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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18 21:15]

‘1960년 1월 4일 오후, 수많은 알제의 기자들이 카뮈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자 리옹가 93번지 아파트로 몰려들었다. 그녀가 아직 아들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듣지 못했음을 알고는 주소를 잘못 안 것 같다며 그 자리를 떠났다.’(‘카뮈의 마지막 날들’-조제 렌지니·문소영 옮김)

파리 근교의 한 국도에서 자동차 사고로 사망한 카뮈의 소식이 전해진 알제의 고향집 풍경이다. 당시 카뮈는 47세였다. 3년 전 최연소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된 카뮈는 인생의 황금기가 보장되어 있을 때 세상을 떴다. 그런 만큼 북아프리카 알제에 살고 있는 카뮈 어머니에 대한 취재는 기자들에게 불가결한 일이었다. 그러나 기자들은 예상치 않은 방문에 뜨악한 눈을 치켜뜬 어머니 앞에서 발길을 돌렸던 것이다.

알제의 기자들에게 카뮈는 살아있을 때나 사후에나 뉴스의 진원지였지만 그 어머니 앞에서는 저널리즘보다 휴머니즘을 선택했던 것 같다. 카뮈의 어머니는 문맹에다 거의 귀머거리 상태였다. 자식의 죽음을 통보하는 일은 그때나 지금이나 어렵고도 난처한 일이다.

돌이켜보면 유난히 사망 기사가 많았던 비탄과 비통의 계절을 통과해왔다. 4·19, 5·18, 6·25로 이어지는 비극의 기념일 앞에 우리는 3·26 천안함 침몰의 역사를 보탤 수 밖에 없다. 카뮈의 경우가 개인적 죽음이면서도 공적인 죽음의 의미를 내포한다면 천안함 희생자들은 사건 발생 순간부터 공적인 죽음이라는 외피를 두르고 있다. 국방의 의무를 짊어진 작전 중의 병사라는 점에서 그들은 어머니의 아들이기에 앞서 국가의 아들이었다.

이에 덧붙이자면 그들에 대한 추모 역시 국가 차원이 먼저였고 희생자 가족들의 추모는 그 후순위로 자리매김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사체 발견 전에 보상과 장례 이야기가 시작되었으니 그들에 대한 추모는 이미 가족 차원을 넘어 국가 차원으로 번져들었던 것이다. 죽음의 분배 혹은 슬픔의 분배라고 할 만하다.

국가 차원의 보상과 묵념이 그들의 영정 앞에 바쳐졌지만 어머니의 슬픔은 줄지 않는다. 자식을 잃은 슬픔에는 슬픔이라는 표면적 어감보다 더 큰 침묵이 자리잡고 있다. 국가 차원의 거대한 묵념이 끝나고 나면 곧 시대가 바뀌게 되리라는 것, 즉 아들 없이 살아야 한다는 것을 어머니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국가 차원의 추모와 보상이 이루어졌다 한들 희생자의 어머니들은 자식 잃은 슬픔이 엄습할 때마다 자신에게 억압된 것들이 전혀 해소되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있음을 절감할 수밖에 없다. 억압된 것들이 회귀하는 순간들은 이렇듯 국가의 통제밖에 있다.

49재도 끝나고 보상도 매듭지어지는 단계다. 그러나 슬픔은 해소되지 않는다. 게다가 국가 차원의 예우나 보상은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한숨 앞에서 티끌처럼 가벼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많은 어머니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국가적 추모 앞에서 억눌러야 했던 개인적 슬픔, 그리고 차마 말하지 못했던 양심적 부당함이나 불편함에 대해 견디지 못하는 상황에 봉착하게 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국가적 추모가 끝나고 나서야 어머니는 자신에게 다가온 슬픔의 얼굴을 정확하게 볼 수 있다. 이 지점이 감성의 회복인 것이다. 사람들이 감성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이야기가 세상의 수많은 사건과 알 수 없는 정보 속에서 개인의 자기 정체성을 찾는 중요한 방식이 되기 때문이다.

카뮈는 유작이 되고 만 미완성 원고 ‘최초의 인간’ 서두에 이렇게 적었다. ‘이 책을 결코 읽지 못할 당신에게…’ 여기서 당신이란 문맹의 어머니다. 카뮈는 모든 명예와 지식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보다 못한 인간이라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다. 노벨문학상이라는 명예를 거머쥐었지만 마음속은 알제의 여전히 낡고 좁은 아파트에 홀로 살고 있는 귀머거리 어머니에 대한 애틋함으로 가득차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아들, 아니 자식의 모든 삶은 어머니에게 헌정된다. 지상에서 들이쉬었던 마지막 숨까지도.

정철훈 문화부장 chj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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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주소 :   http://blog.aladin.co.kr/3mpoet/3703151

글쓴이 : 어떤날  2010.5.9 12:29 

여느때처럼 앞표지 날개의 저자 소개를 먼저 읽는다

'책 속에 파묻혀 지내던 사춘기 시절, 밀란 쿤데라와 마르그리트 뒤라스를 사숙...'이란 대목에서 잠시 주춤...

만만치 않은 두 작가를 사숙했다니, 책을 받아봤을 때의 첫 인상이 조금은 무거운쪽으로 변한다.
나 또한 좋아하는 작가들인지라, 미리 도착한 책을 여러 사정으로 늦게야 손에 들게 되면서 부랴부랴 읽어본다.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적당한 소설이었다.

다 읽고 난 뒤 보니 나는 중간 중간 이런 메모를 해두었더라.

픽션+논픽션, 풍자+성찰, 인문학적 글쓰기+옴니버스 영화, 커트 보네거트+밀란 쿤데라, 조금은 마르그리트 뒤라스... ^^
 

'디에고는 여전히 모험 그 자체요, 세상의 끝이다'
'세상의 끝'이므로 '종착지'다.
그것도 '표류하는 영혼들'의, 어찌보면 현대사회 구성원 모두가 해당될...

중반 이후부터 버릇대로 문장이나 문단에 빗금을 그은 부분이 많아졌는데,
문장이 탁월하기도 했지만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읽을 때처럼 흔하지 않게 내게 건네는 충고들 같아 되새김질을 한 곳들이었다.
솔직하고 과감한 채찍질이었다.

단편적이긴 하지만 마다가스카르, 프랑스와 프랑스인 그리고 아시아계 소수로 대변된 서구사회, 국제협력기구에 대해
알고 있거나 알지 못했던, 그래서 '오해'하거나 무조건 받아들였던 사실들을 수정해가게 되는 흥미로운 소설이었다.
사회참여적이면서도 현대사회 속 개인의 내면을 집요하게 들여다 본 의미있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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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양에 대한 경배〉,〈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과 같은 걸작을 탄생시킨 플랑드르의 화가 얀 반 에이크는 사고로 눈을 다쳐 더 이상 색깔을 볼 수 없게 되자 글을 쓰기로 결심한다. 화가로서 살아온 인생을 회고하여 글로 쓰려는 것이다.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서, 위대한 화가이자 자유로운 인간이 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했던 일들을 떠올린다. 아버지의 아틀리에에서 보낸 어린 시절, 도제 시절에 겪었던 갈등, 네덜란드 전쟁, 예술가로서의 고민, 여성들과의 사랑 이야기를 글로 풀어낸다.
반 에이크는 중세 전통기법을 배웠지만, 그 기법을 비판적으로 재해석하여〈자화상>을 그린다. 이로써 반 에이크는 스스로 영주들과 같은 역사적인 반열에 오른다.
엘리자베트 벨로르게의 소설《반 에이크의 자화상》은 자서전 형식의 픽션이다. 저자는 이 소설에서 격동적인 15세기를 배경으로 반 에이크의 치열했던 삶을 뛰어난 솜씨로 그려내고 있다. 반 에이크, 그는 관능적인 대담함으로 르네상스 시대의 화려한
인본주의를 창시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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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랄라 2010-05-25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궁금한 게 있어요. 왜 뮤진트리에서 나오는 소설은 죄다 프랑스 소설인가요?

뮤진트리 2010-05-26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죄다 그런건 아니구요,,일본소설도 있고요, 앞으로 나올 소설은 스웨덴 소설도 있답니다~~

키위녀 2010-05-29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싶어요.ㅠ
 

 
...며칠 후, 그는 거기에 있었다. 어머니가 진동을 느끼고 누군가의 느닷없는 등장에 놀라지 않게 늘 하듯이 문을 세게 두드렸다. 그러고 나서 천천히 문을 열고는 잠시 꼼짝 않고 서 있다가 달려가서 어머니를 꼭 끌어안았다. 포옹은 그리 길지 않았다. 포옹이 길어지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약간 위로 물러난 그는 어린 시절의 미소 띤 얼굴 그대로 어머니를 바라보았고, 그 미소에 어머니는 입술을 약간 모으는 것으로 답했는데 그런 표정은 두 사람이 똑같았다. 그 표정은 둘 사이에서만 통하는 기쁨을 나타내는 것이었으며 그 기쁨은 언제나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뜨겁게 달궈졌다가 갑자기 안개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알제리의 가을빛처럼 서서히 희미해졌다. 어머니가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을 등지고 의자에 앉을 때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어머니가 너무나 보고 싶어졌던 그 기념할 만한 날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드리려고 했다. 신문에서 오린 사진들을 서류가방에서 꺼내 보여드렸다.거기에 칼라가 접힌 셔츠에 나비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의 그가 있었다. 그리고 긴 드레스를 입은 프랑신과 왕이 있었다. 진짜 왕이! 스웨덴 왕이!

어머니는 태연했고 아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따라가고 있었으나 그 내용을 제대로 듣고 있지는 않았다. 낯설지 않은 방심한 듯 보이는 표정으로 사진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조그만 하얀 손수건을 한 손가라가에 감았다가 다른 손가락에 감기를 반복했다. 그런 행동은 뭔가 불편하거나 불안할 때 하는 것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갑자기 손으로 이야기를 멈추라는 신호를 보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주저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베르....니 바아지 구겨졌어. 다림질해야 해. 벗어!"

어머니가 식탁 위에 덮개와 뜨겁게 달궈진 다리미의 흔적이 남아 있는 누런 낡은 천을 올려놓자, 알베르는 허리띠를 풀고 바지를 벗어 어머니에게 내밀었다. 물을 묻힌 천이 닿자 다리미는 곧바로 성난 고양이 숨소리 같은 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살짝 탄 눌은 냄새와 겨울 연통에서 나는 냄새가 풍겼다. 알베르는 속옷에 양말과 구두 차림으로 거기 그렇게 있었다. 다 피운 담배를 끄면서 파리의 중상모략가들 중 누군가가 이 광경을 봤다면 어땠을까 상상하니 웃음이 나왔다.

다림질을 끝내고 어머니는 바지를 의자 등받이에 조심스레 걸쳐놓았다. 바로 입어버리면 다시 주름이 생기기 때문에 좀 기다려야 한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 월요일 아침이면 다림질된 깨끗한 옷을 얼른 걸치고는 일주일에 한 번 새옷 느낌이 나는 바지에서 피어오르는 따뜻하고 기분좋은 냄새를 맡았던 그때처럼 해보고 싶었다...

(카뮈의 마지막 날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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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아 2010-05-19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없이 바라보는 모자의 시선이 뭉클했어요...

뮤진트리 2010-05-28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이런 걸 영화의 장면으로 옮겨 놓는다면 어떨까요?..
 

 
서울 국제도서전의 주빈국 행사로 열린 카뮈 좌담회에 다녀왔습니다.
좌담회 참여 후에 카뮈에 대해 더욱 더 많은 생각을 하게 했던 자리였습니다.
카뮈 전공자이신 두분의 국내 학자와 프랑스에서 오신 소설가이자 갈리마르 출판사의
영미문학 책임편집자라는 여성분이 카뮈에 대한 애정 가득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셨습니다. 뮤진트리 블로그의 카뮈와 관련한 포스트들에 거의 다 들어있는 이야기였습니다. 아마도 대중적인 좌담회이다 보니 전문적으로 문학과 사상을 논하긴 힘들었을 듯 합니다.
상처받은 남자, 오해와 경멸, 멸시와 오명에 휩싸였던 불행한 남자의 열정적인 삶에 대해 한 시간 반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프랑스에서의 재조명과 팡테옹이전문제, 사르트르와의 차이점과 복잡했던 관계, 파리 지식인 사회와의 단절과 소외 등이 주로 이야기되었습니다.
이념이 아니라 인간을 택했던 남자. 카뮈. 매우 포괄적인 개념을 자기 철학의 근간으로 삼다보니, 파리의 철학자들로부터 매우 아마추어적인 철학자 혹은 순진한 친구라는 멸시를 받는 것은 당연했겠지요. 여기에 더불어 출신의 문제까지 겹쳐있구요.
올해도 어김없이 카뮈 사후50주년을 맞아 쏟아진 기사의 무게를 재어보면 수백킬로그램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통해 카뮈의 승리라 표현하기도 하더군요. 역사가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고요. 그러나 이 또한 카뮈를 있는 그대로 설명하기에는 뭔가 어색한 듯합니다. 
사르트르와 카뮈의 관계를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두 사람의 저작들을 활용했는데요, 사르트르는 '증오'의 개념,카뮈는 '인간'의 개념으로 풀었는데, 오해와 논란의 소지가 있어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삼가토록 하겠습니다.
사르트르에 대한 평가 역시 각자의 입장에 따라 상반된 평가가 나오고 있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블로거들의 지속적인 독서와 탐구로 풀어야 할 듯하구요.
좌담회는 비교적 가벼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의외로 젊은 대학생들이 많았고요.신선했습니다.
이 자리를 정리해보면서 드는 생각은 카뮈의 현재성에 대한 부분인데요, 프랑스에서의 재조명 등이 이야기되고 있지만, 정작 한국사회에서의 평가와 한국지식인 사회의 연구 성과 내지는 재평가 작업 등은 숙제로 남겨진 상황인 듯합니다. 





소설가이자 갈리마르 영미문학 책임편집자인 크리스틴 조디스 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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