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 장면이나 음식이 등장하는 소설은 의외로 많습니다. 먹는다는 것이 우리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행위이기 때문일까요? 소설에 등장하는 어떤 음식들은 나중에 소설 제목은 잊을지라도 그 음식에 관해서는 아주 또렷이 기억나게 하죠. 간혹 직접 요리하거나 찾아서 먹어본 적도 있을 듯합니다. 독서의 상상력이 현실과 만나서 묘한 쾌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그런데, 소설에서 아주 군침 도는 음식을 발견하는 때는 꼭 심야라는 것... 용감한 독자들은 새벽 2시에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기도 합니다만).


 

문학작품 속에 등장하는 음식을 모아 책에 얽힌 이야기와 요리법을 소개하는 책을 준비했습니다. 이 책을 쓴 저자는 뉴욕의 젊은 여성입니다.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그녀의 직업은 푸주한 이자 요리사, 그리고 제빵사이며 벨기에 맥주 브루마스터이면서 이제는 작가입니다.

 

푸주한 집안에서 성장해 뉴욕에서 대학에 다니며 카페 레스토랑 알바를 시작한 것이 결국 그녀의 직업이 되었죠. 문학소녀답게 동료들과 '문학 속의 저녁 식사'라는 모임을 결성해 문학 작품에 등장하는 음식을 직접 요리하고 함께 나누며 고달픈 뉴욕 생활을 버텨냅니다.

 

이 경험으로 그녀는 '냠냠북스'(http://yummy-books.com)라는 블로그를 개설하고 일약 뉴욕의 유명 블로거가 되었습니다. 그녀의 페이스북에서 엄청 큰 고깃 덩어리를 어깨에 짊어지거나 핏자국으로 얼룩진 앞 치마를 두르고 머리를 질끈 묶는 그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https://www.facebook.com/cara.nicoletti.1)



이 책에는 50여 편의 작품과 음식이 실려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보통의 미국 젊은 여성이 어떤 책을 주로 읽었는지 살펴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 청소년기, 성년기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자신이 성장하면서 읽었던 책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작품들이 상당수 있습니다만 다소 낯 선 작품들 역시 재미있게 소개해서 새로운 책을 발견하는 즐거움도 한몫합니다. 코맥 매카시의 소설 [로드]의 암울한 설정을 언급하면서 '희망이 있는 [로드]'라고 평하는 소설 피터 헬러의 [도그 스타]를 소개합니다. 국내에 번역되지 않은 책이지만 그녀의 소개만으로도 기대가 되는 소설입니다.


 

이 책의 또 다른 흥미라면, 책에 관한 책에서 다루는 전문적인 서평의 지적 탐구와는 다르게 그녀의 일상에서 문학작품들의 의미를 발견해내는 데 있습니다. 한 예로 일하던 레스토랑에서 해고되고 다른 일자리도 찾을 수도 없게 되었을 때 집으로 돌아가는 밤거리에서 우연히 발견하는 빵 공장의 풍경에서 그녀가 어린 시절 읽었던 <깊은 밤 부엌에서>라는 책과 주인공을 떠올리면서 상처 입은 마음을 스스로 어루만집니다. 문학이나 독서가 현실적인 힘을 얻게 되는 순간들을 발견하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독서와 먹는 것이 위로가 아니라면 대관절 무엇일까요?).

물론 이 책에 등장하는 50여 가지 요리의 레시피를 빼놓을 수 없겠지만.



부엌에 있으면 좋은 책이 주는 것과 같은 평화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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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누구든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문장이죠. 릴케와 로댕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 문장이 생각났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가 물론 싱클레어와 데미안의 관계와 유사하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강요로 여자아이의 옷을 입고 시를 읽어야 했던 가녀린 릴케, 늘 또래의 아이들에게 표적이 되곤 했습니다.

 

벨에포크라 불리는 유럽의 황금기이자 격렬한 변화의 세기말에 사춘기를 보낸 릴케는 시인으로서 자신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루 살로메, 유년의 왜곡된 모성에 대한 보상이었는지도 모를 루 살로메와의 만남, 그리고 위대한 예술혼을 찾아 도스토옙스키와 마주합니다.

 

자신이 예술가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오귀스트 로댕, 자신의 작업은 글자 그대로 일이었고, 그 일에만 파묻혔던 로댕, 머리보다는 손으로 꿈꾸었던 그는 대범하면서 호색적인 매우 남성적인 사내였습니다. 주류 미술계에 속하지 않았던 로댕, 학교와 '예술'이 그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석공의 손놀림과 자신만의 시각이 그를 위대한 조각가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진짜들 사이에서 진짜처럼 느끼고 진짜로서 존재하기를갈망했던 릴케가 로댕을 만납니다. 여전히 자신만의 세계를 찾아 헤맸던 릴케는 로댕에게 예술뿐만이 아니라 삶의 비의 같은 것들을 자연스레 전달받습니다. 그리고 끝내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명성은 새로운 이름에 들러붙는 모든 오해들의 총합에 지나지 않는다.”

 

여러 면에서 정반대의 기질을 갖고 있었던 두 사람, 그러나 예술은 예술을 알아보는 법이겠죠. 높은 산은 자신만큼 높은 산을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서로의 일과 삶은 단순히 스승과 제자, 예술가와 조력자의 관계에 머물지 않고 각자의 예술을 일구는데 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로댕 또한 이 낯선 릴케에게 섬세한 영감을 받기도 합니다. 물론 이 둘의 관계가 늘 좋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결별을 하게 되죠.

 

릴케는 자신의 시 [고대 아폴로의 토르소]를 적어나가면서 비로소 한 세계를 허물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갑니다. 릴케가 로댕으로부터 받았던 '생의 에너지'는 곧 [젊은 예술가에게 보내는 편지]로 남아 삶의 의미를 찾는 청춘들에게 답하고 있습니다.

 

조금 길지만 릴케의 시 전문과 책[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의 한 구절을 그대로 옮기겠습니다. 그 누군가의 삶이라도 삶은 끊임없는 변화의 열정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진정으로 삶다운 것이라 하겠죠. 릴케와 로댕의 두 예술가가 전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였습니다.


 

-고대 아폴론의 토르소-


무르익는 과실 같은 눈이 머무르던

아폴로의 전설적인 머리를 우리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의 토르소는

지금도, 마치 등불처럼, 내면에서 피어 나오는 빛으로 가득하다,

거기서는 그의 시선이, 이제 낮춰졌으나,

환히 빛나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융기한 가슴이 너를 황홀하게 하지 못하리라, 그리고

미소가 평온한 둔부와 허벅지를 지나

생명의 불길이 타오르던 그 검은 중앙부를

향하지도 못하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이 돌은 투명하게 쏟아져내린 어깨 아래서

볼품없게 보일 것이고

들짐승의 털 가죽처럼 반짝이 지도 않을 것이며,

그 모든 가장자리에서

마치 별처럼 피어나지도 않으리라, 여기서 너를 보지 않는

부분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너는 네 삶을 바꿔야 한다.


"석상은 볼 수 있는 눈도, 말할 수 있는 입도, 생식할 수 있는 성기도 갖고 있지 않다. 말테가 자신의 죽음을 지니고 있었듯, 그것은 내면에 자신의 탄생을 지니고 있다. 아폴로와 릴케가 그들 사이의 경계선을 무너뜨리면서 서로를 탐색할 때, 릴케는 그 경험을 시로 세상에 전하기 시작한다....하지만 이제 릴케에게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는 새로운 눈을 원했다.

 

단순히 신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자가 되고 싶었다. 아폴로가 그에게 말을 걸어온 순간, 릴케는 대상과 관찰자의, 작가와 독자의 공감적 결합을 완성한다. 이 새로운 존재는 이제 소통할 수 있었다. 이제 완전체였다. 릴케는 예술을 인정했고 그 신에게 생명을 주었다. 그리고 그는 달라졌다."(책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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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함.

우아함이 삶에 필수적인 것일까요?

어쩌면 일상 기술 차원이 아니라, 생존의 기술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세련된 행동이나 잘 다듬어진 장식만으로 우아하다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일상에서 어느 정도 우아함을 염두에 두고 사는 걸까요? 글쎄요...

우아함의 반대말을 천박함이라 할 수 있다면

지난 해 말에 우리는 천박함의 극치를 경험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아하지 않은 시대.

 

이제 바야흐로 품격과 품위의 시대로 들어서야 합니다.

최근에 나온 책이나 드라마가 보여주는 것도 이런 목마름 아닐지요.


"우아함이란 외모나 세련미와는 아무 상관없으며전적으로 연민과 용기의 문제다."

 

 

우아함에 관하여 알아봅니다.




우아함을 이렇게 정의해보고 싶습니다.

 

"우아함을 왕실 결혼식이나 국빈만찬이나 오페라 극장 같은, 지위 높은 사람들의 삶과 연결 짓는 경향이 있다. 가령,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의 세련된 단정함에서 우아함을 보는데, 그녀는 사회적 지위 때문에 잘 다듬어진 인상을 주어야 했다. 그런 종류의 우아함에는 진주 표면처럼 차갑고 광을 낸 것 같은 특성이 있다. 그런 장식적인 우아함은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에게 그다지 유익한 것을 보여주지 못한다. 우아함이란 외모나 세련미와는 아무 상관없으며, 전적으로 연민과 용기의 문제다."

 

<우아함의 기술>은


탁월한 기량에 신체적 우아함까지 갖춘 몇몇 운동선수들, 대중의 이목을 끌지 않고도 자신의 미덕을 자연스럽게 발산하는 보기 드문 셀러브리티들, 전쟁터와 같은 주방에서 조화롭게 움직이는 요리사들, 소박한 우아함을 갖춘 평범한 사람들, 유연한 우아함을 갖춘 정치인들, 그리고 유명 배우나 클럽의 스트리퍼들이 보여준 예기치 못한 우아함까지,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소소한 일상에 내재되어 있는 우아함의 순간들을 포착해내면서 우아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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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프랑스의 르노도상 수상작입니다. [대학살의 신], [아트] 등 세계적인 연극의 원작자인 야스미나 레자의 신작 소설입니다. 아내를 우발적으로 살해한 남편을 등장하는 범죄소설의 틀을 유지하지만 장르의 법칙은 전혀 관심사가 아니죠. 살인자를 바라보는 이웃집 아내의 시선으로 현대인의 고독과 상실을 예리하게 추적합니다. 


전쟁이나 재난 같은 거대하고 역사적인 사건들은 잠시 우리의 일상에 충격을 가하며 불안을 자극하지만 이내 우리의 뇌리에서 지워지고 맙니다. 뉴스의 사회면에 등장하는 사건들, 일상적인 삶의 비극, 기괴하고 잔인한 사건들은 자신이 주인공이 아닌 선에서 일말의 위로를 선사하며 우리 자신의 불행을 잠시 잊게 만들기도 합니다. 사건들의 표면적인 정보,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추론들로 정리되어 전달된 사건들이 우리에게 일종의 위로를 건네는 셈이라 말하면 너무 잔인할까요?


대부분의 우리 일상은 논리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습니다. 소설이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벌어진 사건들의 표면을 뚫고 말해지지 않고, 쉽게 드러나지 않는 그 이면의 비논리와 모호함으로 들어가는 것이겠죠. 그렇게 우리 일상의 심연을 마주하도록 하는 것이 소설의 일이 아닐지...사건의 표면적인 정보는 한 사건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살인이라는 가장 강렬한 사건은 그 사건을 바라보는 자들에게 일상의 무감한 시간과 기억, 타인과의 관계와 배려, 상실과 고독을 마주하게 합니다. 살인을 저질렀으나 왠지 살인에 휘말린 듯한 장 리노를 바라보는 엘리자베스의 담담한 시선은 범인도, 살해 방식도 자명한 이 살인 사건을 모호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살인자는 누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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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ignoramus, 우리는 모른다'라는 발견이라 할 수 있다. 현대 과학은 우리가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한다는 가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 


반면 근대 이전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최근 500년이 인류가 5000년 동안 발견했던 것의 거의 모든 것을 발견한 시기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근대 이전의 전통 지식이었던 이슬람, 기독교, 불교, 유교는 세상에 대해 알아야 할 중요한 모든 것은 이미 알려져 있다고  단언했다. 




중세인들이 일상 생활에서 알아야 할 것은 별로 없었으며 모른는 것이 있다면 사제나 현자에게 묻기만 하면 되었다.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은 신의 영역이었고 신이 알고 있거나 그것이 신의 뜻이라는 것만 이해한다면 모든 것은 밝혀진 것이나 다름 없었다. 과학이 설 자리는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모른다'라는 사실을 깨닫는 그 순간, 현대 과학은 새로운 지식의 획득을 목표로 이론을 만들어내고 그 이론으로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자 했다. 여기서 말하는 무지란 지식이 동반된 무지, 지각과 통찰이 있는 무지다.


"과학혁명은 지식혁명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무지의 혁명이었다."_유발 하라리




과학을 이끈 무지란 무었일까?



사람들은 대개, 과학이란 ‘과학적인 방법’이라는 황금률을 바탕으로, 전문가 조직이 실험에 의해 어떤 사실들을 착착 밝혀내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언론이나 학교가 주도적으로 엮어낸 환상이라 할 수 있다. 즉, 그렇게 체계적이지 않다는 얘기다. 


캄캄한 방에서 검은 고양이를 찾는 것처럼, 그렇게 더듬거리며 헤매고 이리저리 짜 맞추려고 애쓰며 과학은 매일매일 조금씩 나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 과학을 이끌어가는 추진력이라 할 수 있다. 과학에 대한 관습적인 생각을 뒤집어 생각함으로써 과학 연구의 진정한 본질적 측면을 조명하는 책 [이그노런스]



무지의 사례 연구


과학이 어떻게 사실을 얻는지, 그 과정이 실은 어떻게 무지를 만들어내는 과정인지, 우리가 어떻게 과학을 가르치거나 이에 실패하는지, 그리고 비과학자들이 어떻게 의외의 관문을 통해 과학이라는 흥미로운 세계에 들어설 수 있는지를 탐구하며 과학을 이끄는 무지의 사례들을 모았다. 


이 책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과학자들의 사례를 통해 우리가 낭만적으로 생각하는 과학의 이상과 달리 실제로 행해지는 과학의 모습을 솔직하게 자주 재밌게 궁극적으로 심오하게 살펴본다. 스튜어트 파이어스타인에게 과학은 예기치 않은 것으로 가득한 모험이다._올리버 색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의 저자


과학이 무지를 다루고 조장하고 무지에 힘입어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미지의 것을 만지작거리며 요리조리 알아보는 것은 모험이다. 그리고 이런 모험을 직업으로 한다는 것은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누리는 특혜다. 이 책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생각 하나는 이런 식의 무지가 꼭 과학자들의 전유물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좋은 과학자가 무지에 관한 한 전문가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말이다. 여러분도 이렇게 될 수 있다. 최첨단에 서고 싶은가? 그렇다면 모든, 혹은 대부분의 무지가 저기 밖에 있다. 대답은 잊고 질문에 매달려라. - 23p


이 책은 과학자들이 무지를 사용하여 연구의 틀을 짜고 무엇을 해야 할지, 다음 단계는 무엇인지, 자신의 에너지를 어디에 쏟아야 할지 결정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과학자들이 무지를 사용하는 방식이 다양하다는 것도 보여준다. 


무지를 통해 다른 연구와의 연결성을 찾는 사람, 해결된 듯 보였던 질문을 다시 살펴보는 사람, 작은 질문들을 사용하여 더 큰 질문을 얻으려는 사람, 그저 호기심이 이끄는 대로 문제에 달려드는 사람 등 다양하다. 


다양한 사례를 소개하여 독자로 하여금 무지의 기초적인 사항들에 대해 감을 잡고, 실험실과 과학자의 마음속에서 다양한 질문들을 두고 매일매일 벌어지는 전투에 대해 이해하도록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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