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가 눈뜰 때 소설Y
이윤하 지음, 송경아 옮김 / 창비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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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황 호랑이 부족 열세 살 세빈은 존경하는 환 삼촌을 따라 우주군에 입대한다. 그녀의 꿈은 언젠가 환 삼촌처럼 선장이 되는 것. 그런데 생도가 되어 우주선에 탑승한 순간부터 불길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반역자로 기소되어 선장 직위를 박탈당한 환 삼촌의 흔적이 우주선에 깊게 배어있었기 때문이다.


소설이 배경으로 한 '천 개의 세계'는 이름과 어울리게 수많은 종족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간다. 주황 호랑이 부족 세빈은 그냥 부족신이 호랑이인 게 아니라 그들 자신이 정말로 호랑이다. 평소에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전투의 순간이 오면 거대한 호랑이로 변신해  앞발을 휘두른다. 어흥! 우주군은 이처럼 초자연적 특성을 지닌 자들로 가득하다. 고블린도 있고, 학도 있고, 우주 밖에서도 살 수 있는 천인이 있는가 하면, 꼬리가 아홉 개 달린 구미호도 있다.


한국 신화와 SF를 모두 '소프트'하게 섞어 넣은 소설이다. 소프트니까, 뭐, 그래, 소프트니까 이런 걸 기대하면 안 되겠지만, 그래도 과학적 설명이 필요한 부분을 '요술'로 얼버무리고, 요술은 말 그대로 프리패스가 되어 모든 걸 가능하게 하니까, '이게 어떻게 가능하지?'라는 의문에 '그러니까 요술이지'라고 넘어가는 것 같아 아쉽다. 세계관이 독특하게 느껴질 수는 있는데, 바닥에 딱 붙어 튼튼한 토대가 되지는 않는다. 책은 너무 짧고, 설명은 부족하다.


줄거리는 반역자로 기소된 환 삼촌과 세빈의 관계가 축을 이룬다. 세빈은 자신의 롤모델인 환 삼촌이 절대 우주군을 배반했을 리 없다고 믿는다. 그러나 생도가 되어 처음으로 탑승한 우주선이 적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곳곳에서 환 삼촌의 냄새가 느껴지자 세빈의 마음은 갈대처럼 흔들린다. 마침내 세빈은 이 침략이 환 삼촌의 계획이었다는 걸 알게 되고 그의 앞에 선다. 환의 요구는 대범했다. 주황 호랑이 부족을 위해 자신의 계획에 가담하라는 것. 세빈은 이 계획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까지는 듣지 못했다. 그 끝에 천 개의 세계에 대한 배신이 있을지, 우주를 이롭게 하는, 그러나 지금은 사람들이 결코 깨닫지 못하는 더 큰 그림이 있을지는 모른다.


부족이냐 국가냐. 누구의 이득을 위해 누구에게 충성할 것인가. 동아시아의 유교적 세계관에서 익숙히 충돌할 수 있는 딜레마다. 부족도 국가도 아닌 나의 꿈, 신념을 위한 제3의 길은 대개 존재하지 않는다. 동아시아에서 개인은 집단 안에 속해있을 때만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동양 SF 판타지가 성공할 수 있는 이유였다고 하면, 뭐 그렇다고 하자. <호랑이가 눈뜰 때>는 이 요소들이 매력적일 순 있어도 정교하게 엮인 소설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재료에서 나오는 진국이 아니라 맛과 향을 첨가한 간편식이다. 먹기는 편하지만, 맛은 좀... 이 책은 출판사 '창비'의 영어덜트 시리즈인데, 영어덜트가 청소년을 뜻하는 거라면 그 취지에 딱 맞는 소설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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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티 워크 - 비윤리적이고 불결한 노동은 누구에게 어떻게 전가되는가
이얼 프레스 지음, 오윤성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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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티 워크는 사회 구성원들이 자신의 손으로 해결하고 싶지 않아 다른 사람에게 위임하는 필수 노동을 일컫는 말이다. 단어가 드러내듯 일하는 환경 자체가 물리적으로 불결한 노동을 뜻하기도 하지만 일하는 과정에서 도덕적, 감정적, 심지어 신체적 부상을 입을 확률이 높은 일도 포함된다.


<더티 워크>는 그 직종을 크게 4개로 꼽아 밀착 취재한다. 첫째는 교도관, 둘째는 미군의 드론 조종사, 셋째는 도살장 노동자, 넷째는 석유시추선의 일꾼이다. 한국 독자라면 이 4개를 모두 듣고 났을 때 다소 어리둥절한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우선은 교도관. 군부 독재 시절에는 교도소가 부정한 권력을 유지하는 중요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교도관을 부역자로 보는 시선도 있었을 것이다. 일례로 나는 그 어떤 미디어에서도 교도관이 좋게 그려진 걸 본 적이 없다. <1987>의 유해진 정도가 기억나는데 이것도 사실은 그 악독한 형무소에도 이렇게 옳은 신념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는, 역설적 반증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현재 대한민국에서 교도관이라는 직업은 남자 기준 6.8 대 1, 여자 기준 11.6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쟁취하는 공무직이다. 미국처럼 가난한 동네에서 태어나 직업 선택권이 거의 주어지지 않는 환경에서 어쩔 수 없이 뛰어드는 삶의 현장이 아닌 것이다.


드론 조종사의 경우 한국군은 이제 막 육성을 시작했다. 아마 이 직군이 완전히 궤도에 오른 뒤에도 미국처럼 다른 나라의 영공을 날아다니며 요인을 암살하고 마을을 폭격해 민간인을 학살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한국군은 베트남전을 제외하면 다른 나라를 침범해 공격한 적이 없고, 대부분의 성인 남성이 병역 의무를 지기 때문에 더티 워크의 필수 조건인 '위임'을 충족하지 않는다.


석유시추선 노동자는 말할 것도 없다. 한국에서 석유가 났다면 해당 노동자들은 더티 워커가 아니라 영웅이 됐을 것이다. 도살장 노동자에 대해서만 어느 정도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데, 곰곰이 따져보면 그렇지도 않다. 하림 닭고기 공장에 다니는 생산직 노동자를 떠올려보자. 깨끗한 최첨단 가공 시설에서 위생복을 입고 땀 흘려 일하는 평범한 직장인들. EBS의 <극한직업>에 나올 수는 있어도 대기업 생산직을 사회적으로 멸시받는 일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소고기 도살장으로 가도 비슷하다. 쇠사슬 장갑을 끼고 고기를 잘라내는 정형사는 심지어 꽤 높은 소득을 얻는 전문직 아닌가!?


그래서 이 책은 잘 와닿지가 않는다. 더티 워크가 성립하고 유지되는 사회적 메커니즘을 밝혀내고,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기보다는 노동자들이 겪는 도덕적 딜레마, 감정적 상처, 정신적 트라우마를 다루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을 의미 있게 읽기 위해선 책이 제시한 4개의 직군을 대체할 수 있는 대한민국의 더티 워커를 찾아 대입해야 한다.


찾는 조건은 간단하다. 첫째, 이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만 나는 하기 싫어야 한다. 둘째, 나는 그 노동으로 인해 상당한 혜택을 받고 있다. 셋째, 그 일을 생각하면 불평등, 차별, 사회적 무시가 떠올라 마음 한편이 불편해지거나 죄책감이 일어난다.


생각만 해도 죄책감이 드는데, 그 일이 계속 유지되는 이유는 나 하나가 행동을 바꾼다고 세상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무력감 때문이다. 그러니 할 수 있는 일은 더티 워커를 마주칠 때 상냥하게 인사를 건네거나, 더운 여름날 차가운 아메리카노 한 잔을 대접하는 정도일 뿐. 이런 행위가 개개인의 심리적 부담을 덜어줄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분들이 처한 환경 자체를 더 높은 수준으로 이끌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더티 워크의 핵심 특징이 '선량한 사람들'의 암묵적 동의에 기초한 노동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이 결과에 만족하기에 이 문제를 깊이 따지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p.457)


하지만 이 동의가 영원한 것은 아니다. 실제 인류의 역사는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라 여겨졌던 것들이 너무나 쉽게 무너지면서 열리는 길을 따라 대범한 걸음을 내디뎌왔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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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자는 죽어야 한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5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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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순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어리석은 자는 죽어야 한다. 더 이상 보탤 말이 필요 없는 완벽한 문장이다.


하라 료라는 작가는 처음인데 하드보일드 탐정 소설계에서 유명한 사람인 것 같다. 사진을 보니 콧수염이 멋있다. 작가의 얼굴을 봤기 때문인지 시리즈의 주인공 사와자키의 말과 행동에서 저절로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남의 시선 따윈 상관없고, 속세에도 큰 관심이 없지만, 자기 일에 확실한 원칙이 있고 고집스럽다. 사무실엔 이미 죽은 파트너의 간판이 여전히 달려 있다. 페인트 칠은 다 벗겨졌다. 타고 다니는 자동차는 굴러가는 게 신기할 정도로 낡은 블루버드. 그럼에도 궁색해 보이지 않는 멋쟁이가 바로 사와자키란 탐정이다. 그에게서 하라 료의 모습이 떠오르는 건 그저 착각일까?


배경은 버블경제가 무너진 후로 보이나 세계를 거의 한 손에 쥐고 흔들었던 일본인의 자신감이 여전히 캐릭터에 남아있다. 사람들은 어딘가 모르게 여유 있고, 종종 연극적 허세까지 보인다. 별것도 아닌 말에 '나루호도'라고 읊조리며 쓸데없이 무게를 더하는 일본 드라마 같은 분위기라든가, 적들이 코 앞에 다가올 때까지 낮잠을 자다 문득 하품과 함께 기지개를 켜며 그들을 초토화시키는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이라든가, 꼭꼭 숨기는커녕 굳이 굳이 수사 기관을 맴돌며 단서를 남기고 수다를 떠는 자의식 과잉의 만화 속 범죄자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뭔가가 문장 곳곳에 배어있다. 이런 도드라짐이 종종 몰입을 방해하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제일 아쉬운 점은 악인의 실체가 그리 대단치 않다는 점이다. 전말이 밝혀지고 나면 정말로 이자가 사건을 이토록 복잡하게 꼬을 수 있을 만큼 능력과 권력을 가진 사람인가 하는 의심이 든다. 아무리 사람의 약점을 잡고 쥐어짠다 한들 내 수족처럼 부리며 여러 사람을 죽이는 게 가능한 일일까? 이 공백을 단단하게 메워줄 캐릭터들의 동기, 심리 묘사, 관계가 부족하다 보니 이야기는 설득력을 잃고 머쓱한 장면을 연출한다. 독자는 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주춤댈 수밖에 없다.


그래도 탐정 사와자키의 개성만큼은 확실히 독보적이다. 이야기는 전반적으로 짜임새가 있고 시원시원하다. 트릭과 추리에 집중하기보다는 캐릭터와 구성에 더 초점을 맞추는 작품이다. 그 힘이 이야기에 재미를 싣고 달리게 한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해 고민 없이 덮을 수 있다.


한 가지 더. 레이먼드 챈들러의 팬이라면 하라 료에게도 한 번쯤 기회를 주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누가 '필립 말로'의 팬 아니랄까 봐 사와자키에게도 그의 냄새가 느껴진다. 다다미 방 위에 앉아 호지차를 마시는 말로를 보는 것처럼 이질감이 없는 건 아니지만, 묘하게 섞인 색채가 오히려 신비로운 매력을 풍긴다.


어리석은 자는 죽어야 하고 재미없는 소설은 태워야 한다. 필립 말로와 사와자키는 소설 속에서 살아남았고, 소설 밖에서 화형을 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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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중독 - 먹고 싶어서 먹는다는 착각
마이클 모스 지음, 연아람 옮김 / 민음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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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음식을 절제하지 못한다. 다른 생활 습관에 있어선 보통 사람들보다 상당히 통제된 삶을 수십 년째 이어오고 있음에도 말이다.


음식에는 뭔가 기묘한 점이 있다. 위는 완전히 부풀어 더 먹을 수 없다는 신호를 끊임없이 보냄에도 뇌는 간단히 그 호소를 무시한 채 꾸역꾸역 음식을 욱여넣도록 지시한다. 대악마 루시퍼가 대주주로 있는(영화 <콘스탄틴>에 따르면) 담배 회사 필립모리스의 대표는 중독을 '그만두기 힘든 반복적 행동'이라고 정의했다. 정말 탁월한 표현이다.


그렇다. 중독은 그만두기 힘든 반복적 행동과 다름 아니다. 유튜브를 그만 보기 힘든가? 인스타그램을 끊기 어려운가? 중독이다. 중독을 이렇게 광범위하게 정의했을 때 따르는 부작용도 당연히 있겠지만 그런 건 그냥 학술의 영역으로 남겨두자. 우리의 반복적 행동이 일상행활을 힘들게 하고 건강을 해친다면, 중독보다 더 무서운 말로 정의를 해서라도 관리할 필요성이 있다.


그래도 먹기와 같은 생명 유지의 필수 행위를 '중독'으로 규정하는 것은 여전히 거북할 수도 있다. 음식을 먹을 때 활성화되는 뇌의 영역이 코카인을 흡입했을 때와 완전히 같다는 것을 알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까? 뇌는 몸속에 들어온 게 초콜릿인지 마약인지 구분하지 않는다. 뇌는 그저 '기분 좋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느끼고 더 많이 달라는 신호를 보낼 뿐이다.


<음식 중독>은 이 모든 것이 진화의 결과라고 말한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인간은 먹는 걸 싫어하려야 싫어할 수가 없다. 그것이 생명 유지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그럼 어떤 음식을 좋아하게 될까? 저자는 속도가 관건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섬유질이 많이 포함된 통곡물보다 백미가 더 해로운 이유, 혹은 그 어떤 음식들보다 액상과당이 치명적인 이유를 설명한다. 이들은 몸속에서 쉽게 분해되어 급격히 혈당을 올리기 때문에 뇌에 만족감을 전달하는 속도가 대단히 빠르다. 운동보다 먹는 게 더 좋은 이유도 마찬가지다. 러너스 하이에 도달하려면 반드시 힘들어 죽을 것 같은 단계를 지나야 한다. 반대로 후덥지근한 여름날 샤워를 마치고 차갑게 식힌 맥주를 한 모금 마신다면? 인간이 어떤 행동을 더 많이 한다면, 그 행동은 우리의 기분을 더 쉽고 빠르게 좋아지게 할 확률이 높다.


뇌는 영양보다는 열량을 더 중요하게 바라보도록 진화했다. 고열량을 쉽게 얻을 수 있다면 먹이를 찾아 헤매는 시간을 단축할 수 있어 여가가 생긴다. 인간은 남는 시간에 미래를 설계하고, 도구를 만들고, 종족을 번식시킨다. 시간이 많을수록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뇌가 이렇게 진화했음에도 과거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이유는, 오늘날처럼 쉽게 열량을 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야생의 과일은 마트에서 파는 것들에 비해 달지 않았고 사냥은  성공하는 게 아닐뿐더러 에너지가 대단히 소모되는 일이었다. 현대 사회에는 고열량의 값싼 음식이 지천에 널려있다. 뇌가 만족감을 얻는 속도는 비단 혈당의 문제가 아니라 그 음식을 얼마나 쉽고 싸게 구할 수 있느냐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재료를 직접 사와 오랜 시간 요리를 한 뒤 근사한 저녁 밥상을 차리는 건, 브이로그를 찍고 뿌듯함을 느끼는 데는 유리할 수 있지만 원초적 만족감을 제공하는 데에 있어선 느려터진 굼벵이와 같다.


설탕을 끊고, 지방을 줄이고, 통곡물만을 섭취하며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는 게 그토록 어려웠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어떤 이는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는 어른이, 고작 음식을 참지 못하는 게 이해가 가지 않을 수 있다. 인간 진화의 역사는 이처럼 대단한 인내심을 발휘하는 게 '비정상'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소름 돋는 건 이 놀라운 연구의 선구자들이 수 천명의 화학자, 공학자, 심리학자, 뇌과학자, 마케터, 변호사 군단으로 이뤄진 식품 산업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식품 산업이 인간 진화의 허점을 이용하여 만들어낸 가공식품들을 역추적해 그 윤곽을 어렴풋이 밝혀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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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각자의 세계가 된다 - 뇌과학과 신경과학이 밝혀낸 생후배선의 비밀
데이비드 이글먼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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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뇌만큼 신비한 기관이 또 있을까? 완전히 미지에 가려 보이지 않던 뇌의 비밀이 하나씩 밝혀지면서 막연했던 신비가 이제 무한한 경이로 뒤바뀌고 있다. 물질의 관점에서 봤을 때 뇌는 고작 1.5kg에 불과한, 그것도 대부분이 물과 소량의 단백질로 이뤄진 분홍색 살덩이일 뿐이다. 그러나 그 안에 '세계'가 존재한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계절이 바뀌는 이 행성처럼, 뇌는 평생 보고 듣고 맡고 느끼는 경험의 강물을 따라 우주를 구성한다.


최신 뇌과학 연구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역시 신경가소성과 생후배선의 원리일 것이다. 나이 든 어른들이 흔히 하는 '머리가 굳었다'는 표현은 일견 맞기도, 또 틀리기도 하다. 우리가 새로운 것을 배울 때 뇌로 전기 신호를 보내는 신경 통로가 형성되는데 이 행위가 반복될수록 신경은 강화되어 더 많은 정보를 빠르게 전달한다. 이른바 '숙련'이라 부르는 상태가 바로 이것이다.


어린이들이 무엇을 해도 척척 쉽게 배우는 이유는 그들의 뇌가 아직 '미숙'하기 때문이다. 아직 굳지 않은 신경은 새로운 자극이 들어오는 족족 뇌로 향하는 특급 선로를 깔아버린다. 마냥 부러워할 일이 아니다. 뇌가 평생 이 상태를 유지한다면 우리는 그 무엇 하나도 '제대로'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


숙련과 미숙은 끊임없이 자리를 주고받으며 우리의 인생을 만들어간다. 영원한 숙련도 영원한 미숙도 없다. 반복은 숙련을 만들지만 관심을 끄고 오래 방치하면 선로는 끊긴다. 뇌는 그 자리를 다른 감각에 내어준다. 우리 뇌는 유한한 자원을 두고 벌이는 감각의 전쟁터다. 숙련된 뇌 속에선 이 전쟁이 잦아들어 대체로 평온한 일상이 유지되지만 새로운 정보와 자극을 찾아내면 다시 한번 전쟁이 벌어진다.


심지어 특정 감각을 처리하는 부위가 사라지거나 아예 특정 감각 자체가 사라진 경우에도 뇌는 변화해 적응한다. 우리는 흔히 좌뇌와 우뇌가 서로의 반대쪽 신체를 조종하고 있으며 각각 우위를 보이는 분야도 다르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좌뇌형은 논리에 강하고 우뇌형은 직관에 강하다는 이론처럼 말이다. 이는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그러나 아주 어렸을 때 좌뇌와 우뇌로 흘러들어 가는 신경 다발을 서로 바꿔주면 완전히 반대의 결과가 나타난다. 심지어 뇌 반쪽이 없어진 사람도 남은 반쪽에서 업무를 넘겨받아 일상생활이 가능해진다.


청각이나 시각 등 특정 감각 자체를 잃은 사람의 뇌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일어난다. 시각장애인들이 점자를 읽을 때 원래 시각 정보를 처리하던 후두엽이 활성화되는데, 이는 촉각이 해당 영역을 점령하여 발생하는 현상이다. 청각을 잃은 사람이 사람의 입술만 보고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챌 수 있는 이유는 청각을 담당하던 영역을 시각이 차지해 시각의 정보 처리 능력이 상승하기 때문이다. 감각이 사라져 더 이상 필요 없어진 뇌의 영역은 곧장 다른 감각이 차지해 해상력을 높인다. 이처럼 뇌는 애초에 정해진 것 없이 생후배선의 원리에 따라 자신의 능력과 역할을 정의한다.


아마도 뇌가 이렇게 동작하는 탓에 생명체의 진화가 가능했던 것 같다. 먼 옛날 인류의 손에 다섯 개의 손가락이 아닌 지느러미가 달렸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다 불현듯 돌연변이가 나타나 10개의 손가락을 가진 인간이 태어난다. 뇌가 애초에 지느러미만을 조종할 수 있도록 미리 프로그래밍된 기관이었다면 이 10개의 손가락은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길쭉하고 아름다운 손가락을 가진 인간은 네일아트가 성행하는 21세기를 보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뇌는 손가락이라는 새로운 신체가 보내는 신호를 해석하며 새로운 패턴을 찾아내고 예전에는 통으로 들어오던 감각을 다섯 개의 독립된 신호로 인지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손가락을 움직이는 법을 터득하고 그게 새로운 환경에 더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면 자연선택에 따라 진화의 바퀴가 굴러간다.


우리는 대체로 나와 이 세상이 따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생후배선의 원리에 따르면 외부 환경 그 자체가 우리를 정의하는 조건이 된다. 세계가 곧 우리이고 우리가 곧 세계인 것이다. 유대민족의 토속 신앙은 신이 자신의 형상을 본떠 인간을 만들었다고 한다. 내 생각에 신은 우리 세계를 구체적인 인격으로 형상화한 메타포가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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