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

국회의원들이란 다만 자기가 소속되어 있는 정당에 물질적 이익이 많이 돌아오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 있을 뿐 그 밖의 일에는 도대체 관심도 갖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마다 자기 이윤을 추구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의 이윤을 비난하곤 하였습니다. 일반의 복지를 생각하는 국회의원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에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격돌이 벌어지고 심지어는 잉크병을 던지는 일까지 벌어지지 않았습니까?

(237)

나는 무엇이 옳은지를 판단하기 위하여 문제를 여러 가지를 새로운 형태로 설정해 보았다. 만약 자기 집에서 가족 한 사람이 전염병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그 전염병의 감염을 더 이상 확대시키지 않기 위해서 집을 떠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희망은 없을지라도 그 병자를 끝까지 간호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 도대체 하나의 혁명을 질병과 견주는 것이 옳은 것인가, 도덕적인 규준을 뒤엎는다는 것은 너무 지나친, 안이한 사고방식이 아닌가, 그렇다면 플랑크가 이야기한 타협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강의가 시작될 때마다 나치당이 요구하는 형식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나는 손을 높이 들어야 했는데(손을 어깨 높이로 들어서 히틀러 만세라고 말해야 했던 것이 당시의 형식이었다-역주), 지금까지 얼마나 자주 그들의 요구대로 사람을 만났을 때 손을 들고 그 손끝을 움직이면서 인사를 하였던가. 이런 행동이야말로 하나의 수치스러운 타협이 아니었던가? 공식적인 편지에는 하일 히틀러’(히틀러 만세)라고 서명해야만 했는데, 이거야말로 불유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238)

한편 사람들이 이민을 결심하였다면, “사람은 일반적인 최다수의 사람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원칙에 맞도록 자기의 행동을 취해야 한다는 칸트의 요구와는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 것인가. 모든 사람이 이민을 갈 수는 없는 일이다. 사람들이 그때그때의 재난을 피하기 위하여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쉴 새 없이 방황해야만 하는 것일까. 비록 다른 나라에 이민을 갔다 해서-긴 안목으로 생각할 때- 그 나라에서는 이와 같은 재난에 부딪히지 않는다는 보장은 어디에 있는가. 결국 사람이란 출생과 언어, 그리고 교육으로 말미암아 어느 특정한 나라에 소속되게 마련이다. 이민을 간다는 것은 결국 정신적인 균형을 잃어버리고 독일을 도저히 장래를 바라볼 수 없을 정도의 파국으로 몰고 가려는 광신적인 무리들에게 아무런 투쟁도 없이 넘겨주는 격이 되고 마는 게 아닌가.

(240)

실제로는 내가 이민을 갈 것인가, 독일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플랑크는 이와 같은 파국이 지나간 다음의 시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 말은 분명하게 잘 이해되는 말이었다. 이러한 재난의 시기를 통하여 불변의 고도를 구축하는 일, 그리고 젊은이들을 모으는 일, 그래서 되도록 이 재난을 꿋꿋하게 타개해 나가다가 재난이 끝나면 다시 새롭게 재건하는 일이 플랑크가 나에게 말한 과제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타협을 맺게도 되고, 이로 말미암아 뒷날 지탄을 받게 될 경우도 생길 것이고, 때에 따라서는 더 악화된 사태가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하게 설정된 과제였다. 원래가 국외에서는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그곳에는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좀더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는 과제가 있을 뿐이다. 라이프치히로 돌아왔을 때는 적어도 당분간은 독일에, 그리고 라이프치히대학에 머물면서 앞으로 어떤 일들이 펼쳐질 것인지, 그리고 우리가 나아가는 길이 어디를 향하는지를 지켜보기로 한 결심이 차츰 굳어지고 있었다.

(253)

어째서 그런 세 개의 임의적인 단위가 존재해야만 하는가 말이다. 그 단위 가운데 하나-양성자-는 다른 단위-전자-보다 1836배의 무게를 가져야 하는지, 도대체 이 1836이라는 숫자는 어디서 근거를 찾을 수 있는 것인지, 또 이 숫자는 왜 파괴되어서는 안 되는지를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사람들은 이 단위들을 임의의 높은 에너지로써 서로 충돌시킬 수 있게 되었다.

(270)

어쨌든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이번 전쟁은 원자탄의 발명으로 결판이 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이 전쟁은 젊은이들의 몽상적인 희망과 일부 연장자계층의 사악한 복수심에서 나오는 불합리한 힘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기 때문에 원자폭탄의 힘에 따른 결정은 자각이나 피폐에 따른 결정보다는 문제해결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어쨌든 전쟁이 끝나면 다음 시대는 원자기술이나 다른 기술의 진보로 특정지어지는 시대가 될 수 있겠습니다.

(286-287)

그러나 우리 독일사람들이 저 이상한 꿈과 신비를 향해 달음질치는 경향을 계산에 넣는다 하더라도, 어째서 이 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분명하게 냉철하고 과학적인 사고에 그렇게까지 환멸을 느끼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과학이라는 것이 논리적인 사고와 단단히 짜여진 자연법칙들의 이해와 적용만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올바르지 않습니다. 도리어 실질적인 면에서는 환상은 과학의 영역, 특히 자연과학의 영역에서도 결정적인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실을 얻기 위하여 냉철하고 세심한 많은 실험적인 작업이 필요하지만 사실의 종합정리는 사람들이 그 현상을 곰곰이 생각할 때보다는 도리어 그 현상으로 감정이입이 가능할 때에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288)

우리는 우리 눈앞에 주어진 사실만을 걱정하면 그것으로 족할 것입니다. 장래의 일은 현실이 허용하는 테두리 안에서 작용하는 상상을 통해서 생각해야 하며, 전후에 독일민족에게 어느 정도 참을 수 있는 생활조건을 마련해 줄 수 있는 정치가 탄생될 것을 희망해야 할 것입니다. 그건 그렇고, 과학에 관한 카이저-빌헬름 연구협회는 독일에서 연구활동의 재건을 위해서 꽤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대학들은 카이저-빌헬름 연구협회에 견주면 정치적인 간섭을 피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대학들은 좀더 큰 어려움을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 이 연구협회가 전쟁 중에 무기개발 연구에 참여함으로써 어느 정도 타협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외국에 있는 많은 학자들과 우호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들은 독일에서, 그리고 저마다 자기 나라에서 냉철하고 신중한 사고의 의의를 올바르게 평가하고 되도록 우리를 도와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당신은 당신의 전문 분야에서 전후의 평화적이고 국제적인 협동연구를 위한 어떤 연결점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298-299)

과학의 발달이 이와 같은 재난과 연결될 수 있다는 이유로 이 과학의 발달과정에서 손을 떼야 한다고 주장하는 극단적인 사상의 소유자들도 당연히 나타날 것으로 봅니다. 자연과학의 발전보다 더 중요한 사회적 학문적 정치적인 과제들이 있을 것이고, 또 그 점에서는 그들의 생각이 옳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오늘의 세계에서 인간의 생활이 광범위하세 과학의 발전에 기대고 있다는 점을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사람들이 곧 지식의 끊임없는 확장에서 전향해 버린다면 지구상의 인구를 단시일 안에 급격하게 감소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아마도 원자폭탄과 필적하거나 그보다 더 흉악한 파탄을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또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지식은 힘입니다. 지상에서 힘을 얻으려는 싸움이 존속하는 한 그리고 당분간은 이 싸움이 종식될 것 같이 않는데 지식을 위한 싸움도 계속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아마도 훨씬 뒤에 가서 하나의 세계정부와 같은, 말하자면 단일 중심적이긴 하지만 되도록 자유가 유지되면서 지구상의 상호질서가 지켜지는 그러한 시대가 온다면 지식의 확대에 대한 노력은 약화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우리에게는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당분간은 과학의 발전은 인류의 생활과정에 속할 것이고, 그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개개인에 대하여 죄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여전히 이 발전과정을 선한 방향으로 돌리고 지식의 확장을 인간의 복지를 위해서만 이용하여야 하되, 그러면서도 이 발전 자체는 방해받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문제는 다음과 같이 제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개개인은 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인가, 또 연구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어떠한 의무가 부여될 수 있는 것일까.

(302)

아마도 전쟁 초기에 미국 물리학자들은 독일이 원자폭탄의 제조를 시도할 수 있다는 점을 몹시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우라늄 분열은 한에 의해서 독일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으며, 히틀러가 유능한 많은 물리학자들을 추방하기 전에는 우리나라의 원자물리학의 수준이 확실히 그들보다 높았던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따라서 그들은 원자폭탄에 따른 히틀러의 승리는 그야말로 위험천만한 것으로 여겼을 것이며, 이 같은 파국을 피하기 위해서도 자기들의 원자폭탄 제조연구를 정당한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을 떠올린다면, 이와 같은 일에 대하여 무어라고 반론을 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독일과 전쟁이 끝난 뒤에는 아마도 미국의 많은 물리학들은 이 무기의 사용을 중지할 것을 건의하였겠지만, 그땐 이미 그들의 영향력이 미치기에는 늦었을 거라고 본다. 이 점에 관해서도 우리는 무어라고 비판할 자격이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우리도 우리 정부가 저지른 무서운 일들을 조금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전도를 알 수 없었다는 것은 어떠한 변명도 될 수 없다. 만약 우리가 좀더 노력하였더라면 그것을 좀더 확실하게 알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전체적인 사고과정에서 이 모든 일들이 얼마나 강제적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인식하게 될 때 우리는 참으로 몸서리를 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는 세계사에서 선을 위해서는 모든 수단이 허용될 수 있으나 악을 위해서는 허용될 수 없다는 대원칙, 좀더 나쁘게 말한다면, 목적은 수단을 신성화한다는 이 원칙이 항상 반복해서 실천에 옮겨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고과정을 막을 수 있는 무엇이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일까?

(307)

과학적 그리고 기술적인 진보가 일반사회에 대하여 지니는 중요성에 비추어 그 진보를 직접 담당하는 자들의 공적인 영향력도 확대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물리학자나 기술자가 중요한 정치적인 결정을 정치가보다 더 잘 내릴 수 있다고 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학문적인 연구에서 객관적으로 그리고 사실적으로 생각하는 방법을 배웠으며, 특히 커다란 연관성 안에서 사물을 생각하기를 배운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정치가들의 직업에 매우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논리적인 정확성과 넓은 시야, 그리고 엄격한 청렴 등의 건설적인 요소들은 부여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이렇게 생각한다면, 미국의 원자물리학자들은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너무 소극적이었다는, 즉 원자폭탄 사용의 결정권을 너무 손쉽게 손에서 놓아 버렸다는 비난을 모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원자탄 투하의 역효과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고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320)

지금 말씀하신 대로 사람들이 양자이론을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면, 선생님께서는 물리학이란 한편에서는 실험과 측정으로, 다른 한 편에서는 수학적인 공식체계에 따라서 성립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두 가지 순순한 철학 사이의 접점에서 추진되어야 한다는 말씀이신지요? 즉 이 같은 실험과 수학 사이의 작용에서 일어나는 본래적인 것을 일반적인 언어로 설명하려고 애써야 한다는 말씀이시군요. 저 또한 양자이론을 이해하는 데서 가장 어려운 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실증주의자들은 바로 이 점을 말하지 않고 침묵으로 넘기고 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기에서 그렇게 정확한 개념들을 쓸 수 없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실험물리학자들은 사실상 자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이미 널리 알려진 고전물리학의 개념을 가지고서 그들의 실험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 점이 근본적인 딜레마이며, 이것을 간단히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323)

많은 사람들은 아마도 전문가란 그가 관계하는 분야에 대해 매우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 정의에 만족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원래 한 사람이 한 분야에 관해서 정말로 많은 것을 알 수는 결코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오히려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싶습니다. 전문가란 그가 전문으로 하고 있는 분야에서 사람들이 범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몇몇의 오류를 알고 있는 사람이며, 따라서 그는 그 오류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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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2-01 22: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북홀릭님 설연휴동안 즐거운 시간 보내시고요 우아하고 호쾌한 시간 되세요 ㅎㅎㅎㅎ

bookholic 2019-02-02 08:09   좋아요 1 | URL
때마다 인사를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카알벨루치님도 즐겁고 여유로운 설명절이 되시길 바라며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올 한 해도 알라딘에서 주옥같은 글들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