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맞은 집중력 - 집중력 위기의 시대, 삶의 주도권을 되찾는 법
요한 하리 지음,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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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맞은 집중력>은 현대사회에서 일어나는 집중력 상실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집중력을 잃게 되면 어떤 위기에 직면할까? 우선 개인의 삶에서부터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우리가 이루고 싶은 일을 달성하는 것과 깊이 생각하는 능력 사이에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집중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우리는 평생 쥐꼬리만 한 연봉에 시달리며 살아야 한다. 문제는 이 집중력의 위기가 단순히 개인의 문제로 끝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현재 집단적 집중력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는 우리 사회가 처한 환경, 경제, 정치적 문제를 제대로 대처할 수 없게 만든다.


집중력 상실의 원인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서비스 체류 시간을 늘리려는 빅테크 기업들의 UX 전략이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GUI를 개발한 진정한 애플의 아버지 제프 래스킨의 아들 아자 래스킨은 인터넷 역사에 아버지 못지않은 업적을 남겼다. 바로 무한 스크롤! 이 기술로 인해 사용자의 서비스 체류 시간은 평균 50% 이상 증가했다. 사용자의 정신을 길들여 잦은 보상을 갈망하도록 만드는 것도 중요한 전략이다. 페이스북의 좋아요나 인스타그램의 하트 같은 즉각적 보상은 사용자의 감정적인 반응과 욕구를 자극하여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하도록 유도한다. 가장 심각한 것은 이 서비스들이 부정적이고 충격적인 내용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 인간의 특성을 이용한다는 점이다. 세상이 가짜 뉴스로 도배되는 이유? 그건 사람들이 이 맛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직 더 많은 조회를 유도하도록 개발된 알고리즘이 이 쓰레기들을 더 빨리 더 많이 나르기 때문이다.


둘째, 스트레스로 인한 만성적인 각성 상태다. 우리의 뇌는 위험 상황에 집중하는 특성이 있다. 현대인은 안전사고, 범죄, 실직, 육아 등 강도 높은 스트레스에 둘러 쌓여 살아간다. 이런 요인에 자주 노출되면 인간의 뇌는 과각성 상태에 빠져 집중력을 상실하게 된다.


셋째, 사용자의 소비를 늘려 몸집을 키우는 현대 자본주의의 성장 방식이다. 소비 자본주의의 가장 큰 적이 뭘까? 합리적 소비를 유도하는 공익 광고? 개인의 각성? 아니, 그건 바로 하루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인간의 '수면'이다. 잠든 인간은 소비할 수 없다. 우리가 깨어있다면 그 시간을 아마존 쇼핑이나 유튜브의 광고를 시청할 것이다. 뿐만 아니다. 기업들은 똑같은 시간에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을 하게 만든다. TV를 보는 중에도 유튜브를 틀어놓고 카카오톡의 알림에 반응하며 인스타그램의 새 피드에 하트를 날리게 할 수만 있다면 소비의 유혹은 더 커질 것이다. 수면의 부족과 멀티태스킹은 우리의 집중력을 KO 시키는 강력한 원투 펀치다.


해결책은 뭘까? 우선 더 많이 놀고, 더 많이 휴식을 취해야 한다. 인간의 뇌는 딴생각을 할 때 오히려 집중력이 향상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를 보냈을 때 어떤 기분이 드는지 생각해 보자. 아마 시간을 '유용하게 활용'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다. 비우지 않으면 결코 채울 수 없다.


그러나 집중력 문제를 오로지 개인의 책임에 맡길 수는 없다. 매일매일 먹고, 자고, 입을 것이 걱정인 사람들에게 더 많이 놀고 휴식을 취하며 요가와 명상으로 안정을 찾으라는 말은 모욕적이지 않을까? 오늘날 우리가 겪는 스트레스의 대부분은 사실상 경제적 위기에서 시작된다. 기본소득, 실업 급여, 연금 등의 복지 제도로 사회적 안전망을 단단히 구축할 수 있다면 사람들은 더 중요한 문제에 저절로 집중할 것이다.


이상적인 말로 들릴 수 있지만, 생각해 보자.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사회가 가장 심각하게 받아들인 환경 문제는 오존층의 파괴였다. 그때 우리는 헤어스프레이를 쓰지 말라고, 냉장고를 사용하지 말라고 그저 말만 하지 않았다. 법을 만들어 프레온가스의 사용을 금지시켰다!


어떤 일이 너무 크고 벅차 개인이 감당하기 힘들다면 전 사회가 대응하는 것이 마땅하다. 법률을 제정해 빅테크 기업들의 알고리즘을 통제하고, 복지 제도와 튼튼한 치안 시스템을 갖춰 안전한 사회를 만들고, 사람들을 덜 일하게 만드는 게 정말 불가능한 일일까?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여성은 투표를 할 수 없었던 게 바로 인간의 역사다. 우리의 역사에 불가능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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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추리문학상 황금펜상 수상작품집 : 2022 제16회 나비클럽 소설선
김세화 외 지음 / 나비클럽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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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에 첫걸음을 뗀 한국추리문학협회는 2년 뒤 한국추리문학상을 제정한다. 2007년부터 여기에 단편 부문을 신설하는데, 이 책 <황금펜상 수상 작품집>이 바로 그 단편 부문의 수상작들이다.


협회나 문학상이 이토록 오래되었는데도 그동안 들어보지 못했다는 것이 신기하다. 괜히 한국이 추리나 SF 같은 장르 소설의 불모지로 불리는 게 아닌 것 같다. 순수 문학의 존재가 투명에 가까울 정도로 약해져 가는 이 시대에 그나마 장르 소설이라도 남아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보지만, 한국은 그 자리를 이미 웹소설에 넘겨준 것 같다. 문학은 순수든 장르 든 간에 독자의 구매 위에서 뿌리를 내린다. 독자가 사서 읽어주지 않으면 성장은커녕 존재조차 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한국 장르 문학계가 더디게 발전하는 가장 큰 이유가 뭘까? 독자의 부족한 관심? 아니면 소설이 재미가 없어서?


한국 경제의 발전사를 돌아보면 아무래도 후자가 맞는 것 같다. 그래서 이런 문학상들이 일종의 후원을 해가며 세계를 키워가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 좋은 시기는 이미 놓치지 않았나 싶다. 웹소설 플랫폼으로 바턴을 넘기면 될 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는데, 거기도 장르가 그렇게 다양하지는 않다. 이런저런  생각해 보면 앞으로 한국에서 재미있는 SF나 추리 소설을 만나기는 굉장히 어려워  보인다.


솔직히 말해 <황금펜상 수상 작품집>에 실린 소설들이 그렇게 인상적이진 않았다. 치밀한 구성, 빡빡한 전개, 착착 감기는 글맛, 독특한 소재, 독보적 캐릭터 기타 등등 중에서 그래도 한 가지는 꽉 쥐고 있어, 비록 지금은 아쉬운 면이 있지만 이후가 기대되는 작품조차 꼽기가 어렵다. 단편에서 무슨 구성과 전개, 캐릭터를 찾냐고? 그건 단편이라는 형식을 너무 무시하는 말이다. 단편은 장편을 덜어낸 요약본이 아니다. 장편 사이사이에 쉬엄쉬엄 놀아가며 쓰는 글도 아니다. 단편은 장편보다 훨씬 단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더 티가 난다.


수상작들이 차지한 지면이 들쭉날쭉한 걸 보면 한국 문학계가 단편에 요구하는 사디스트적 글자수인 1.4만~2만 자의 제한 없이 작가가 꽤 자유롭게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긴 글은 늘어지고 짧은 건 아쉬운 맛이 컸다. 둘 중엔 늘어지는 게 더 별로였다.


공들에 쌓은 글을 너무 쉽게 깎아내리는 건 아닌가 곰곰이 생각해 본다. 단어나 표현에 지나친 면은 없었나 다시 읽어본다. 이 책을 엮은 사람이나 작가 본인이 읽는다면 충분히 그렇게 느낄만한 부분도 있다. 그래도 직접 사서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읽은 뒤 펼쳐놓는 마음이니 이 쪽도 좀 살펴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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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시작된 전쟁 - 북한은 왜 전쟁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가
이철 지음 / 페이지2(page2)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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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7월 베이징에서 공산당 창당 100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다. 이 날의 하이라이트는 중국이 샤오캉 사회 건설의 완성을 선언한 순간이었다. 샤오캉 사회란 절대빈곤의 문제가 해결되어 인민 모두가 편안하고 풍족한 생활을 영위하는 사회를 의미한다.


그러나 내가 대만인이었다면 이 오래된 적의 눈부신 발전보다는 뒤이은 말이 더 공포스러웠을 것이다. 이 날 시진핑은 타이완의 통일을 완성하고 공식적인 독립을 위한 어떤 시도도 분쇄하겠다고 엄중하게 발표했다(p.40). 인구가 14억이 넘고, 400개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으며,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자, 3대 이상의 항공모함을 갖춘 유이한 국가인 중국이, 만약 대한민국을 향해 저런 발언을 했다면 나는 아마 잠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2022년 중국이 발표한 통일 백서는 이 공포가 막연한 것이 아님을 알려주었다. 표면상 이 백서는 '우리는 앞으로 최대한의 성실과 최선을 다해 평화통일을 위해 노력할 것'(p.44)이라고 말했지만 2000년에 발행한 백서에 포함했던 '중앙 정부는(통일 후) 타이완에 군인과 행정인력을 배치하지 않을 것'(p.44) 이라든가 '어떤 문제도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협상할 것'(p.44)이라는 문장은 삭제했다.


이러한 상황들을 종합하면 샤오캉 사회의 건설을 완성한 중국 공산단의 다음 100년 목표는 중화의 통일이며 이 과정에서 무력이 사용될 가능성이 높다는 걸 알 수 있다. 특히 3 연임에 성공한 시진핑은 재임 중에 통일을 이뤄 스스로를 가장 위대한 공산 지도자로 만들 야욕에 불타오르고 있다.


자, 그럼 이 양안 전쟁이 대한민국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최강 반도체 회사 TSMC가 전쟁으로 궤멸하여 한국이 반사이익을 얻을 것이라는 생각은 너무나 안이하다. 대만과 중국의 전쟁은 사실상 미국과 중국의 전쟁이며 이는 대한민국이 최대 교역국인 중국과 군사 동맹인 미국 사이에서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벌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타이완 점령을 위해 중국은 바다로 나올 것이며 본국에서부터 대략 3시간이 소요된다. 중국이 원하는 것은 미국과 그 우방이 개입하기 전에 대만을 점령하는 것이다. 이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한국과 일본에 주둔한 미군이다.


<이미 시작된 전쟁>은 중국이 한, 미, 일을 잡아두기 위해 한반도 전쟁을 일으킬 거라 주장한다. 북한과 중국의 목적은 한반도의 적화통일이 아니다. 적당한 도발로 주한 미군을 묶어두고, 러시아를 이용해 일본 해안을 위협하면 이들이 양안 전쟁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진다. 비로소 속전속결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미국의 제재를 숱하게 받아온 북한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사태에서도 알 수 있듯 전쟁은 오히려 북한에게 활로를 뚫어준다. 물론 러시아에 무기를 파는 것과 직접 전쟁을 치르는 건 큰 차이가 있다. 하지만 지난 수십 년 간 넘을 듯 말 듯 미묘한 도발을 기가 막히게 수행해 온 북한이 아닌가? 북한은 국지전을 치를지언정 결코 전면전으로는 번지지 않을 정도의 군사 도발을 절묘하게 찌르고 들어올 것이다.


대한민국은 양안 전쟁으로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받을 뿐만 아니라 이제 자국 영토 내에서 전쟁을 치러야 하는 위험에 직면했다. 저자는 이 위기를 '북진통일'로 돌파하자고 주장하는데, 앞선 분석의 설득력에 비해 너무 급진적인 면이 있다. 자국 영토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스스로 초래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전략까지 생각해야만 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외교는 오직 자국의 이득을 최우선으로 하는 이기적 행위다. 대한민국의 국민이 죽고 다치는 게 뭐가 그리 대수겠는가? 대만을 점령할 수만 있다면, 중국을 꺾을 수만 있다면, 센카쿠의 영유권을 얻어낼 수만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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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의 종말과 새로운 시작 - 2세기에 걸쳐 진화한 세계화의 과거, 현재, 미래
마크 레빈슨 지음, 최준영 옮김 / 페이지2(page2)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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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흔히 볼 수 있는 표준 컨테이너의 크기는 길이가 약 12.5미터, 너비는 약 2.5미터다. 이 표준 컨테이너는 20세기의 마지막 수십 년 동안 국제 운송비라는 항목을 기업의 비용 목록에서 거의 삭제했다. 컨테이너선은 미국 매사추세츠에 위치한 제조업체가 27개국에 공장을 운영할 수 있게 했고, 호주에서 캘리포니아까지 와인 한 병을 병당 15센트의 가격으로 운반하게 만들었다. 컨테이너선이 없었다면 세계의 공장이라 불리는 현대의 중국도 존재할 수 없었다. 세계화는 디트로이트 같은 자동차 왕국에서 한국의 크고 작은 제조업 중심 도시까지, 수많은 도시에 몰락을 가져왔다.


1956년 역사상 최초의 컨테이너선이 운항을 시작했을 때 이런 미래를 예측한 사람이 있었을까? 물류 혁신은 관세와 운송비라는 장벽에 둘러싸인 개별 국가를 '세계'라는 단일 시장으로 통합했다. 2차 세계 대전과 서브프라임 모기지가 촉발한 2008년 세계 경제 위기를 제외하면 세계화는 늘 괴물같이 성장해 왔다.


그러나 2010년대 후반에 이르러 세계화는 뚜렷한 적신호 앞에 주춤거리기 시작한다. 가장 큰 이유는 제조업 자체가 세계 경제에서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2002년에 세계 총생산량의 17%를 담당했던 제조업은 2010년대에 2% 포인트 감소했다. 세계인은 공산품보다 이제 교통, 교육, 의료 및 통신에 더 많은 돈을 지출한다.


제조업의 쇠퇴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전 세계가 마주한 고령화다. 고령 가구는 냉장고, TV, 의류를 새 걸로 바꾸기보다는 여행, 외식, 의료에 지출하는 돈이 더 많다. 두 번째는 많은 공산품들이 SW의 힘을 빌려 서비스로 전환되었다는 점이다. 비디오와 CD, 블루레이는 이제 스트리밍으로 대체됐고, 제조업의 왕으로 군림하던 자동차조차 점점 공유 서비스로 전환되는 중이다. 현대 기아차가 미래 비전을 선포하면서 괜히 스스로를 '서비스 기업'이라 칭한 게 아니다.


많은 부분에서 제조 혁신이 일어나면서 생산 공정은 더 단순해지고 자동화되었다. 이는 많은 기업들이 생산직 노동자를 고용할 필요성을 감소시켰으며 더 싼 인건비를 찾아 공장을 이전할 요인 또한 사라지게 만들었다. 결정적으로 2019년에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 팬데믹은 수많은 나라에 문어발처럼 뻗어 놓은 긴 가치 사슬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 보여줬다. 단 한 개의 부품 때문에 생산 라인 전체가 멈춰서는 기적. 미국이 대만을 보호하려는 이유는 대만 시민의 자유와 행복 때문이 아니다. TSMC가 생산하는 반도체가 자국의 하이테크 산업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세계화는 끝난 걸까? 저자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이동하는 게 공산품에서 서비스와 아이디어로 바뀌었을 뿐, 그 속도와 규모는 변치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소프트웨어의 아웃소싱은 전혀 핫하지 않다. 이미 너무 평범해졌기 때문이다. 과거 정부들은 세계화의 파고를 넘기 위해 높은 관세와 규제를 갖추었다. 하지만 이런 법규들이 오늘날 인도의 개발자가 github에 소스코드를 commit 하는 걸 막을 수 있을까? 변화는 늘 파괴와 창조를 동반한다. 20세기에 시작된 세계화는 100년도 지나지 않아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이 새로운 질서 속에서 어떤 기회와 몰락이 발생할지, 유심히 지켜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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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
토머스 해리스 지음, 이창식 옮김 / 나무의철학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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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들의 침묵>에서 자유를 얻은 한니발 렉터의 살인 여행이 다시 시작된다. 렉터의 새 도살장은 이탈리아의 피렌체다. 내국인을 압도하는 고어 구사 능력과 역사 지식으로 박물관 관장에 임명된 한니발 렉터는 그곳에서 변함없는 고급 취향을 향유하며 포식자의 삶을 이어간다. 육체적 감금이 없는 렉터에게 인간의 세계는 그저 장난감에 불과하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라도 얻어내는 이 초월적 능력은 그가 소시오패스 살인마라는 사실을 잊게 할 정도로 매력적으로 보인다.


연쇄 살인범을 검거해 일약 국민 영웅으로 떠올랐으나 증거 조작 혐의로 명예가 실추된 이탈리아 경찰 파치의 도전은 처음부터 무리였다. 그도 뛰어난 감각과 수사 능력을 지닌 경찰이었지만 렉터의 상대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파치가 할 수 있었던 건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고작 렉터의 가면을 벗겨내는 것이었다. 정체가 드러난 렉터는 피렌체에서 원하는 만큼 살인을 저지른 뒤 미국으로 향한다. 이 난동의 배후인 메이슨과 그의 오래된 연인 크라리스 스탈링이 사는 나라로.


메이슨은 한니발 렉터의 희생자 중 유일한 생존자였다. 물론 보는 이에 따라 그것이 정말로 '생존'한 것인지 의문을 품을만한 상태이긴 했다. 그는 눈꺼풀과 코와 입술이 없었다. 눈이 마르지 않게 안경은 끊임없이 물을 뿌려줘야 했고 호흡은 기계에 의존했다. 거동은 불가했다. 얼굴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요소는 한니발 렉터가 메이슨이 기르는 개에게 먹이로 줬다. 그중 일부는 메이슨이 직접 먹었다. <한니발> 속 렉터의 범죄 행위는 여자들의 가죽을 뜯어 옷을 만드는 것 정도는 애교로 만들 만큼 잔인하다.


바늘 하나 통과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구성을 보여준 <양들의 침묵>에서 유일하게 모호했던 부분은 왜 클라리스 스탈링이 한니발의 인터뷰어로 선정됐느냐는 것이다. 그녀는 아직 연수도 다 마치지 않은 FBI 교육생이었다. 소설은 행동과학부에 워낙 일이 많아 어쩔 수 없었다고 얼버무리지만 미연방수사국의 인재풀이 교육생을 동원할 만큼 얕지는 않았을 것이다. 행동과학부의 수장 잭 크로포드는 스탈링의 든든한 지지자였고, 시리즈 내내 유사 아버지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 심리적 유대가 잭 크로포드의 잔인성을 숨겨주는 가림막이 된다. 잭은 누구보다 렉터를 잘 알았기에 이 살인마의 파트너를 아주 유심히 골랐을 것이다. 그는 렉터와 스탈링의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예측했음이 분명하다. 스탈링이 견뎌야 했던 그 모든 절망이, 사실은 그녀가 가장 존경하는 선배의 철저한 계산으로부터 나왔다는 바로 이 아이러니가 클라리스 스탈링의 삶을 이해불가한 비극으로 만든다.


영화 <한니발>과 소설 <한니발>은 결말이 완전히 다르다. 원작을 읽어보면 그 이유를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소설 <한니발>의 결말은 소름이 돋는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괴기스럽다. 경우에 따라 다시는 토마스 해리스의 책을 거들떠보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이 요즘 나오는 웹소설이었다면 독자의 항의로 작품이 내려지거나 작가가 이야기를 수정했을지도 모른다.


클라리스 스탈링이 마주한 이 장난 같은 운명은 상실과 좌절로 점철된 비극의 수준을 넘어선다.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무려 행복해 보이기까지 한 그녀의 삶보다, 내장을 쏟은 채 발코니에서 목이 매달린 파치의 운명을 선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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