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받을 용기 (반양장) -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한 아들러의 가르침 미움받을 용기 1
기시미 이치로 외 지음, 전경아 옮김, 김정운 감수 / 인플루엔셜(주) / 201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어느날 갑자기 아들러가 베스트셀러가 되어 있었다.

몇 번인가 적었듯이 불과 3년 전까지도 아들러의 저서나 그에 관련된 책이 시중에 거의 없어서 아들러의 심리학에 대해 더 알고자 해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가 2014년부터 출간이 활발해지기 시작해 급기야 2015년에는 몇 주간이나 베스트셀러 1위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아들러 심리학의 유행 이유가 이런 것일거라 생각했다.

첫째는 관계, 둘째는 이해, 셋째는 용기.


관계를 첫째로 꼽은 이유는 이해나 용기 모두 관계 속에서만 그 필요성이 중대해지기 때문이다.

이해를 둘째로 한 이유는 이해를 바탕으로 하지 않은 관계는 아무리 용기를 낸다고 해도 오해로 이어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용기는 셋 가운데 마지막이다. 관계도 없고, 이해도 바라지 않는다면 용기를 낼 이유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보면 이 책은 아들러 심리학의 최선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하겠다. 

물론 아들러 심리학은 난해하다. 단순히 분석이나 해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많은 노력을 들여야 하는 '이해'가 전제되어야만 아들러 심리학의 본질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아들러 심리학의 구조나 원리는 공부한 적이 없다. 그저 아들러 심리학에 관한 책을 몇 권인가 읽었고, 그의 생각에 관심이 있어 조금 유심히 살폈던 과거의 '이력'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래서 이 책에 대해 조금 이야기해두고 싶어졌다.

그것이 베스트셀러를 피해 읽는 습관을 잠시 접어둔 이유이다.


<미움받을 용기>의 첫인상은 "소크라테스의 산파술과 친절해진 차라투스트라를 합쳐놓은 것 같다"는 거였다. 

이런 인상은 <미움받을 용기>가 '철학자'와 '청년'의 대화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청년이 던지는 반론에 철학자는 반론을 하기보다 청년의 말로 자신의 생각에 편협함이나 오류가 있었음을 자각하게 하는 데서 생겨났으며, 이 책의 끄트머리께서 철학자가 '산을 오르는 과정'이나 '정상', '삶은 점'과 같은 이야기를 하는 데서 차라투스트라 즉 초인과 함께 산을 오르며 세상의 이치를 논하는 니체를 떠올리게 된 것이다.


니체의 말은 어떤지 몰라도 소크라테스는 대화에서 모호하고 난해한 개념을 가져다 쓰지 않고서도 대화의 상대방을 이해시키고 납득시켰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굴복시키는 것과 달리 자연스러웠으며 폭력적이지 않고 부드러웠다. 이 책은 그런 점도 닮아 있다. 

일단 '철학의 용어'라 분류할 수 있는 '개념어'들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게 적었다는 말이다.


간단히 요약하면 <미움받을 용기>는 아들러 심리학이 말하는 '관계'와 '용기'에 대한 이야기를 철학자와 청년의 대화를 통해 풀어나가는 '대화편'이다. 자칫 딱딱하고 가르치는 투가 되기 쉬운 심리학이라는 학문의 한 분야를 대등한 입장에서 논의한다는 느낌으로 읽어나갈 수 있기에 독자가 느끼는 거부감을 덜 수 있었을 것이다. 책 속에서는 내내 관계와 용기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대화의 궁극적인 목적은 '행복해지는 것'이다. 청년은 열등감에 시달리고,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으며, 인정욕구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철학자는 그 모든 것이 '미움받을 용기'가 없기 때문이며 타인이나 세상의 탓이 아니라고 한다. 용기를 내어 자신의 생각과 시선을 바꾸면 바꿀 수 없다거나 바뀌지 않을 것이라 믿었던 것이 바뀌면서 삶이 변화할 것이라는 말이다. 

청년이 쉽게 납득할 리 없다. 그래서 그들은 여러 번 만나서 몇 날 며칠을 관계와 용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보낸다. 

그리고 결국 청년도 깨닫게 된다. 무엇을 깨달았는지는 청년에게 물어보기를.


더 간단히 한 줄로 적으면 이렇게 적을 수 있겠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은 어머니의 뱃속으로 다시 돌아갔다 나오지 않아도 세상을 달리볼 수 있게 하는데, 철학자의 말은 '미움받을 용기'만 가질 수 있다면 다시 태어나지 않아도 새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책 속에서 철학자가 하는 말 가운데 틀렸다거나 잘못된 말은 없어보인다. 오히려 많은 것들이 내가 변하고자 해왔던 방향과 같은 쪽에 있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제법 오래 노력했음에도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맴돌고 있는 화두에 관한 이야기도 그만큼은 되었다.

그래서 이 책은 위험하다. 

마치 원자의 핵분열을 발견한 과학자가 자신의 발견이 '무기'가 되어 인명을 '대량살상'하는데 쓰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과도 같다. 


이 책의 위험성을 몇 가지 적어보면 이렇다.

첫째, 지금까지 자기계발서들은 '하면 된다'고 말해왔고 많은 독자들이 거기서 힘을 얻었다. 그 힘이 지속되지는 않을 지라도 받아들이기 쉬웠고 값싼 힐링을 얻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이 책은 '안 되는 건 그만 두어라'고 말한다. 받아들이기 쉬울 리도, 받아들이고 싶을 리도 없는 '나약한', '루져의 사고'처럼 보일 수 있다.


둘째, 보통은 '원인'을 '나'가 아니라 '외부'에 두고 그 원인을 극복하는 방법을 쓴 책들이 많았다. "이런 사람이 있으면 이렇게 해서 원하는 것을 얻어라.", "저런 일은 저렇게 하면 도움이 된다"는 식이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은 외부의 환경이야 어떻든 모든 원인은 '나'에게 있다고 말한다. 책임을 내려놓는 것도, 타인이나 외부로 돌리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한다. 심리적인 도피처인 '트라우마'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했으며 모든 과거는 내 책임이고 모든 미래는 스스로의 용기에 달려 있다.


셋째, '아들러 심리학'이라고 했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기시미 이치로'의 아들러 심리학이라고 해야 한다. 많은 부분에서 일본과 우리나라는 닮아 있다고 하는데, 경제적인 위기나 사회적 문제 역시 시기만 다를 뿐 비슷한 해결 방식을 보이는 경우가 많은 게 사실이다. 아들러 심리학 역시 일본에서 먼저 유행한 것 같다. 그리고 그 원인은 지금 우리 사회가 직면한 것과 비슷한 문제와 맞닥드렸기 때문일 것이며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프로이트나 융의 심리학만으로는 부족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아들러 심리학을 해석'하는 사람이 생겼을 것이고 그 해석 가운데 하나가 <미움받을 용기>가 되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이다.

말이 길어졌지만 요약하면 <미움받을 용기>가 곧 아들러 심리학이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아들러 심리학이 말하는 핵심적인 내용에서 이끌어 낸 것이기는 하지만 단순히 '용기'만을 가지고 문제나 갈등을 해결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는 '이해'의 문제와 맞닥드릴 것이 분명한데, 이 책에서는 단순히 '과제의 분리'라는 말로 미움받더라도, 오해를 사더라도 그것은 타인의 과제이기에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에서 끝을 맺어버리는 것이다. 


최근 지나가다 본 글 가운데 "나는 미움받을 용기가 있다"는 제목으로 된 짧은 글이 있었다.

결론적으로 그 글의 내용은 '민폐' 혹은 '편협함'이 담긴 '혼잣말'에 불과한 것이었다. 미움받을 용기와 진짜 용기를 구별하지 못한 것이다.

극단적으로는 범죄를 저지르고 난 후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나는 미움받을 용기가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나의 과제를 해결했을 뿐이다." 

지나치다고 생각하는가?


지나치지 말아야 할 것을 지나치는 것이 인간이다. 


이 책을 다 읽어갈즈음 함께 읽던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을 통해 소크라테스에게 내려진 '추방'이 어떤 의미인지 새삼 깨닫게 됐다. 소크라테스가 살던 시기의 '소유의 개념'이란 지금처럼 자의적으로 점유하고 양도하고 처분가능한 것이 아니라 '나'가 세계 속의 특정한 장소와 결합되어 있다는 의미이며 동시에 '가정과 완전히 일치'하는 개념이었다. 


엉뚱하게 고대의, 소크라테스 시대의 '소유'의 이야기를 왜 가져다 적었느냐?


기시미 이치로가 말한 아들러 심리학의 핵심은 관계와 용기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아들러 심리학의 핵심은 관계와 이해다.

고대 소크라테스 시대의 소유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면 소크라테스에게 내려진 '추방'이라는 처벌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다.

나 역시 <인간의 조건>에서 위에 적은 것과 같은 소유의 개념을 읽기 전에는 소크라테스가 추방을 받아들여서 살아남았어도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그러면서 단순히 자신이 추방을 받아들여 아테네를 떠나게 되면 지금까지 자기가 한 말을 부인하는 것이 되므로 사형을 선택했다고 이해했었다. 하지만 이것은 완전히까지는 아니더라도 '많이 잘못된 이해'였다. 

소크라테스는 자신과 자신의 사상과 완벽하게 결합되어 있는 아테네를 떠나는 것이 죽음보다 더 받아들일 수 없는 시련처럼 느꼈을 것이다. 전장의 적 앞에서도 두려움을 모르던 소크라테스가 처음으로 떨었을지도 모를 순간이 '추방'의 판결이 나던 때가 아니었을까?


이 책에서 말하는 용기도 중요하다. 

나 역시 그런 삶을 추구한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인정받기 위한 삶이 아닌,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 오해를 받거나 미움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런 삶을 말이다. 하지만 단순히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매번 느낀다. 용기에는 분명 이해가 더해져야만 한다.

 관계와 이해와 용기는 하나로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적어도 내가 읽은 아들러 심리학은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들러 심리학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샀다.

기시미 이치로의 또다른 책도 있다. 한 권 더 읽어보고 기시미 이치로의 아들러 심리학을 살펴보고 다시 아들러의 저서들로 눈을 돌려봐야겠다.


용기란 의존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 책에 적힌 것이 정답이 아니라는 말이다. 

약을 처방하는 것은 의사다. 약을 주는 것은 약사다. 하지만 대부분의 병을 극복하는 것은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다.

우리 시대가 앓고 있는 병은 '용기를 잃어버린 병'이다.

아들러 역시 자신을 찾아오는 이들을 '환자'라는 말 대신 '용기를 잃어버린 사람'이라고 불렀다.


아무리 좋은 약도 약만으로는 병을 이기지 못한다. 

'용기'가 담긴 책을 읽었다해도 그 용기가 내 것이 되지는 않는다. 

핵심은 용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노력하는 것 아닐까.



/더하기.


이 책 속 철학자의 말을 따르자면 남녀노소를 떠나 우리는 모두 친구가 될 수 있다.

혹 이 책을 읽은 이들 가운데 나와 친구가 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조용히 말을 건네도 고맙겠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뒷북소녀 2015-05-11 18: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대장물방울 2015-05-11 18:01   좋아요 0 | URL
어찌 아시구서는 ^^
감사합니다~~~!!

우렁각시 2015-05-14 0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대장물방울 2015-05-14 16:18   좋아요 0 | URL
어찌 아시는 거지요? ^^ 감사합니다

김신애 2022-03-22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이해를 하려다보니 오해가 되는거라서 아예 신경 끄라는 내용인것 같아요. 그러면 미워지겠죠? 미워하지도 말고 미워해도 어쩔 수 없다 내가 알아서 깨달을게 너 살 걱정이나 해. 이런 뜻인거 같아요.

김신애 2022-03-22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편을 보니 믿어주라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