 이야기만 담긴 것이 아니다. 책 속에는 누구나 아는 이성계, 이방원을 넘어 역사에 의해 반역자가 되어버린 자들, 반역을 꿈꿨던 이들이 고스라이 담겨져 있다. 정여립, 허균, 이괄 등 다소 낯선 이들의 일화도 기술되어 있다. 이를 통해서 독자는 지금껏 당연하게 여긴 역사의 흐름을 벗어나 역사적 사건에 대한 행간과 행간 사이를 읽으며 숨겨진 시대의 진실을 바라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반역(叛逆)을 그 누구보다 유용하게 다룬다. 거슬러 올라가보자는 것이다. 과연 기록된 역사가 진실인 것인지, 그 속에 숨은 이면이 있는 것은 아닌지 따져가며 반역이라는 이름으로 덮어버린 열 두 개의 사건 속 숨겨진 조선사의 진실을 세세하게 찾아 나서는 조선반역실록이다.


 책을 읽고 나서 문득 ()을 외치는 것이 과연 나쁜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헤겔을 떠올렸고, 신영복 선생을 떠올렸다. 헤겔은 역사는 정반합의 연속이라 했고, 신영복 선생은 변방에서부터 새로운 것들이 비롯된다 하였다. 역사 앞에서 모든 것이 정답일수는 없고, 모든 것이 순리에 맞을 수는 없다. 하지만 획일화를 강요하는 사회에서 바라보는 역사는 언제나 승리자의 시각에 불과하다. 하나 대신 둘을 외치면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고, 하나의 생각과 바라봄만을 강조하는 오늘날이다. 사고방식은 다르지만 모두 스스로를 위해서, 조선을 위해서 제 목소리를 다 했던 모든 이들의 수고로움이 절로 느껴지는 조선반역실록이다. 반대만을 위한 반대가 아닌, 나아감을 위한 반대를 외친 이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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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엔카의 위빳사나 명상 - 자유에 이르는 삶의 기술 고엔카의 위빳사나 명상 1
S. N. Goenka 지음, 윌리엄 하트 엮음, 담마코리아 옮김 / 김영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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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으로부터 달아나기, ‘와 마주하기 

고엔카의 위빳사나 명상 -자유에 이르는 삶의 기술- 윌리엄 하트 지음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어떤 마음가짐을 지니고 삶에 임하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은 긍정적으로 흐르기도, 부정적으로 흐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때 마음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혹시 마음이란 단어를 듣고서야 당신의 마음을 떠올려보지는 않았는가? 무의식 속에 갇혀 있는 마음을 잠시 꺼내어보자. 무의식의 세계를 떨쳐내고 의식의 세계로, 마음을 알아차리는 세계로 나아가보는 것은 어떨까. 우리의 마음은 순간순간 떠오르는 무의식의 산물이 아니라, 매 순간 의식하고 일깨워나가는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을 고엔카는 위빳사나 명상법을 통해서 일러준다.

 

마음으로 향하는 길, 위빳사나 명상법

 책의 제목에는 처음 접하는 단어와 평소에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 ‘위빳사나명상이란 단어가 담겨져 있다. 그렇기에 이전에 명상을 행해오지 않았던 이들에게 이 책은 생소하고 낯섦 그 자체로 다가온다. 하지만 그런 낯선 경계를 넘어서고 위빳사나의 세계로 발을 내딛는다면, 이제껏 보지 못한 이 세계(=)의 진면목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세계를 나라고 표현했다. 명상은 외부의 세계에서 벗어나 나란 내면의 세계로 들어가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세계를 곧 나라고 언급해보았다. 먼저 위빳사나라는 단어를 보자. 위빳사나는 빨리어로 특별한 보기를 의미한다. 이는 곧 자신 안의 실제를 관찰함을 의미하는데 빳사나라는 단어 자체가 곧 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 말은 우리가 눈을 뜨고 보는 일반적인 세계를 넘어 내면을 바라보는 일을 지칭하는 것이다. 위빳사나는 주로 깨닮의 섬광 혹은 갑자기 일어나는 진리의 직감으로 대체되기도 한다. 그러니 이 명상은 내면으로 들어가서 진정한 를 바라보는 작업인 셈이다.

 

 이때 우리에게 주의가 요해지는 것이 있다. 이 명상법 역시 하나의 방법론이다. 그러니 맹목적인 멍때리기나, 가만히 오래 앉아 있다고 해서 명상으로 나아갈 수 없다. 이에 고엔카는 위빳사나 명상을 터득하기 위해서는 최소 10일의 시간이 요구되며,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온전히 자신에게로 들어갈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숙련된 명상가로부터 위빳사나의 가르침을 받아야 진정한 명상을 할 수 있다고 이른다. 고엔카의 이러한 뜻은 전 세계 곳곳에 퍼져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위빳사나 명상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있다. 전남 진안에 위치한 담마 코리아에서 우리는 위빳사나 명상을 배울 수 있다. 실제로도 이 책을 번역한 곳은 담마 코리아로서 위빳사나 명상법의 세계를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게끔 널리 큰 뜻을 펼치고 있는 비영리단체이다.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위빳사나 명상이란 책으로 읽고 터득하는 데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책은 어찌 보면 위빳사나 명상에 입문하는 자들에게, 이를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 일종의 지침서로 다가온다.

 

로부터 벗어나기, ‘고통과 마주하기

 위빳사나 명상 10일 코스를 몸소 체험해보지는 않았지만, 책을 통해서 접한 위빳사나 명상은 굉장히 흥미로웠다. 요란한 외부로부터 벗어나 내면으로 치밀하게 파고드는 작업을 하지만 불변하는 자아는 결코 찾지 않는다. 애초에 라는 존재가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위빳사나다. 우리는 라는 존재가 있다고 믿음과 동시에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허나 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매 순간 순간 변화하는 것이라 생각하면 우리는 고통으로부터 천천히 멀어질 수 있다. 우리는 신체와 심경의 변화를 느낀다. 그러면서 이는 굉장히 자연스러운 것이라 여기지만 정작 자기 자신 안에는 고정된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한다. 위빳사나 명상은 이러한 고정된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얽매이게 하는 것으로부터 탈출할 것을 강조한다. 이는 스스로가 알아차리고 인정해가는 과정인 담마(Dhamma)를 통해서 성취할 수 있다.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고통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면 그 속에서 비로소 자아를 볼 수 있다. 변하지 않는 내가 있다 생각하고 내면으로 들어가려 한다면 삶의 고통은 언제나 우리 곁에 머무를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호흡을 들이마시고 내뱉으면서 호흡 알아차리기를 시작으로 마음을 알아차리는 길로 나아가는 위빳사나 명상을 통해서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

 

 책의 또 다른 제목은 'The Art of Living', ‘삶의 기술이다. 위빳사나 명상은 우리의 삶을 보다 이롭게 해주는 분명한 기술임에 틀림없다. 명상을 통해서 객관적으로 나를 마주할 수 있고, 변화하는 삶의 흐름을 자연스레 바라볼 수 있다. 최소 10일간의 명상 코스를 통해서 담마를 실천해간다면 우리는 외부로부터 얻는 삶의 지혜 그 이상의 강력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위빳사나 명상은 단순히 무언가를 얻는 기술(技術)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를 몸소 체득한다면, 지혜로운 삶을 계속해서 기술(記述)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터득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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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과 사랑의 대화
김형석 지음 / 김영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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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영원과 사랑의 대화'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 이를 표현하기엔 불변이란 단어밖에 없겠지만, 우리네 마음과 정신 속에 변하지 않는 것들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러한 불변을 담고 있는 것은 때로는 책으로, 영화로, 미술 작품으로 남겨져 고전이란 이름으로 불린다. 그렇기에 고전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 언제라도, 그 누구에게라도 변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가치를 전한다. 그래서인지 고전은 언제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게끔 하는 이정표 역할을 하는 것만 같다.

 

 이 시대가 지나고 나서 어떠한 책들이 고전으로 남을 것인가를 떠올린다면 쉽사리 생각나지 않는다. 허나 이런 시간이 지나도 두고두고 읽을 만 하겠다.’ 라는 생각이 드는 책들은 무수히 많다. 이번에 내가 집어든 책도 마찬가지다. 나와는 동 시대를 살고 있지만, 전혀 다른 세월과 전혀 가늠할 수 없는 인생의 경험을 한 김형석 철학가가 쓴 <영원과 사랑의 대화>. 이 책은 1960년 대에 한 번 출간 된 적이 있다. 그리고 자그마치 6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또 다시 세상에 등장했다. 플라톤, 칸트, 서머싯 몸의 철학과 소설을 읽고 있자면 이는 당연히 고전이니까 하며 세월의 틈을 가능한 무시하고 읽으려 하는데, 어째서인지 1960년 대의 책에서는 알 수 없는 괴리감이 들었다. 어쩌면 이는 앞서 이야기 한 이들보다 더 가까운 시기에 이 책을 마주할 수 있어서 드는 생각일 수도 있다. 허나 책장을 하나씩 넘기면서 책을 읽기 전 들었던 생각은 기우에 불과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당시의 그와, 지금을 살고 있는 내가 별반 다를 바 없는 청춘임을 느낄 수 있었으니.

 

 한 세대를 30년 주기라 하는데, 나와 저자는 3세대나 차이가 난다. 전자기기는 3세대 정도 차이가 나면 기술적인 면에서 엄청 진보되어 이전의 것을 사용하는데 불편함을 겪는다. 하지만 사람의 삶은 여러 세대가 차이난다 해도 육체적인 면에서 힘듦을 느낄 뿐, 정신적인 면에서는 차이를 느끼기 힘든 것 같다. 오히려 먼 세대를 지나 조우함으로서 더욱 성숙한 정신과, 깊이 있는 연륜이 담긴 영혼을 만날 수 있다. 백수를 목전에 둔 철학자의 이야기와 그가 지내왔던 젊은 순간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는 <영원과 사랑의 대화>. 한 편의 글에는 그의 인생과 살아온 것에 대한 단상이 있다. 나는 그의 글을 읽으면서 변함 속에 있는 변하지 않는 것을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이야기하는 성공, 사랑, 우정 등을 따라가다 보면 행복이란 종착역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고, 퇴색되지 않는 것을 찾아 떠나는 그의 발걸음을 보니 범아일여 사상이 떠오른다. 내 안의 변하지 않는 것과, 외부의 변하지 않는 것은 모두 하나임을 말하는 사상은 곧 그가 걸어온 삶의 길과 얼추 맞아떨어진다.

 

 <영원과 사랑의 대화>에서 제일 인상 깊었던 것은 가장 첫 번째 에피소드인 문제의식 없는 지성인이었다. 이제 막 책을 겨우 읽기 시작했을 뿐인데, 나는 무언가 한 대 맞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내가 요즘 들어 생각하고 있던 무의식과, 무기력이 문제의식의 부재에서 비롯했음을 그제야 깨닫게 된 것이다. 나 또한 대학에서 철학을 배운다고 하지만, 의식 없는 목적과, 수단뿐인 배움이란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배우고 만나는 철학에 대해서 한번이라도 진지하고 고민하고 또 고민했는지, 혹은 세상을 바라보면서 진지하게 물음을 던져 본 적은 있는지 생각을 해봤다. 그리고 문제의식 없이 살았던 지난날을 반성하면서 보다 진지하게 나의 배움과 삶을 바라보려고 마음가짐을 다잡게 되었다.

 

 좋은 글이 되기 위해서는 탁월한 주제선정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필요한 것은 읽는 이로 하여금 생각을 다시하게 만드는 글이라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영원과 사랑의 대화>는 읽으면 읽을수록 스스로를 반성하게 되고, 그의 지혜를 빌리게 된다. 백 년을 살아온 철학자에게로부터 받는 삶의 지혜야 말로 오늘날 젊은이들이 찾고자하는 인생의 의미이며, 반드시 찾아야 하는 목적 그자체로 다가온다. 시대가 지나면 지날수록 전하고자하는 바가 점점 더 뚜렷해지는 책, <영원과 사랑의 대화>. 지금 삶의 길 앞에서 방황하고 있다면, 청춘이 청춘인지도 모른 채 그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자라면 이번 여름 시간을 내어 이 책을 꺼내어 보길 바란다

그러나 빛을 보기 위해서는 어두움에 머물러야 하며, 선을 깨닫기 위해서는 악을 알아야 하는 것 같이,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불행과 고통의 오솔길을 방황해야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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