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과 심부름꾼 - 두뇌 속에서 벌어지는 은밀한 배신과 정복의 스토리
이언 맥길크리스트 지음, 김병화 옮김 / 뮤진트리 / 201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http://blog.naver.com/kuju/150102021874 [비의식]

 우리 인간은 자신들이 경험하는 세계를 제대로 인식하고 묘사하고 있는 것일까? 혹 그릇된 인식으로 세상을 파멸로 몰아가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의구심은 사실 그리 멀리서 구할 것도 없다. 내 무의식의 세계로 접근하는 법도 여전히 알 수 없으며, 내 의식이라는 것도 사실은 그리 신뢰 할 수 없다는 것쯤은 아마 반복적으로 누구든 느꼈을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우린 세상을 아주 분명하고 확실하게 아는 것처럼 행동하고 더구나 이러한 오만을 토대로 멋대로 세상을 단정하고 조작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들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인류의 역사 내내 동일한 것은 아니었으며, 때론 자신의 신체와 정신의 합일을, 한편으론 신체는 한 낱 몸뚱아리라는 껍데기이자 혐오의 물질과 고귀한 정신, 영혼으로 분리하는 것처럼 인간 자신의 정체성을 달리 이해하기도 하였다.



 

과연 어느 것이 진실일까? 바로 이러한 선택적 질문을 하는 것이 이미 단순하고 명료함을 쫒는 소위 ‘합리성’이라는 관점에 경도되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둘 다 어느 정도 진실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는 생각 할 수 없는 것일까? 분석적이고 무언가를 분명하게 확정하려는 이러한 태도는 왜 발생한 것일까? 또한 오늘의 사회처럼 물질문명이 기승을 부리고 모든 것을 합리적이라는 기계적 사고로 환원하는 이러한 가치체계가 마치 진실인 것처럼 행동하는 데에는 어떤 궁극적이고 기원적인 연원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단지 근대화와 산업화, 소비자본주의라는 속성이 인간과 인간사회를 이렇게 만들고 있다고만 하면 이러한 체제를 바꾸면 합리화, 사물화하는 인간사회의 습속이 변화할 수 있을까? 이보다 근원적인 어떤 인간 본연의 생물학적, 심리학적 기제가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의문이 먼저 해결되어야 하는 성질은 아닐까?



 

이 저술은 바로 이러한 인간, 즉 인간의 존재성과 수 천 년에 이르는 인간사회의 역사에서 인간의 문화적 현상들이 두뇌와 어떤 긴밀한 조응 관계를 가지고 형성되었다는 성찰에서 시작되고 있다. 종교개혁에서 자본주의의 출현과 강화를 말한‘막스 베버’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를 통해 인류의 역사를 바라본 ‘페르낭 브로델’, 그리고 인간의 존재론적 성찰에 한 시대의 위치를 점유한‘헤겔’과 ‘니체’, ‘하이데거’, ‘야스퍼스’의 철학적 사유는 물론 여느 문학과 예술에 대한 통찰을 뛰어넘으며, 신경생리학, 정신의학의 경험적이고 이론적 기반의 고찰까지 아우르는 이 위대한 저작은 아마 인류 사상사의 기념비적 걸작이 될 것이라 감히 예견하게 된다. 이처럼 인용되고 검토되는, 방대하고 면밀한 지적 통섭은 물론, 이로부터 규명하려는 인간과 인간사회의 현상학적 분석은 가히 敬畏, 그 자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의 인간 존재와 세계에 대한 관점, 아니 믿음은 우반구와 좌반구라는 두 개의 반구로 구성된 인간의 두뇌 작동으로 인간 세상의 문화적 현상이 설명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두뇌 구조는 정신 경험의 본성에 대해서, 또한 세계에 대한 우리의 경험에 대해 뭔가 말해 준다는 것이며, 우리“경험의 상관 변수들이 두뇌 속에서 묶이고 조직되는 방식에 일관성이 있음이 밝혀진다면 인간 정신세계의 구조와 경험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저술은 우반구와 좌반구의 구조와 기능의 이해를 통해 각 반구가 경험하는 세계를 구분하고 바로 이 두 반구의 본래적 이원성이 우리의 정신에서 어떻게 갈등하고 투쟁하는지를 규명한다. 이 두 개의 반구가 각기 어떤 기능들을 하는 것인지를 언어, 진리, 음악 등 그 발생학적, 생리학적, 철학적 탐색을 종횡하며 이루어내는 과정은 그야말로 지적 성찰의 진수란 이런 것이다. 라는 탄성을 불러일으킨다. 이 화려한 지적 탐색을 통한 반구간의 특성을 포괄적으로 설명하는 구절이랄 수 있는데, “우반구가 우선적으로‘새 자극’을 처리하고 일상적이거나 친숙한 것들은 좌반구가 처리한다.”는 것이다. 일례로‘내가 누군가를 안다’고 할 때, “그녀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우린 그녀를 몇 마디 말로 온전하게 전달할 수가 없다. 그녀는 갸름한 얼굴이고 키가 크며, 쾌활하다고 한들 설명하려는 그녀가 아니다. 그러나 그녀를 체험한 나는 그녀와 나사이의 관계라는 지식에 의존하여 그녀를 안다. 이처럼 나와 타자‘사이’의 관계에 의존하여 세계의 면모를 인식하는 것이 우반구이며, 키와 생김새와 같은 사실의 묘사라는 부분적인 지식들을 통해 짜깁기하여 추정하고 짐작하는 것이 좌반구이다. 여기서 우반구는 어떤 맥락속에서 세계를 인식하지만 좌반구는 생명 없는'사실(fact)', 정지한 불변의 지식을 인식한다. 이처럼 두 반구의 앎에 대한 방식은 완연히 다르다. 이러한 기능상의 구분이 현실의 세계에 어떻게 투영되고 작동하는지에 대한 고찰은‘후설’의 정신현상학이나‘메를로 퐁티’의 “살아진 신체(lived body)"에서 심화되어 경험하는 신체와 물질적 대상으로서의 신체에 대한 이해로 이행하여 신체에 대한 우반구와 좌반구의 상이한 인식을 거듭 설명함으로써 두 반구의 상이한 존재론적 지위를 규명한다. 즉 여기서 좌반구의 추상성, 명료성, 범주화하려는 경향, 폐쇄성, 독단성, 체계화 경향, 일관성 등의 성향과 우반구의 묵시성, 현재성, 상호성, 포용성 등 서로 다른 성격을 구분 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이 저작의 본질적 논점이라 할 수 있는데, 이렇게 서로 다른 두 개의 반구가 항상 대칭적인 균형을 가지고 작동하지 않는다는, 우리 지성의 내적 구조는 의심할 여지없이 비대칭적이라는 통찰이다. 이 둘 사이에는 일종의 권력투쟁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으며, 특히 이 투쟁이 어떤 특정 비율에 의한 기능의 배분이 아니라 효율성이 높은 쪽에서 작업 전체를 맡으려는 승자독식 시스템에 의한 독재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수용적이며 포용적인 우반구와는 달리 경쟁적이고 배타적인 좌반구가 우위를 누리게 될 경우 세상은 해체되고 파편화되며, 추상적이고 명시성을 중시하는 실용 중심의 물질적 세계가 될 것이라는 것이며, 우반구가 우위를 차지하게 될 경우 협력과 공유, 공감, 생명력의 복구가 진행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우반구와 좌반구의 성격과 그들의 우위가 의미하는 세계의 현상에 대한 이해를 마치면, 우리 인간의 두뇌가 역사의 시간 속에서 작동하는 방식에 따라 경험 세계, 그 삶의 양상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인류 역사의 주요한 문화적 움직임에 따라 명쾌하게 제시하는데, “두뇌는 세계를 어떻게 형성했는가?”하는 질문으로부터 고대 그리스로마 세계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계몽주의, 그리고 낭만주의와 산업혁명, 현대와 포스트모던 세계인 오늘에 이르는 인류의 문화적, 정신적 전환시대들 마다의 시대의 본성과 두 반구간의 공존과 충돌의 관계에서 반복되는 유형의 발견은 가히 인간 정신 통찰의 괄목할만한 제안이라 할 수 있다.

 

좌반구가 우위를 점하는 시대는 정신과 신체가 분리되어 신체가 사물화 되고, 다시 우반구 우위, 즉 반구간의 평형이 이루어지면 감성과 상상력이 부활하고 새로움과 즐거움이 회복된다. 논리적 체계를 현상에 우선하여 모호성이나 모순을 거부하고 확실성과 정지상태를 달성하려한 소크라테스 이전과 이후의 시대로 구분되는 고대 그리스의 경우처럼 플라톤 이후 르네상스 이전의 서구세계는 관념화되고 표상화되어 물질화되는, 생명과 공존 할 수 없는 분리와 해체로 이어지는 세상이 된다. 즉 획일화하고 명료화하고 신체를 거부하는 좌반구 우위의 시대라 할 것이다. 이러한 좌우반구의 우위의 결과는 르네상스라는 인간의 회복과 예술의 부흥이, 종교개혁과 계몽주의 대두로 다시금 데카르트와 같은 물질중심의 단순, 명료화, 개념화에 다시금 신체를 빼앗긴다. 이러한 반복은 산업혁명과 모더니즘이라는 자기 인식 과잉의 시대에 와서는 인간의 소외된 무기력을 양산하고 자아감각의 상실로 치닫는다.



 

한편, 이 두뇌와 세계현상의 동질적 상관관계의 서술에 동원되는 문학작품과 회화, 음악 등 예술의 비평적 해석은 그야말로 지적 성찬이며 주제읽기에 넘치는 덤이라 할 수 있는데, 모더니즘의 대표적 인물들인 니체, 네르발, 달리, 비트겐슈타인, 카프카, 베케트에서 발견되는 무관심과 공포, 불안과 지루함이 좌반구의 폐쇄된 거울 방에 갇혀 반복되어 증폭되는 인식의 과잉, 편집증적 정신의 양상임을 지적하는 것과 같다. 이는 우반구의 결함에서 나타나는 정신병적 소견과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당대의 성격을 이해하는 수단으로서의 저자의 믿음이 하나의 문화 분석 방법으로 가치와 권위, 신뢰를 확인하는 과정이 된다. 좌반구가 우위를 점한 오늘의 우리 사회를 굳이 정리하려 한다면, 이 저작에서 규명한 좌반구의 성격을 그대로 나열하면 될 것이다. 세상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말(語)중심의 사회이자, 조각난 부분에 열중이며, 그래서 명료성을 확인하려하고, 은유나 육화된 능력을 상실하고, 우반구를 배제함으로써 스스로 폐쇄될 수밖에 없는 자기 앎의 테두리에서 되돌이하는 지루함, 그래서 엄청난 자극과 충격이 아니면 자신을 확인 할 수 없는 곳, 은유나 미토스를 상실해서 정신적 물음에는 회피하는 세상, 기계적이며, 획득적이고 효용과 목표에만 염두를 두는 세계, 맥락이 박탈되다보니 조각의 순서에만 초점을 맞추어 기계적으로 환원한 것이 세상의 모습인 줄 아는 허위의 세상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정신적 경험의 본성이 양분되어 있다는 이 저술의 논지를 수용하는 것만으로도 우린 우리 자신과 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두 개의 완전히 다른 경험 형태에서 우반구의 우위를 위해 우리가 노력한다면, 괴테의 파우스트가 외친 “두개의 영혼이여, 아아! 내 가슴에 깃들라”라는 선언을 받아들인다면 아마 우리의 세상은 불안과 물질적 경주를 종식하고 르네상스와 낭만주의의 인식능력을 회복할지도 모를 일이다. 신경과학이 역사와 문화, 사회 분석적 통찰의 도구가 되고 시와 소설, 그림과 조각, 쇼팽과 바흐의 음악, 그리고 헤라클레이토스에서 니체에 이르는 철학이 다시금 인간의 두뇌와 존재의 의미로 돌아와 나와 세계가 서로 조우하고 은유가 넘치는 감성의 사상이 되는 이 저작은 이 세기의 사상적, 문화적 방향을 제시하는 최고의 철학서요, 신경과학서이자, 인류문화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 위대한 역작이며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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