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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 동양고전 슬기바다 2
맹자 지음, 박경환 옮김 / 홍익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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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흔히 춘추와 전국을 싸잡아 춘추전국 시대로 일컫지만 두 시대 사이에는 꽤 큰 시간 차가 있다. 단순하게 말해 춘추는 공자의 시대였고 전국은 맹자의 시대였다. 맹자는 공자의 손자도 아닌 그 손자의 제자에게서 유학을 배웠다. 맹자가 태어난 때는 공자가 죽은 지 이미 100년이 가까운 시대였다.


전국은 춘추보다 혼란과 분열이 심화되었는데, 예(禮) 운운하며 격식을 차리던 제후들이 비로소 가면을 벗고 이빨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전국은 오로지 힘만이 살아 남을 수 있는 약육강식의 시대였다. 당연하게도 전국을 평정한 남자는 역사상 가장 잔인하고 교활하기로 소문난 '영정'이었다. 최초의 황제. 진시황 말이다.


공자나 맹자나 지금에 와서야 성인으로 떠받들여지지만 당시에는 내뱉는 족족 씨알도 먹히지 않는 이상주의자 떠돌이들이었다. 맹자의 말대로 인간이 본래 선하며 따라서 누구나 요, 순, 우, 탕과 같은 성인이 될 수 있는거라면 춘추와 전국은 왜 그리 피와 살육을 즐겼을까? 군마를 이끌고 달려오는 적국의 왕에게 인과 예를 설파하여 나라를 보전할 수 있다면 무슨 걱정이 있단 말인가? 힘의 시대에 인의는 무력하다. 그리하여 힘을 강조한 시황이 비로소 길고 긴 춘추와 전국을 끝내고 천하를 통일한 것이다.


그런데 웃긴 건 천하를 통일하게 만든 그 힘이 정작 통일된 천하를 무너뜨리는 힘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 국가 진(秦)은 20년도 가지 못해 멸망하고 말았다. 분열된 천하를 두고 항우와 유방이 싸웠는데, 힘의 항우가 덕의 유방에게 패해 비로소 유학의 전성 시대를 여는 한(漢) 나라가 건국된다. 유학을 통치 이념으로 받아들인 한 나라는 이후 400년 동안 유지된다.


유학은 확실히 전란의 시대에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나 평화의 시대, 즉 통일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선 탁월한 힘을 발휘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인간은 우선 생존권이 확실하게 보장되야 인의라는 가면을 손 쉽게 쓸 수 있다는 말이다. 공자와 맹자는 이 점을 몰랐다. 두 사람에겐 큰 뜻은 있었지만 그 뜻을 실현할 전략이 부재했다. 상황이 받쳐주질 않는데 꼬장 꼬장 자기 주장만 되풀이 해서야 어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단 말인가? 그리하여 두 사람은 평생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다 "아아, 세상이 정녕 나의 뜻을 알아주지 않는구나" 하며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나는, 당시의 사람들이 정말 공맹의 사상을 이해 못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들도 충분히 유학의 사상을 적용하여 힘과 덕의 균형을 맞추는 정치를 벌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그 원인을 맹자 본인에게서 찾는다.


솔직히 맹자는 같이 일하기 싫은 동료 유형 중에서도 최악이라고 꼽을 만큼 짜증나는 인간이었다. 우선 잘난척이 심하다. <맹자> 공손추 하 편에는 그의 제자 충우가 "군자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남을 탓하지 않는다"(p.137)며 스승의 언행 불일치를 힐난하자 "만일 천하를 평화롭게 다스리려 한다면 오늘날의 세상에서 나 말고 누가 그렇게 하겠는가? 그런데 내가 무엇 때문에 유쾌해하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요즘 같으면 대단한 swag으로 치부하고 박수를 칠 수도 있겠지만 도무지 군자의 말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맹자의 잘난척은 사람을 너무 가르치려 한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무지한 사람을 경멸하고 모욕하는 걸 즐기는 전형적 엘리트였다. 사사건건 왕을 모욕하고 왕을 힐난하고 왕의 권위를 짓누르면 과연 누가 가르침을 받아들이겠는가? 이루 상편에서 맹자는 "사람들의 문제는 남의 스승 노릇을 하기 좋아하는 데 있다."(p.211) 고 말한다. 자기 자신이 이 말의 반만 지켰어도 전국 시대에 왕도정치를 실현하는 게 완전히 꿈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해도 최악은 독선이었다. 맹자는 요, 순, 우, 탕이라는 전범을 세워 놓고 이들과 같으면 선, 다르면 악이라 몰아 세웠는데 아무리 성인이라 해도 행동에 모순이 있고 잘못이 있기 마련이다. 맹자는 온갖 변명을 늘어 놓아 이 같은 모순을 옹호하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을 반드시 논쟁으로 굴복시키려 했다. 한마디로 맹자는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유교 광신도였던 것이다.


정녕 세상을 바꾸려는 의지가 있다면 사람을 마음으로 감화시켜야 한다. 맹자는 그냥 뭘 해도 밉상인 사람이었다. 아무리 맞는 말을 해도 마음이 동하질 않는다. 맹자가 성인의 뜻을 헤아리는 대신 하루에 한 번만이라도 자기 자신을 돌아 보는 시간을 가졌다면, 그의 왕도정치는 충분히 전란을 평정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써 놓고 보니, 내 얘기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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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굽는 타자기 - 젊은 날 닥치는 대로 글쓰기
폴 오스터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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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서 처음으로 폴 오스터의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 압도적이다. '젊은 날 닥치는 대로 글쓰기' 라는 부제가 달렸는데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쓴 것 같다. 그냥 모든 소설을 이렇게 써줬으면 좋겠다. 확실히 모든 작가는 자기 체험을 얘기할 때 더 생생하고 더 진실되고 더 아름답다.


<빵 굽는 타자기>가 왜 재미있는고 하면 소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주장의 근거로 책 뒤 쪽에 나오는 두 편의 희곡을(희곡이나 소설이나 어쨌든 극화된 글 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해 주시길) 제시한다. 나는 이 희곡들을 한 번에 10페이지 씩 넘겨서 봤는데 그건 나에게 속독술이나 투시술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뭉텅이로 페이지를 넘겨 책을 뭉개버리고 싶을 정도로 두 희곡이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 <빵 굽는 타자기>에도 극적 각색이 있는지 없는지(그러니까 이걸 소설이라고 간주할 만할), 뭐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사실 그런 건 알 바 아니고 알고 싶지도 않고 안다고 해서 딱히 대단한 이득이 생기는 것도 아니니까 패스하자. 그냥 내 주장이 틀린거지 뭐. 재밌으면 된 거 아냐!


나 같은 폴 오스터 혐오자가 왜 또 다시 폴 오스터의 책을 꺼내들었는지에 대해 얘기해 해주는 게 좋을 것 같다. 들어보라. 사실은 전혀 생각이 없었다. <환상의 책> 이후로 그와는 완전히 짜이찌엔, 굿 바이, 사요나라 해 버렸으니까. 도저히 그 지루함을 견딜 수가 없었어. 그런데 얼마전 <그림과 문장들>이란 책을 읽으며 어마어마한 문장 하나를 발견한 것이다.


"나는 기적같은 역전을 꿈꾸었다. 복권에 당첨되어 수백만 달러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따위의 일확천금을 꿈꾸며 터무니 없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중략) 한쪽에는 시간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돈이 있었다. 나는 이 두 가지를 다 잘 다룰 수 있다는 데 내기를 걸었지만, 처음에는 한 입, 다음에는 두 입, 다음에는 세 입을 먹여 살리려고 애쓰면서 몇 년을 지낸 뒤 결국 내기에 지고 말았다. 이유를 알기는 어렵지 않았다. 시간을 얻기에는 일을 너무 많이 했고, 돈을 벌기에는 일을 충분히 하지 않았다."(p.146)


이 말은 우리 우주에 사는, 소설가가 되기를 원하는 모든 생물들을 위한 잠언이다. 이 말 하나만 가슴에 품고 살면 당신의 삶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은 진리요 빛이요 바다를 집어 삼킨 캄캄한 폭풍우를 뚫고 들어오는 등대의 가르침이다. 명심하라. 누구나 돈을 갖진 못하지만 우리 모두는 시간을 갖고 있다. 폴 오스터는 시간을 얻기에는 일을 너무 많이 했고, 돈을 벌기에는 일을 충분히 하지 않은 탓에 인생의 중요한 시기에 이르러 결국 시간도 돈도 모두 잃고 말았다.


나는 너무 늦게서야 이 진리를 만났다. 돈은 애초에 없었으니 별로 원망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 많던 시간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나는 일 초도 멈추지 않고 꼬박 꼬박 쌓이는 시간을 수십 년이나 모았다고 생각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것을 담은 그릇은 밑 빠진 독이었고 시간은 빠진 밑을 따라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과거로 도망을 치고 말았다. 시간은 헤어진 연인과 같고 제 때에 뒤집지 못해 까맣게 타버린 삼겹살과 같다. 떠나간 연인에게 전화를 걸거나 타버린 삼겹살을 먹는 건 자유지만, 자유란 결코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는 무적의 화폐가 아니란 걸 알아두시길. 어쩌면 그 놈의 자유가 우리를 궁지로 몰아 넣은 주인공 일지도 모른다. 자유는 쓰기는 쉽지만 길들이기란 죽을만큼 어려운 괴물이니까. 당신의 인생이 왜 이리 누추한지 알고 싶다면 이 괴물이 어디에서 뛰놀고 있는지를 보면 된다. 혹시 그 곤궁한 인생을 역전시키고 싶으면 괴물을 가장 놓고 싶지 않은 곳에 데려다 놓으라. 그리하면 고통과 함께 원하는 것을 얻을지니.


1947년에 태어난 폴 오스터는 1977년이 되서야 이 진리를 깨달았는데, 진리를 깨달은 후에도 한참이나 어두운 통로를 헤매다 1978년에는 파경을 맞았고 1981년이나 1982년, 혹은 1983년 쯤에 겨우 겨우 한 권의 소설을 출간했다. 그리고 소설은 한 권도 팔리지 않았다. 폴 오스터는 "여기까지 온 이상,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노력해서, 결말이 어떻게 나는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p.172) 정말 소름끼치게도, 


그 마지막 한 번의 노력이 나와 당신에게 폴 오스터란 이름을 기억하게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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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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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하루키다. 단숨에 읽어 치웠다. <색채개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거창해 보이지만 소소한 내용이다. 그런데 거기에 감탄할 만한 이야기의 힘이 있다.


하루키의 이야기에는 언제나 스르륵하고 다른 세계로 미끌어져 들어가는 지점이 있다. 긴자의 대로를 걷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색채와 분위기, 공기의 맛이 전혀 다른 긴자가 펼쳐진다. 독자는 하루키가 부는 피리의 선율을 따라 자연스럽게 이 공간에 발을 딛는다. 이질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아. 그러나 곰곰히 생각을 집중하면 이 곳이 이세계(異世界)라는 게 또렷이 드러난다.


다자키 쓰쿠루라는 남자와 그가 고등학교 시절 만났던 네 명의 친구에 대한 이야기다. 다섯은 그 나이 대의 청년들만이 지닐 수 있는 낭만적 이상에 따라 한점 "스트러짐 없이 조화로운 공동체"를 구성한다. 남자 셋 여자 둘. 쓰쿠루와 아카마쓰와 오우미와 시라네와 구로노. 빨강(아카)과 파랑(아오)는 남자. 하양(시로)와 까망(구로)는 여자. 쓰쿠루만이 유일하게 색채가 없는 남자다.


혈기 왕성한 남녀가 모였지만 그들에겐 이성간의 관계 발전을 자제하는 암묵적 룰이 있었다. 우정은 영원하지만 사랑은 그렇지 않으니까. "흐트러짐 없이 조화로운 공동체"는 그렇게 유지된다. 그러나 조화로운 공동체는 쇳가루 맛이 나는 세상의 바람을 맞기 전에나 유지 가능한 법이다. 그들도 나이를 먹는다. 각자의 삶을 찾아 떠나야 할 시기가 오는 것이다. 쓰쿠루를 제외한 넷은 아직 그 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은 뛰어난 성적에도 불구하고 나고야에서 대학을 다니기로 결심한다. 오로지 색채가 없는 쓰쿠루만이 도쿄의 공대에 진학해 공동체를 이탈한다. 물론 공동체는 변함없이 유지됐다. 그들의 우정은 신칸센으로 한 시간 반 만에 건널 수 있는 거리에 무너질 정도로 나약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대학교 2학년 여름 방학, 빨강과 파랑과 하양과 까망, 아카, 아오, 시로, 구로는 일방적으로 쓰쿠루와의 절교를 선언한다. 이야기는 순식간에 공기의 맛이 다른 이세계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아마도 이런 점이 하루키를 이토록 오랜 시간 대중적 지지를 받는 작가로 만든 힘인 것 같다. 알쏭달쏭한 이야기, 복잡한 메타포, 상징, 다채로운 해석. 소설에게 이 모든 것보다 중요한 한 가지는 도대체 다음 페이지에 뭐가 써 있는지 궁금하게 만드는 힘이다. 하루키에겐 그 힘이 있다.


내가 왜 알지도 못하는 일본 남자의 절교 사건을 궁금해 해야 하는가? 따지고 보면 그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 평범하고도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가 왜 내 마음을 잡아 당기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정말? 조화로운 공동체가 쓰쿠루에게 내린 절교 선언이 폭력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우리의 삶을 돌아보자. 같이 떡볶이를 먹고, 땡땡이를 치고, 오락실을 다니고, 숙제를 안 해 복도를 오리 걸음으로 걷던 내 오랜 친구들은 모두 어디에 있는가? 나는 한 번도 그 친구들에게 절교를 선언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내 주변에서 완전히 사라져 오로지 기억 속에서만 머무른다.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 그것은 축복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 수록 그 가능성은 현실의 칼날을 거쳐 몇 가지 실현 가능한 범주로 좁혀진다. 날카로운 가위가 싹둑 싹둑 필요 없어진 가지들을 잘라낸다. 당신은 인생이 다양한 경험을 하나 하나 축적해 나가는 풍요의 과정이라 믿고 싶겠지만, 냉정하게 말해 인생이란 가슴 깊숙이 간직했던 따뜻한 무언가를 조금씩 조금씩 잃어버리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다자키 쓰쿠루의 상실은 그저 개인적 체험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미 우리는 그의 가슴에 새겨진 것과 똑같은 상처를 우리의 마음 속에 갖고 있다. 순례를 떠나야 하는 건 다자키 쓰쿠루만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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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한 생각들 -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52가지 심리 법칙
롤프 도벨리 지음, 두행숙 옮김, 비르기트 랑 그림 / 걷는나무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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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사고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그 동안 전혀 읽지 않았던 종류의 책들을 많이 보리라 다짐했다. 예컨대 '삼성 경제 연구소'가 추천하는 'CEO'가 여름 휴가 때 들고 가는 책'들 말이다.


나는 지난 <괴짜 경제학> 리뷰에서 이런 류의 책만을 읽어선 결코 이런 류의 책을 쓸 수는 없을 거라고 말했다. 내 말은 틀렸다. 쓸 수 있다.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잘.


CEO들이 하고 많은 날 중에 유독 여름 휴가를 골라 책을 읽는 이유는 평소엔 끔찍이도 책을 읽지 않기 때문이다. 너무 바뻐, 할 일이 많아, 시간이 없다. 그래서 휴가 때라도 좋다는 책을 읽어야지. 그런데 어려운 건 안 된다. 내러티브가 있는 것도 곤란해. 원 포인트 레슨. 실용적인 것만 콕 집어. 쉽게 쉽게 가자. 


요구가 명확하면 만드는 것도 훨씬 쉽다. 게다가 그 요구는 대체로 변하는 일이 없어 제작 단계를 공정화 할 수 있다. 이른바 지식의 대량 생산. 교양으로 만드는 패스트푸드! 이것이 바로 이런 류의 책만을 읽고도 이런 류의 책을 쓸 수 있는 이유다. 자 그럼 우리도 한 번 만들어 볼까? 


버거킹, 맥도날드, KFC에서 햄버거를 시킨다. 빅맥 빵을 조리대 위에 놓는다. 버거킹에서 빼낸 할라피뇨와 치즈를 깔고 KFC에서 건진 징거 패티를 착. 이제 남은 야채를 적당히 섞어 그 위에 놓고 빅맥 빵을 덮어 마무리하자. 어? 그런데 내 햄버거는 팔리지 않는다. 이상하다. 내가 만든 햄버거를 먹어 본다. 맛은 비슷한데, 브랜드가 없구나! 


내용 자체는 누구나 만들 수 있지만 누구나에게 만들 자격이 주어지는 건 아니다. 자격은 현란한 학위와 경력이다. 이 마법의 물약을 끼얹고 나면 책은 비로소 반짝 반짝 빛나는 권위의 훈장을 달게 된다. 이제 남은건 유력 언론사와 동류의 작가들이 보내는 두 줄 짜리 리뷰다. 그것으로 서빙 준비 끝. 완벽한 플레이팅이다.


이런걸 보면 인간은 좋은 생각만으로는 어지간해서 설득 당하지 않는 것 같다. 경험으로 증명해야 한다. 가시적 성과가 있어야 한다. 의견을 진리로 보이게 하는 권위가 필요하다. 세이버 매트릭스의 대부 빌 제임스가 딱 그렇다. 메이저 리그 구단들은 빌 제임스의 기가막힌 통계 이론을 전혀 믿지 않았다. 그가 야구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는데다 번듯한 직장이나 학위를 갖고 있었던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빌 제임스의 의견을 편견없이 받아들인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의 빌리 빈은 아메리칸 리그 최대 기록인 20연승을, 보스턴 레드삭스는 끔찍했던 밤비노의 저주를 깨고 84년 만에 메이저 리그 우승을 거머쥔다(이 이야기는 영화 <머니볼>에 잘 묘사되어 있다).


<스마트한 생각들>의 저자는 롤프 도벨리. 독일에서 가장 냉철한 경영자이자 위트있는 작가로 손꼽힌다고 한다. 그래서 더 컴팩트하다. 그래서 더 깊이가 없다. 원래 이런 책들은 유명한 교수님들이 자주 쓰는데 그 세계에선 나름 실험에 의한 검증이(혹은 통계에 의한) 보편화 되어 있어 근거가 확실한 편이다. 저자는 아무래도 학자가 아니다보니 그런면에서 많은 취약점을 드러낸다. 나쁘게 말해 이 책은 인간이 의사 결정 과정에서 흔히 저지르는 심리학적 오류들을 여기 저기서 긁어 모아 짜깁기한 사례모음집이고 아무리 좋게 봐줘도 '성공했다고 여겨지는' CEO의 '자기' 경험담 이상을 넘어설 수 없는 책이다. 흥미롭진 않지만, 그럭저럭 재밌게는 읽을 수 있다. 심리학과 성공은 언제나 먹히는 키워드니까.


롤프 도벨리는 중요한 의사 결정에 앞서 이 책에 언급한 생각의 오류들을 쭉 써놓고 혹시 자기가 이 중 한 오류에 빠지진 않았는지 확인해 본다고 한다. 앎을 실천으로 옮기는 좋은 습관이다. 나도 첫 사업에 실패한 후 실패의 이유를 메모장에 적어 매일 아침 읽었던 적이 있다. 그 메모의 제목은 '나는 왜 멍천한가'였다. 항목은 무려 마흔 세 개 였다.


이 책은 뻔한 얘기를 반복한다는 혹평을 받을만하지만 어쩌면 당연한 일들은 너무 당연한 탓에 우리의 주의를 끌지 못하고, 그로인해 우리가 항상 멍청한 실수를 반복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런 책들의 목적은 뻔한 얘기를 진지한 얼굴로 함으로써 의식 속 깊숙히 묻혀 있던 진리를 주의의 역치 위로 올려놓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 우연히 행인으로부터 '너는 결국 죽어'라는 말을 듣고난 뒤 평생 죽음의 공포에 시달린 한 남자의 이야기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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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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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는 어렵다. 한병철의 글은 선언과 설명이 번갈아 가며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가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가정 하에 글을 쓰는 것 같다. 그래서 독해는 오래 걸린다. 철학에 대한 한병철의 관점을 생각해 봤을 때 이는 의도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에게 철학은 오래 머물러 숙고할 기회를 주는 학문이다. 읽자마자 이해가 되는 글은 투명한 글이다. 거기엔 깊이가 없다. 하나 하나 껍질을 벗겨 의미의 속살을 깨물어 먹는 묘미가 없다. <투명사회>는 자기 자신이 얼마나 불투명한지를 자랑한다.


그의 책을 어렵게 만드는 두 번째 이유는 통념의 역전이다. 철학은 원래 저항의 학문, 의문의 학문이다. 모두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에 당당히 질문을 던지는 것. 한병철은 이같은 철학의 본질을 극단까지 몰고 간다. 그의 사상은 너무나 독특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당연했던 세계가 무너질 때 우리는 엄청난 감정의 소모를 경험한다. 한병철의 철학은 우리를 탈진하게 만든다.


한병철은 부정성의 철학자다. 부정성이란 무엇이냐, 지난 수 세기 동안 우리가 싸워왔던 질병, 무지, 억압, 독재, 착취 등 세상의 온갖 나쁜 것들을 떠올리면 된다. 한병철은 인류의 문명이 이같은 부정성을 몰아내는 방향으로 진보해 왔다고 말한다. 성과는 훌륭했다. 오늘날 우리는 더 오래, 더 편하게, 더 자유롭게 살게 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현대 사회의 병폐들이 오히려 부정성이 사라진 바로 그 공간에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부정성을 없애기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더이상 싸워야 할 부정성이 남아 있지 않다. 이렇게 얻은 자유의 시간을 우리는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자유가 어떻게 인간의 짐이 될 수 있는지, 그리하여 왜 인간이 그 숭고한 가치를 버리고 독재의 품 안으로 달려가는지를 밝힌 바 있다. 자유란 "사람들에게 각자의 삶에서 어떤 뜻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이냐에 대한 대답까지 자도으로 주는 것은 아니었다."(p.230. 역자 해제 중).


"투명사회에 대한 한병철의 비판은 이러한 부정성의 사상을 시각적-인식적 차원으로까지 밀고 나간다. (중략) 모든 것을 손쉽게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의 대상으로 전환해주는 디지털 기술은 시각적-인식적 부정성의 축소 내지 제거에 기여한다."(p.231. 역자 해제 중)


우리는 현대 사회를 정보 사회라 부른다. 정보 사회에서는 정보의 유통이 부를 창출한다. 오늘날 정보의 유통 속도가 광속을 지향하는 이유도 그래서다. 더 빠른 유통은 더 많은 유통을, 더 많은 유통은 더 많은 돈을 야기한다. 그래서 정보는 투명해야 한다. 메타포를 포함하는 정보, 비밀을 간직한 정보, 은밀히 암시하는 정보, 즉 해석이 필요한 정보는 우리 앞에서 멈춘 채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선 숙고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긴 글이 읽히지 않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무조건 쉽게 풀어내야 한다는 강박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숙고와 사색은 정보 유통의 최대 적이다. 수용하는 즉시 '좋아요'로 반응할 수 있는 것들만이 유통될 가치를 지닌다. 우리는 더 이상 해석을 원치 않는다. 사실 해석은 비밀로 둘러싸인 텍스트의 옷을 하나씩 하나씩 벗겨가는데서 쾌락을 느낀다. 그런 의미에서 해석은 일종의 에로티시즘이다. 하지만 정보는 투명하다. 그것은 이미 다 벗은 채로 세상을 돌아다닌다! 한병철이 현대 사회를 "포르노 사회"로 명명하는 것도 그래서 납득이 된다. 은밀한 가림과 유혹이 사라진 알몸 사회. 즉각적인 충동과 외설만을 감각하는 사회. 우리는 진정한 쾌락을 느낄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 관점에서 나는 찌라시가 왜 그토록 빠르게 유통되는지 생각해 보려 한다. 출처가 불분명하다는 점에서, 또 진실 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는 점에서 찌라시는 불투명해 보인다. 그럼에도 그것은 네트워크를 타고 전염병처럼 번져 나간다. 이유가 뭘까? 찌라시는 일종의 폭로고 폭로는 투명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익히 아는 사람의 이면을 드러낸 것처럼, 가면을 벗겨 낸 것처럼 말한다. 이것은 너무나 어설픈 연기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인다. 왜? 인간은 사실을 믿는 게 아니라 자기가 믿고 싶은 게 사실이길 바라기 때문이다. 남의 속살을 보고 싶은 추악한 욕망, 타인을 발가벗겨 모욕하고 싶은 더러운 욕망이 우리의 착각을 부채질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엉망으로 만드는 게 정치인이라는 사실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공감할 것이다. 그럼에도 정치인들에게 투명성을 요구하는 것이 잘못된 일일까? 한병철은 "그렇다"고 말한다. 우리가 권력자에게 투명성을 요구하는 이유는 그들은 우리를 속속들이 보고 있음에도 우리는 그들을 볼 수 없는 것에 대한 반감 때문이다. 우리는 아무리 몰래 죄를 지어도 끝내 법의 심판을 받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다. 투명성에 대한 요구는 더 진실된 사회, 더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지 못한다. 그것은 단지 '상호 감시의 사회'를 만들 뿐이다. 한병철은 신뢰가 "오직 지와 무지의 중간 상태에서만 가능하다."(98p) 고 말한다. 우리가 이미 모든 걸 투명하게 보고 있다면 어떻게 신뢰라는 게 존재할 수 있을까? 그것은 신뢰가 아니라 판단일 것이다. 그러니까 신뢰는 결코 투명함으로부터 나오는 게 아니다. 그것은 투명하리라는 믿음에서 나온다.


"투명성을 부패와 정보의 자유라는 관점에서만 보는 사람은 그 영향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p.14). 


투명한 것이 옳은 것이고 그리하여 우리가 정말로 투명해져야 한다면 세상에서 개성은 사라질 것이다. 사람들은 더이상 자신의 독특함을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 독특한 소수는 평범한 다수에 의해 억압받고 제거될 것이기 때문이다. 똑같은 인간들만 존재하는 획일화된 사회,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하는 전체주의 사회, 그것이 바로 투명사회의 종착지다.


우리는 타자의 불투명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타자를 투명하게 만들려는 의도에는 다름에 대한 존중이 결여되어 있다. 거기엔 피아를 구분하려는 피비린내가 진동한다. 관동 대지진 당시 일본인들은 지나가는 사람에게 발음이 어려운 일본어를 시켜본 뒤 잘 못하면 조선인이라 판단해 무조건 살해했다(당시 일본인은 지진의 혼란을 틈타 조선인이 폭동을 저지른다는 루머를 퍼뜨렸다). 그들은 누가 일본인이고 누가 조선인인지, 


투명하게 알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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