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어의 실종 을유세계문학전집 95
아시아 제바르 지음, 장진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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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시대는 문학이 무력해지고 소설이 가치를 잃은 시대인가?

실시간으로 연결된 다양한 경로, 매체가 전하는 타인과 세상의 이야기만으로 이미 충분한가?

이 물음에 나는 경솔하다 싶을 만큼 단호하게 '아니오'라고 답할 수 있다. 그런 날, 문학이 무력해지고 소설이 가치를 잃어버리는 시대는 '영원히' 오지 않을 거다. 적어도 나의 영원, 내가 숨쉬고 살아 있는 동안에는 말이다.


 이 확신에 근거가 있는가? 

물론, 근거가 있다. 문학은, 소설은 이 시대, 오늘 혹은 내일, 너 혹은 우리 삶의 단면이나 단절된 시간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 오랜 과거에서 가까운 과거, 오늘을 거쳐 내일, 먼 미래까지 사라지거나 끊기지 않는 연속된 이야기다. 지금의 나, 우리와 닮은 모습을 발견하고 마음과 시야를 넓히게 하는 다면의 창(窓)이 되는 거다. 


 <프랑스어의 실종>을 읽으며 새삼 확신한다. 이 낯선 세계의 이야기 역시 나와 무관하지 않음을. 먼 대륙, 다른 인종, 다른 피부색, 생소한 언어, 무관한 역사, 낯선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너무나 닮은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음을.


 이 소설은 아프리카 북부에 자리한 나라 알제리를 배경으로 한다. 알제리는 19세기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어 20세기 중반 8년에 걸친 독립 전쟁의 승리로 독립한 후, 90년 대 시작된 내전으로 지금까지 테러와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라다. 식민지 1세기, 그 정도의 시간은 한 나라의 많은 것 어쩌면 거의 모든 것을 바꾸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본래의 언어는 상당 부분 지위를 잃는다. 언어에 담긴 정체성, 역사, 감정과 의지까지 빼앗는다. 나라의 권리를 되찾은 이들은 변화, 개혁을 꿈꾼다. 그러나 혼란스러울 수밖에. 무엇을 회복하고, 어디까지 고치고 바꾸며,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이 혼란의 한 가운데에 한 남자가 있다. 원래 주민의 후예이면서, 어떤 과정에서든 독립을 위한 투쟁의 한 가운데에 있었으며, 이후 수십 년을 프랑스에서 살다 고향으로 돌아온 남자. 이 남자는 여전히 고향의 언어만이 표현할 수 있는 감정, 의지를 품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프랑스어가 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 프랑스어로 형성된 정체성 또한 갖고 있다. 그런데 새로이 정권을 차지한 세력은 프랑스어의 사용을 금지한다. 많은 지식인, 언론인, 시민이 알제리를 떠난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실종, 사라지는 일이 계속된다. 이 혼란 속에서 남자는 자신의 삶과 사랑을 기록하기 시작한다. 평생 쓰고 싶었지만 쓸 수 없었던 이야기, 기록할 수 없던 일들을 자기 민족의 언어로, 또한 프랑스어로 써 나간다. 


<프랑스어의 실종>을 읽으며 처음 느낀 건 "식민의 역사는 닮아있다."는 거였다. 어떤 이유에선가 외세가 유입된다. 조선의 경우 동학 농민군 진압을 위해 불러들인 청나라 군대를 둘러싼 협약의 결과로 일제 군대가 조선에 주둔하고 알제리의 경우 프랑스 해역에 출몰하는 해적의 진압이 그 이유였다. 핑계로든 억지로든 한 번 들어온 그들은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들이 얻고자 하는 것 - 대륙 침략의 발판이든, 석유 등 자원이든 - 을 합법적으로 얻기 위한 권리를 세계에 인정받으려 한다. 피를 흘리며 총칼로 위협하든, 지도자와 권력층을 회유하든 식민 상태를 공고히 한다. 언어와 문화를 말살하거나 동화시키려는 시도가 계속 된다. 운이 좋으면 빨리 독립하고 운이 나쁘면 식민 상태가 좀 더 오래 지속 된다. 식민 상태가 끝나면 평화가 찾아올까? 그렇지 않다. 한국은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는 동족 간의 전쟁을 치른 후 둘로 나뉘었고, 알제리는 10년 넘는 내전을 치르고 지금 현재, 2018년 까지도 테러와 내전의 공포에 떨고 있다. 


 이상한 말이 되겠지만 한국, 우리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조선보다 먼저 식민지화 됐으면서 2차 대전 승전국인 프랑스의 식민지였기에 독립의 권리를 얻지 못하고 독립 전쟁을 치러야 했던 알제리. 정치, 종교와 문화적 배경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내전을 치르는 알제리.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기이한 모양, 직선과 직각에 가까운 국경선을 가진 알제리.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알베르 카뮈가 알제리 출신이라느니, 알제리 독립을 반대했다느니, 프랑스 2차 대전 영웅 샤를 드골이 알제리 독립을 승인했다느니, 그런 드골을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었다느니 하는 단편적 지식들. 알제리가 어디에, 어느 대륙에 있는지 그 역사가 어떤지 관심도 없던 멀고 먼 나라의 전쟁 이야기.

 

무관심했다. 계기도, 이유도 없었기에. 정의로운 나라, 세계 평화를 수호하려는 세력들이 왜 부당하게 침탈 당한 조선의 권리와 영토 회복을 위해 노력하지 않았는가 원망하던 때가 있었다. 순진했달까, 그들이 뭐가 다르다고 그런 걸 바랐던 걸까. 아프리카의 더 넓은 영토 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지옥은 과거형이 아닌 현재, 미래의 언제쯤 끝날지 모르는 진행형으로 존재했다. 분단, 테러, 전쟁, 죽음의 땅에서 나고 자라며, 두려움에 떨다 세계 어딘가에 있다는 평화로운 나라를 꿈만 꾸다 죽어가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대한민국의 고통, 전쟁의 위협 역시 현재 진행형이지만 그럼에도 우린 역시 운이 좋은 편인 거다. 


 이런 게 <프랑스어의 실종>을 읽으며 떠올린 생각이다. 프랑스어 권 소설, 알제리, 아랍 작가의, 과거에 존재했던 어떤 남자의 고백이 담긴 소설.

 조선의 식민지, 동족 상잔의 전쟁, 분단과 전쟁의 위협. 우리 이야기는 단 한 마디도 없는 소설이 그 비극성 하나만으로, 비극의 씨앗이 된 외세의 침입, 식민지라는 공통의 배경 하나만으로 닮은 것이 된다. 그들의 혼란, 고통, 미래로 이어져 해결을 요구할 과제들을 도무지 남의 일로 치부할 수 없게 하는 거다.


 문학, 소설이 왜 그 가치를 잃지 않으리라 확신하는가?

이것이 나의 대답이다. 

얼마만큼 명징하게 그 상징을 드러낼 수 있는가, 얼마나 생생하게 갈등과 고민, 감정을 전할 수 있는가 하는 건 작가의 역량에 달려 있는 문제다. 그러나 이야기 속 상징, 갈등과 고민, 감정을 발견하고 사유로 연결짓는 책임은 독자에게 달린 문제다. 

 

 알제리의 역사와 프랑스 식민의 역사를 조금 더 알게된 후에 다시 읽어보면 지금보다 더 많은 걸 느끼고, 발견할 수 있겠지.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이야기, 다시 읽었을 때 더 많이, 다양하게, 깊이 들여다볼 수 있게 될 거라는 기대를 품게 하는 이야기. <프랑스어의 실종>은 그런 이야기의 하나가 됐다.


 이건 덤인데, 타국의 멀고 먼 아프리카 대륙의 어느 나라 역사가 담긴 소설을 읽으며 우리 역사를 더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부끄러움이랄까, 아쉬움에 가까운 미안함이 마음 한 구석에서 솟아나는 걸 느꼈달까. 지식을 채우고, 배움의 범위를 넓히는 건 분명 효용이 있다. 그러나 사유가 없는 지식은 죽은 지식이 되고, 뿌리가 없는 배움은 간단히 흔들리는 법이다. 우리의 사상, 사유를 구성하는 언어의 가치와 존재 의의. 이 소설은 아마 조금 더 깊은 곳, 더 무거운 무언가를 건드리고 있던 게 아닐까. 다음에 다시 읽을 때는 그 무엇을 발견할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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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11-05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아시아 제바르의 다른 소설 <사랑, 판타지아>부터
읽기 시작한 게 탁월한 선택이었던 듯.

이 소설은 알제리의 식민화 과정부터 그리고 있거든.
그 다음에 알제리 독립투쟁을 그린 <프랑스어의 실종>을
읽는 게 맞는 것 같군.

영화 <알제리 전투>는 덤으로.

대장물방울 2018-11-06 00:34   좋아요 0 | URL
오, 그렇다면 전 역순으로 읽게 되는 거네요. 그것도 나름 흥미로울 걸로! 크크 암튼 괜찮은 선택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