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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의 야간열차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8
다와다 요코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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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의 야간열차>는 매우 특이한 소설이다. 여지껏 한번도 읽어본 적 없는 종류의 책이다. 모든 소설은 삼인칭 혹은 일인칭으로 이야기를 전개하지만 야간 열차 안에서 주인공은 바로 우리가 된다. 이 소설은 이인칭, 즉 당신을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날 오후부터 밤까지 당신은 함부르크 역 근처에 있는 작은 홀에서 춤을 추었다(p.9).


조용히 책상 앞에 앉아 남의 사생활을(소설을 읽는다는 건 기본적으로 관음증을 전제한다) 훔쳐보려던 당신은 느닷없이 함부르크의 댄스홀로 소환당한다. 관객이 아닌 행위 주체로서 이 여행에 참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소설은 여행을 한다는 것, 즉 누추한 일상을 벗어던지고 마음에 낀 생활의 때를 벗기고자 하는 그 당연한 판타지를 충족시키지 않는다. 야간 열차는 도처에 숨어 있는 암초를 만나 깨지고 뒤틀리고 멈춰 선다. 여행을 지배하는 건 설렘이 아니라 낯설음이다. 낯설음은 자극과 흥분 말고 불안과 걱정을 낳는다. 덜커덩 거리는 열차의 소음과 진동이 심장을 자극한다. 불안은 더 증폭된다.


야간 열차에서의 여행은 우리가 꿈꾸는 그런 판타지가 아니다. 여행은 인생에 대한 일종의 메타포처럼 느껴진다. 깨지고 뒤틀리고 좌절하는 우리의 인생. 지름길을 찾아 고군분투하지만 결국엔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되고 마는. 이 지점에서 나는 우리가 인생에 대해 갖고 있는 고정 관념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깨닫는다. 예컨대,


삶에 목적이 있다는 게 가당한 얘기일까?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 질문이 얼마나 황당한지를 알 수 있다. 나는 어딘가에 도착하기 위해서 혹은 무언가를 달성하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다. 존재는 그처럼 가볍지 않다. 존재가 있고 목적이 있는 거지 목적에 따라 존재가 생기는 게 아니다. 그래서 깨지고 뒤틀리고 멈춰서는 이 여행을 실패한 여행, 혹은 망가진 여행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관점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가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계획이 엉성하거나 바보같거나 멍청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목적지라는 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평생 여행자로 살아간다. 여행은 목적지로 다시 달려가기 전에 잠시 휴식을 취하는 막간의 행위가 아니다. 인생이 곧 여행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는 모든 실패, 모든 좌절, 모든 성공, 모든 웃음, 모든 슬픔, 모든 눈물, 모든 환희는 그 자체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정해진 목표를 기준으로 달성 완료, 미완료로 구분될 수 없다. 모든 사건은 인생의 중요한 변곡점이다.


그래서 열차의 지연, 잘못된 기차에 타는 것, 짐을 잃어버리는 것 등등은 인생이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는다. 파리행 열차가 파업으로 브뤼셀 역까지 밖에 가지 않았다면 우리의 삶은 미완료 된 게 아니다. 브뤼셀에서 새롭게 탄생하는 것이다.


저자 다와다 요코는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데 있어서 천재적인 것 같다. <용의자의 야간열차>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에피소드가 열세 개나 묶여 있다. 흥미진진한 여행기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고 대단한 미스테리나 스릴러를 암시하는 듯한 제목도 터무니 없는 기대였다는 게 금방 드러나지만, 소설은 마치 정해진 곳 없이 부유하는 유령 열차를 탄 것처럼 흡입력 있는 현장감을 전달한다. 내가 왜 이렇게 지루한 얘기를 읽고 있을까? 생각하는 순간 당신은 어느새 야간 열차의 침실칸에 누워 소설이 뿜어대는 불안과 신비를 온 몸으로 체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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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피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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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었다. 압도적 이야기가 600페이지에 걸쳐 휘달린다. 양복이 아닌 츄리닝을 입은 지리멸렬한 건달들의 이야기다. 산뜻한 두뇌 싸움이나 깔끔한 결투는 없다. 그저 회칼을 들고 우르르 달려가 적의 배를 가르고 다시 우르르 몰려온 적에 의해 내 배가 갈린다. 운이 없으면 외딴 섬의 양식장에 끌려가 사료 분쇄기에 온 몸이 빨려들어간다. <뜨거운 피>다.


희수는 구암의 이인자다. 동네의 상징인 만리장의 지배인이다. 그곳의 주인은 일제 시대 때부터 구암을 다져온 집안의 3대, 손영감이다. 희수는 손영감 밑에서 온갖 궂은 일을 하며 수십년을 보냈다. 그러나 손에 쥔 것은 지독한 담배 냄새가 밴 만리장의 특실 뿐이다.


손영감은 빠꼼이에 쫄보라 남들처럼 무기나 술을 밀매하지 않는다. 그는 중국산 고추가루나 참기름을 밀수해 국산과 섞어 판다. 구암에서 건달은 삽을 들고 고추가루를 섞는다. 매캐한 가루가 끓어오르는 땀에 들러 붙어 찌릿 찌릿 온 몸을 쑤신다. 희수는 가죽 채 그 짜증을 벗어 던지고 싶다.


그러나 희수는 손영감을 떠나지 못한다. 궁시렁 궁시렁 말 끝마다 토를 달고 불평을 하고 쾅 문을 닫고 나가긴 하지만 그렇게 나가 영영 떠나는 법은 없다. 본래 분노와 불평은 관계의 끝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그 끝은 언제나 침묵이다. 희수는 다시 돌아오고 돌아오고 돌아오길 반복한다. 아니 애초에 떠난 적이 없는 걸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애증의 관계다. 자식이 없는 손영감과 아버지가 없는 희수는 유사 부자 관계를 형성한다.


이 유사 부자 관계에 균열을 내는 것은 진짜 핏줄의 존재다. 도다리. 도다리는 손영감의 조카다. 도다리는 계집질과 술 쳐먹기 똥폼재기를 제외하면 할 줄 아는 게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이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쓰레기에게 손영감의 모든 것이 돌아갈 것이다. 희수는 이전에 만리장의 지배인을 했던 양동이 독립할 때 손영감에게 무엇을 받았는지 안다. 희수도 결국 남이다. 핥고 뛰고 난리를 쳐봐야 귀여운 개새끼일 뿐이다. 개새끼가 아무리 귀여워도 주인집 상 위에 올라 그 집 아들과 함께 밥을 먹을 수는 없는 일이다. 개새끼는 결국 늙고 병들어 내쫓길 것이다. 뼈다귀 하나 챙기지 못한 채, 그야말로 개털이 되는 것이다.


이런 희수의 마음에 불을 지르는 말이 있다.


영감님에 대한 의리? 동생들에 대한 걱정? 사람들이 너에 대해서 하는 평판? 좆까지 마라. 인간이라는 게 그렇게 훌륭하지 않다. 별로 훌륭하지 않은 게 훌륭하게 살려니까 인생이 이리 고달픈 거다. (중략) 니는 똥폼도 잡고 손에 떡도 쥐고 싶은 모양인데 세상에 그런 일은 없다. (중략) 세상은 멋있는 놈이 이기는 게 아니고 씨발놈이 이기는 거다(305p).


희수는 씨발놈이 되기 싫고 두 손 가득 떡도 쥐고 싶다. 그러나 아무리 골몰해 봐도 그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생각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희수의 갈등 사이로 거대한 음모가 비집고 들어온다. 음모는 희수의 갈등에 풀무질을 하고 뜨겁게 데운 뒤 죽어라 내리친다. 그 망치질에 희수는 소중한 모든 것을 잃고 자신의 목숨마저 뺏길 뻔 한다.


이제 살아남은 희수의 선택은 무엇이 될 것인가? 죽느냐 사느냐는 사실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다. 살아서 씨발놈이 되느냐, 사랑하는 모든 것과 함께 죽을 것이냐, 사실은 이게 어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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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의 생각은 어떻게 상식이 되었나
로베르트 미지크 지음, 오공훈 옮김 / 그러나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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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의 기원은 178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랑스 대혁명, 왕의 백성이던 신민이 주체적 시민으로 거듭난 사건. 그러나 절대왕정의 붕괴와 함께 현실의 권력이 고스란히 시민에게 이관된 것은 아니었다. 귀족들은 여전히 땅과 성과 돈을 갖고 있었다. 국민공회는 자연스럽게 두 개의 파벌로 나뉘었다. 귀족의 이해를 대변하는 왕당파와 부르주아의 이해를 대변하는 공화파(이 역사의 아이러니를 보라. 오늘날 보수의 핵심 집단인 부르주아가 당시엔 진보의 최전선에 서 있었다.)가 그것이다. 이 때 공화파들은 좌측에 섰고 왕당파는 우측에 섰다. 이것이 바로 좌파와 우파의 탄생이다.


또 하나의 설은 이렇다. 1792년 국민공회는 드디어 루이 16세의 목을 단두대의 칼날로 싹둑 잘라낸 뒤 왕당파를 축출한다. 그러나 공회는 또 다시 두 파로 갈라진다. 좀 더 급진적이며 대중의 이해를 대변하는 자코뱅파와 보수적이며 부르주아를 대표하는 지롱드파가 그것이다. 이 때 자코뱅파는 좌측에, 지롱드파는 우측에 섰다.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진보-보수의 대립이 여기서부터 기원한 것이다.


18세기에 시작한 좌-우의 대립은 21세기가 지나도록 현재진행형이다. 물론 세상이 언제나 제자리 걸음만을 해왔던 것은 아니다. 일부 비관론자들은 상위 계층에 집중된 부와 이를 조장하는 정부 정책, 그 정책을 지지하는 보수당의 장기 집권을 예로 들며 역사의 진보를 애써 외면하려 하지만 딱 100년 전으로만 돌아가도 이 세상이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 알 수 있다. 그 때는 차마 웃지 못할 모순이 많이 있었다. 예컨대 시민의 참정권과 자유를 맹렬히 부르짖는 열혈 진보주의자가 흑인과 여성의 참정권에 대해선 몸소리를 칠 정도로 거부했던 것 말이다. 당시의 진보주의자들은 흑인과 여성을 백인 남성과 동일한 존재로 취급하지 않았다. 시민권은 인간에게만 주어질 수 있으므로 인간이 아닌 그들에겐 숭고한 권리를 부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이러한 생각은 극우파의 극우파의 극우파의 할아버지가 온대도 쉽게 가질 수 없는 생각이다(가끔은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기도 하지만).


좌파의 주장은 시간이 흐를수록 본래의 영역이었던 정치를 떠나 경제, 사회, 문화에로까지 스며들었다. 그들의 생각은 세상 온갖 곳에 고인 부패와 불평등과 차별, 소외와 폭력에 맞서 싸운다. 오늘날 좌파라 불리는 사람들은 정치, 경제 영역에선 신자유주의와 전쟁을 벌이고 사회, 문화계에선 여성과 약자를 억압하는 보이지 않는 권력과 결투를 벌이며 국제 사회에선 인종차별, 전쟁과의 끝장전을 벌이고 있다. 이렇게 전쟁을 벌이는 일부 전사들 사이에선 전투를 어렵게 하는 가장 큰 방해물이 대중의 무지와 그에 따른 무관심이라는 말도 나온다. 하지만 이는 눈 앞의 적만을 너무 가까이 해온 탓에 자기 등 뒤에 서 있는 지지자들의 마음을 충분히 관찰하지 못한 탓이다. 대중이 이러한 일들에 무관심한 이유는 무지해서가 아니라 수백 년간의 투쟁으로 쟁취한 오늘의 사회가 이제는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 됐기 때문이다. 그들은 묻는다. "아직도 그런 일이 있어요?", "요즘 세상에 누가 그런 짓을?" 상식이란 세상 사람 모두가 의심의 여지 없이 받아들이는 공통 의식이다. 대중은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 생각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늘 멍한 표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좌파의 생각은 어떻게 상식이 되는가>는, 이처럼 시민 의식의 함양 과정을 역사적, 철학적으로 밝히는 책처럼 생각되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다(사실 이 책의 원제는 <나는 좌파인가>이다). 서론에서만 아주 잠깐 언급할 뿐이다. 이 책은 기승전결을 갖춘 하나의 논문이라기 보다는 한 칼럼니스트의 철학 에세이에 가깝다. 마르크스에서 그람시, 사르트르를 거쳐 푸코까지 넓은 의미에서 좌파로 구분할 수 있는(반항아들)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부분적인 철학 상식을 깨우치긴 좋으나 사고의 지평이 파괴되는 경험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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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의 방정식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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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미야베 미유키다. 130페이지 밖에 되지 않는 별 볼 일 없는 이야기를 알차게 눌러 담았다. 음, 이런 이야기를 써볼까? 하며 기지개를 한 번 켜고 쓱쓱 내려간 지 두 시간 만에 한 권이 뚝딱 나온 것 같은 기분이다. 대화가가 쓱쓱 그려낸 일러스트 같달까?


사실 이 책이 엄청난 미스테리를 다루는 건 아니다. 살인범이 나오지 않고 당연히 살인도 일어나지 않는다. 학교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그 흔한 이지메나 자살을 다루지도 않는다. <음의 방정식>은 미야베 미유키가 다시 한 번 그리는 '위증'에 대한 소설이다.


시작은 도쿄의 어느 사립 학교, 중학교 3학년 교실이다. 그들은 동일본 대지진 후 학교에서 중3을 대상으로 시작한 '피난소 생활 체험 캠프'에 참석 중이었다. 체험 내용은 단순하다. 대규모 자연 재해가 발생했을 때의 피난소를 가정해 교실에서 침낭을 깔고 하룻밤을 보내는 것이다. 사건은 D반의 남학생 일곱 명이 모여 있는 3층 교실에 그 반의 담임인 히노 다케시가 들이 닥치며 시작된다.


히노 다케시는 다소 딱딱한 면은 있지만 자신이 지도하는 동아리를 전국 대회에 입상시키는 등 열정적인 교사로 알려져 있다.  거침없는 열정엔 언제나 반대 급부가 따르는 법이라 그것을 불쾌해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한편엔 그것을 상쇄하고 남을 만큼의 골수 지지자들이 존재한다. 이 히노 다케시가 소등 후 밤 열한 시 쯤 D반 남학생이 모여 있는 교실로 순찰을 왔다. 일곱 명 모두 아직 잠은 자지 않았고 각자 스마트폰을 만지작 거리거나 음악을 듣거나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선생이 말했다.


어차피 이 시간에 잘리는 없을테니 과제를 하나 내겠다. 실제로 재해가 일어나면 피난소는 이렇게 태평하지 않아. 물자는 부족하고 시간이 갈수록 악화되지. 그러니까 이렇게 가정해보자. 너희는 완전히 고립됐고 보급은 끊어졌다. 구조는 언제 올지 몰라. 일곱명 모두가 살아남을 수는 없다. 최소한 한 명은 희생되어야 해. 자, 너희는 누구를 선택하겠나? 농담이 아니야. 진지하게 생각해 봐라. 살아남을 여섯과 죽어줄 한 명을 결정하는 거지. 제한 시간은 한 시간.


그러나 이 도전적 질문은 끝내 답을 듣지 못한 채 마무리 된다. 남학생 하나가 한 밤중에 교실을 뛰쳐나가 집으로 돌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사정이 밝혀지자 학교 측이 새파랗게 질렸다. 히노 선생의 언동은 농담이라고 하기엔 도가 지나쳤고 진지한 의도였다면 더더욱 나빴다. 감수성이 풍부한 중3 아이들에게 누구를 죽이고 누구를 살릴 것인지 묻다니. 아이들은 과연 누구를 죽어 마땅한 아이로 지목했을까? 성적이 나쁜 아이? 뚱뚱한 아이? 아니면 평소에 따돌림을 당하던 아이? 교실을 뛰쳐나간 그 아이에겐 분명 한 밤의 토론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이야기는 히노 다케시가 떠나고 난 뒤의 D반 교실을 조명할 수도 있었지만 작가는 그 끝을 쭉 잡아 당겨 새로운 지점에 이어 붙인다.


히노 다케시 선생이 남학생들이 밝힌 일련의 사태를 모조리 부인한 것이다.


이제 이야기는 양쪽의 주장에 코를 바싹 댄 채 위증의 냄새를 맡아 나간다. 누가 거짓말을 하는 걸까? 인기가 많지만 그만큼 적도 많은 히노 선생일까? 아니면 순진한 중학생들일까? 히노 선생은 그 일로 학교에서 쫓겨난다. 과연 중학생들이 완전한 거짓말을 공모하여 자신의 담임 선생을 궁지로 모는 게 가능한 일일까? 히노 다케시의 변호를 맡은 후지노가 말한다.


의지가 강한 리더와 공통된 목적이 있다면 어른들이 기겁할 만한 일도 거뜬히 해치우는 게 그 또래 아이들이에요. 중학교 3학년이라고 절대 만만하게 봐선 안돼요(p. 31).


책장을 덮은 뒤 한 걸음 떨어져 생각해 보면 뭐 별 일도 아닌 얘기를 진지하게 잘도 써놨네 라는 생각이 들지만 막상 읽는 동안에는 이런 점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사건의 진상을 듣고 싶은 마음에 온전히 책 속으로 빠져들고 만다. 도대체 얼마나 글을 써야 이 정도 경지에 오르는 걸까? 역시 미야베 미유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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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카트 멘쉬크 그림 / 문학사상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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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나'는 평범한 주부다. 꽤 잘나가는 치과 의사 남편과 예쁜 아들이 있다. 아침에 둘을 보내고 나면 폐차 직전의 오래된 차를 끌고 나가 쇼핑을 하기도, 수영을 하기도 한다. 삶은 평화롭다 못해 단조롭다. 그런데 어느날 그 평화와 단조로움 속에서 뭔가가 아지랑이처럼 피어 오르는 걸 발견한다. 대수롭지 않아 보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안과 공포를 자아내는 성가신 움직임. 그 움직임을 자각한 순간 문득 한 의문이 찾아든다. 나는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고 있었던 걸까? 내가 삶을 이끌어 나가는 게 아니라 어쩐지 삶에 내가 끼워 맞춰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커지는 불안과 공포. 그렇게 불면의 밤이 시작된다.


'나'는 십칠일 째 잠에 들지 못한다. 불면이라고는 하지만 고통스러운 건 아니었다. 오히려 정신이 맑아지고 더 생산적이 된 것이다. 일상에 묻혀 새카맣게 썩어가던 자아를 마주한 이후 그녀의 마음 속엔 두 번 다시 감지 않을 어떤 눈이 번뜩 떠졌다. 쉴새 없이 정신으로 쏟아지는 자각의 향연. 이제 나는 평화롭기만 한줄 알았던 일상에 숨은 오물들을 발견해 나간다. 이런 상황을 알지도 못한 채 남편은 고요히 잠들어 있다. 성실과 선함이 가면을 벗고 무심함을 드러낸다. 일어나 아들의 방에 들어간다. 사랑하는 내 아이에게서 미지의 불쾌함이 뿜어져 나온다. '나'는 가만히 서서 그 불쾌함에 대해 곰곰 생각해 본다. 그것은 남편과 아이를 이어주는 저주 받은 피의 흔적이다. 아들과 남편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서로 닮아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정녕 내가 사랑하고 지켜온 것들인가. 나는 이제 무엇과 함께, 무엇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나는 결코 잠에 들 수 없다. 잠들지 못하는 게 아니라.


하루키가 이 소설을 쓴 건 1989년 봄의 일이었다. 당시 그는 <노르웨이의 숲>과 <댄스 댄스 댄스>라는 두 편의 장편 소설이 유례없이 큰 성공을 거둬 전업 작가로 뛰어든 상태였다. 하루 종일 위스키 바를 운영한 뒤 밤늦게 부엌에 앉아 소설을 쓰던 때는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다. 모든 것이 순조롭다. 은행 잔고엔 터질듯이 많은 0이 새겨져 있다. 세상은 하루키 신드롬에 빠져 있다.


그러나 이 지나칠 정도로 많은 부와 영광이 작가로서의 하루키가 가져왔던 타이트한 긴장을 느슨하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취미로 소설을 쓰던 시절과는 다르게 이래저래 신경 쓸 일이 많아졌다. 커지는 인기와 더불어 쓴소리도 늘어난다. 저주에 가까운 평을 듣다보면 아무리 신경 쓰지 않으려해도 뒷골이 땡기고 심장이 두근거린다. 똑같은 저주를 퍼붓지 않고는 온 몸이 찢어져 죽어버릴 것만 같다. 시간이 흘러 분노와 흥분은 가라앉지만 마음 속엔 지워지지 않는 찌꺼기가 남게 된다. 이상한 회의와 불안도 찾아온다. 내 성공은 과연 나에게 합당한 것인가. 작가로서의 미래, 개인으로서의 내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나는 계속 소설을 쓸 수 있을까? 세상은 변함없이 똑같이 서 있는데 어쩐지 나만이 전혀 다른 세상에 내쳐져 홀로 걷는 것 같다. 


하루키는 <잠>을 썼을 때의 일을 똑똑히 기억한다고 말했다. 그는 한참 동안이나 소설을 쓰지 못했다. 그의 말에 따르자면 "도무지 소설을 쓸 마음이 나지 않았다." 작가로서, 개인으로서 힘든 일이 연달아 일어났고 큰 성공을 거뒀음에도 마음이 딱딱하게 얼어붙어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다. <잠>의 '나'가 불면의 밤을 보내듯 하루키도 침묵의 날을 보낸다. 소설을 쓰지 못하는 소설가. 그렇게 오랜 시간을 보낸 하루키는 어느 따뜻한 봄날, 창 밖에서 쏟아지는 햇살을 맞으며 마치 토해내듯,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잠>에는 그러한 작가의 심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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