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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의 영희 씨 창비청소년문학 70
정소연 지음 / 창비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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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리뷰를 쓰다보면 잘 모르겠는 책에 오히려 호들갑을 떨며 칭찬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대개는 다른 소설가의 추천사를 읽거나 평론을 읽고 난 뒤, 내가 보지 못했던 것들을 깨우친 다음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 <옆집의 영희 씨>는 SF 작가인 배명훈의 추천을 통해 손에 들었다. 알라딘의 젊은 작가 인터뷰 코너에서 그가 이 책을 소개한 것이다. 나는 배명훈의 소설을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고 그가 누군지도 알지 못하지만 왠지 그의 추천에 엄청난 신빙성이 느껴졌다. 본디 설득이란 머리가 아니라 마음을 움직이는 일. <예술과 중력가속도>라는 책을 쓴 사람이라면 그 추천도 범상치 않으리라 생각했다. 어쨌든 나는 기꺼이 이 책을 장바구니에 넣었고 그 범상함에 놀라고 말았다.


이 책이 창비청소년문학 시리즈라는 것도 손에 들고서야 알았다. 청소년문학의 특징은 뭘까? 성장이 있어야 하나? 흥미로워야 하나? 상상력을 자극해야 하나? 읽기 쉬워야 하나? <옆집의 영희 씨>는 뒤 두 개에 해당한다. 상상력을 자극하고 읽기가 쉽다. 아주 소프트한 SF. 일상에서 벌어질 법한 소소한 일들이 우주라는 공간에서 펼쳐진다. 그런데 청소년이라고 무조건 쉬운 걸 좋아할지는 의문이다. 이미 다양한 우주에서 매일 매일 수 없이 많은 전투를 치뤄내는 그들에겐(시중에 나오는 게임들을 보라!) 오히려 심심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내 생각을 말하자면, 이 소설은 차라리 어른을 위한 소설이다.


영희 씨의 감성을 느끼기 위해선 어느 정도 삶의 흔적이 필요하다. 20대 중반에서 30대 중반 사이. 그러니까 삶의 흔적이 하나둘 마음에 생겨 그것이 점점 아려오지만 아직 두꺼운 딱쟁이는 지지 않아 부드러움을 간직한 사람들. 그런 사람이 아니라면 이 소설은 평양 냉면을 처음 먹었을 때처럼 더럽게 맛이 없을 수도 있다.


확실히 여자 작가들이 잡아내는 감정의 섬세함은 남자들이 따라잡을 수 없는 것 같다. 여자들끼리의 대화를 듣고 있으면 뭐 이런 얘기까지 하나, 뭐 저런 일에 화를 내나 라는 생각이 들때가 있는데 그 이유가 바로 여자들의 감성이 훨씬 섬세하기 때문이다. 번개처럼 번쩍하고 나타나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만이 강렬한 게 아니다. 이 섬세함을 느끼고 나면 소소한 이야기 속에서도 몇 날은 파장을 일으킬 감동을 느낄 수 있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 며칠은 먹었다는 박준 시인의 말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런 것이 지루하게 느껴지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내 경우에 반은 그랬고 반은 그러지 않았다. 나는 아직 정소연 작가가 지닌 섬세한 감정의 돌기를 갖지 못한 것 같다. 많은 이야기들이 그저 출근길 라디오 소리처럼 흘러가 버렸다. 속이 편안해지는 음식을 먹었지만 여전히 느껴지는 허기. 이 묘한 감정이 공존하는 게 바로 <옆집의 영희 씨>다.


가장 큰 수확은 SF라는 장르의 매력을 확실히 깨달았다는 것이다. 읽는 재미가 아니라 쓰는 재미 말이다. SF는 우주선이 성층권을 넘어 우주로 도약하듯 인간의 인식을 좁은 우리에서 꺼내 우주로 쏘아보낼 수 있다. 물리적 도약이 과학의 역할이라면 정신적 도약은 분명 SF의 일이다. 극단적 가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인식의 전환. 그 쾌감은 쓰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마어마한 가능성을 발견케 한다. 이 가능성 안에서 나는 인종차별, 빈부격차, 남녀 평등, 문명의 충돌 등 온갖 인간의 문제를 더 첨예하게, 더 완벽하게, 더 재미있게 그려낼 수 있다. 세상의 이면을 꿰뚫는 문장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아예 안과 겉을 뒤집어 모두가 들여다 볼 수 있게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SF의 힘임을,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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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카페에서 작가를 만나다 1 - 혁명.이데올로기 편 철학카페에서 작가를 만나다 1
김용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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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금지를 금지한다는 간지 선언은 우리를 초긍정 사회로 이끌었다. 우리가 오늘날 죄책감에 쫓긴 자기 계발에 시달리고 끊임없이 특강을 찾아다니고 조금이라도 더 우수한 인재가 되고 싶다는 욕망에 빠져 사는 이유. 그것은 우리 사회에 긍정성이 범람했기 때문이다.


강철 빗장을 뜯고 드디어 자유를 꺼내왔지만 그 무게에 질식해 버린 현대인의 아이러니. 더이상 당신의 성공을 막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을 무한한 가능성의 창대한 발현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순진해도 너무나 순진한 거다.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말은 곧 실패의 책임이 모두 당신에게 있다는 말과 같다. 가난해서 학교를 다닐 수 없어요. 인터넷에 공짜 강의가 넘쳐나는데요? 작가가 되고 싶은데 등단의 문이 너무 좁아요. 쌔고 쌘게 인터넷 소설 플랫폼이에요.


초긍정 사회에선 낙오자가 속출하고 우울증이 만연한다. 남들보다 뒤처져 있다는 불안. 그 잘못이 다름 아닌 바로 나 자신에게 있다는 생각. 구조적 모순은 이 망상 뒤에 숨어 영원히 지속될 힘을 축적한다. 화를 내고 싶지만 도대체 어디에 화를 낸단 말인가? 우리를 억압하는 모든 금지는 이미 우리가 거세해 버린 것을.


지금 우리는 권력의 진화 과정을 보고 있다. 권력은 억압를 제거함으로써 영원히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유라는 이름으로 모든 개인에 내재화된 것 뿐이다. 가장 무서운 건 언제나 보이지 않는 적. 현대 사회에서 '나'는 나의 주인이자 동시에 노예다. '나'를 채찍질 하는 건 외부의 강요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 나를 죽여야만 내가 해방되는 딜레마. 초긍정 사회는 해방의 딜레마 또는 해방의 아이러니로 가득차 구원이 불가한 세계다.


철학의 힘은 현실이 뒤집어 쓴 두꺼운 가면을 벗겨내 그 안에 든 추잡한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진실은 잠깐 번쩍이고 마는 번개가 아니다. 진실엔 우리가 딛고 선 단단한 땅을 파괴하는 힘이 있다. 그 힘에 넘어지고 구르고 다친 사람들은 찡그린 얼굴로 일어나 파괴된 세상을 목격한다. 그리고? 


분노한다. 


나는 이것이야 말로 철학이 가진 진정한 힘이라고 생각한다. 철학은 그저 어려운 생각을 주고 받는 지적 유희가 아니다. 제대로된 철학은 언제나 물리적 힘을 낳는다. 철학은 우리가 무엇에 화를 내야 하는지 알려주는 학문인 것이다.


철학의 대중화는 그래서 더더욱 중요하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진실을 꿰뚫어 볼 줄 아는 사람들은 아주 극소수에 불과하며 극소수의 분노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혁명의 엔진은 보통 사람들이 표출하는 보통의 분노로 움직인다.


찬바람이 뼈를 에는 겨울 광장에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섰다. 그 숭고한 마음이 지속되려면 우리는 스스로 진실을 꿰뚫어 볼 힘을 키워야 한다. 지금 우리를 움직이는 건 정치가 보여준 포르노 때문이지 그 밑에 숨은 구조적 문제에 대한 자각이 아니다. 철학을 해야 한다. 스스로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비판적 사고를 갖춰야 한다.


이 책은 시인, 소설가와의 대담, 공연을 통해 아주 쉽게 철학을 강의한다. 자기들만 아는 용어를 잰체하며 씨부리고 넘어가는 법도 없이 하나하나 공들여 설명해 준다. 대중 공연으로 기획된 강의를 책으로 옮긴 만큼 부드럽고 편안하다. 그간 웅진 지식하우스의 실망스런 행보에 견주어 보면 탁월하다고 까지 말할 수 있겠다. 나는 좋은 책을 읽을 때마다 장님이 눈을 뜬 것과 같은 희열을 느낀다. 시야가 환해지고, 초특급 반전 영화를 본 것처럼 가슴이 철렁하다. 철학책은 더더욱 그렇다. 그러니 더 늦기 전에, 나아중에 가서야 땅을 치며 통곡을 하기 전에, 철학을 하자. 두 번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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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큐 50 내 동생, 조반니
자코모 마차리올 지음, 임희연 옮김 / 걷는나무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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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얘기가 별로 없는 책이다. 제목을 보는 순간 내용의 99%가 예상된다. 이런 류의 이야기들은 너무 흔해서 이슈가 될 것 같지 않은데, 아마도 주인공의 사연이 YouTube에 공개되고(저자가 직접 만든) 이게 큰 호응을 얻어 책까지 나오게 된 것 같다. 소셜 미디어의 발달은 우리 모두에게 일확천금의 기회를 제공한다. 이번엔 그 운이 이탈리아의 스무 살 청년에게 돌아갔다.


저자 자코모 마차리올은 1997년 이탈리아 카스텔프랑코 베네토에서 태어났다. 엄마 아빠 누나 여동생 자코모, 이렇게 다섯. 어린 남자 애가 종종 그러듯 자코모는 남동생 하나를 간절히 원했다. 이미 세 명이나 낳고 길러 허리가 휘는 부모님에게 또 다른 형제를 요구하는 건 씨알도 안 먹힐 제안이겠지만 역시 유럽은 유럽인가 보다. 어렵다 어렵다 해도 복지가 탄탄해. 외벌이로도 네 명 정도는 감당이 가능한가 보다. 엄마가 임신했다. 게다가 남자를!


자코모는 드디어 원하던 남동생이 나온다는 사실에 들뜨고 기뻤지만 조만간 그 애가 남들과는 조금 다른, 아주 특별한 아이라는 걸 알게 된다. 부모님의 침실에서 '다운 증후군'이라는 책을 발견한다. 자코모가 묻는다. 다운 증후군이 뭐에요? 자, 앞으로 무슨 이야기가 펼쳐질지 눈에 훤하지 않은가? 나도 이쯤에서 글쓰기를 마치고 영화나 보러 가고 싶지만 이렇게 짧은 리뷰는 한 번도 남겨본 적이 없기에 이어지는 이야기를 간단히 소개한 뒤 끝을 내련다.


1. 자코모는 동생을 창피해 한다. 창피해 하는 방법은 아래와 같다.

(1) 친구들에게 동생이 없다고 말한다.

(2) 길거리에서 동생을 모른 척 한다.

(3) 공원에서 아이들이 동생을 괴롭힐 때 모른 척 한다.


2. 자코모는 조반니와(아, 아직 동생 이름도 안 알려줬군) 함께한 경험을 통해 점점 장애의 본질에 대해 깨닫기 시작한다.

(1) 장애란 정말 모자람을 의미하는 걸까?

(2) 조반니는 게임의 규칙을 지키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항상 새로운 룰을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규율에 얽매여 한 방향으로 밖에 못 보는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창의적인 것 아닐까?

(3) 조반니는 언제나 열정과 미소로 가득하다. 그는 웃음을 전염시킨다. 나는 고작 수학 점수가 잘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주변 사람들에게 짜증을 내는데.


3. 짜잔! 자코모는 깨달음을 얻는다.
(1) 조반니는 모자란 게 아니라 그저 보통 사람들과 다를 뿐이다. 천사 조반니! 내 동생 조반니! 진짜 진짜 특별한 사람!


장애인 가족이 있다는 건 나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결국 해피엔딩으로 끝나긴 하지만 자코모 마차리올의 가족에게 언제나 빛과 향기만 가득했던 건 아닐 것이다. 그들의 현명한 극복에 고개가 숙여진다. 편견일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서 누가 아이를 네 명이나 낳는단 말인가! 고령 출산으로 인해 장애아 출산율은 점점 늘고 있지만 결국엔 이마저도 사라질 것이다. 10년만 지나도 출산은 커녕 결혼도 하지 않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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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대로
켄 브루언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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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가 줄어드는 게 아까운 책이 있다. <런던 대로>는 우리 나라에 소개된 켄 브루언의 작품 두 개 중 하나다. <밤의 파수꾼>은 이미 세 번이나 읽었으니 이 책이 마지막이다. 마지막 잎새를 세는 심정으로, 한 자 한 자 마음을 졸이며 읽었다.


<런던 대로>는 헐리웃 고전 <선셋 대로>의 리메이크 소설이다. 영화를 소설로 옮겼다. 골조는 그대로 유지했지만 영화의 주인공 조 길리스(시나리오 작가)를 범죄자 미첼로 대치함으로써 켄 브루언 특유의 범죄 소설이 탄생했다.


원작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재치 있는 입담이 이 소설의 특징이다. 노숙자를 집단 폭행해 죽이고 그 범인을 찾아 무릎에 총알을 박아 넣는 등 끔찍한 중범죄가 커피를 마시듯 태언하게 벌어지지만 아이러니와 비아냥을 뒤섞어 놓은 유머가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 지구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소설가들의 능력 중에 하나만 골라가질 수 있다면 주저 않고 이 능력을 갖고 싶다.


미첼은 이제 막 3년 복역을 마치고 복귀한 범죄자다. 폭력 전과였다. 나오자마자 친구와 함께 고리 대금업을 시작한다. 마음에 드는 일은 아니었지만 친구가 그 일로 차지한 고급 아파트와 옷들을 제공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동행한다. 그런데 복귀 환영 파티에서 만난 여기자 한 명이 그에게 새로운 직업을 하나 소개한다. 이모의 집에서 잡역부를 해달라는 것. 미첼은 흔쾌히 받아들이며 자신을 선택한 이유를 묻는다. 여기자가 말한다. 당신이 썩 잘생겼기 때문에. 퇴폐적인 에로티시즘에 범죄의 냄새가 섞여 들어온다.


여기자의 이모는 한때 잘 나갔던 연극 배우지만 지금은 퇴물이 된 노인이다. 그녀는 언젠가 연극계가 자신을 다시 불러줄 거라는 헛된 희망에 갇혀 산다. 엉터리 각본을 쓰고 자기만큼 늙은 대저택의 연습용 무대에 올라 대사를 읊는다. 이 그로테스크한 여자에게 미첼의 육체가 반응한다. 파멸의 시작.


저택엔 노망난 여배우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이상한 존재가 같이 머문다. 이 집의 집사 조던이다. 여배우의 전 남편이자 그녀의 매니저. 온갖 잡다한 일을 도맡아 처리하며 매일 아침 그녀에게 배달할 팬레터까지 손수 작성한다. 매우 단련된 육체에 지적이기까지 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완벽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한다. 그는 ex wife와 평생을 함께 살며 그녀의 수발을 들고 그녀에게 섹스 파트너를 제공하는 일까지 묵묵히 해치운다.


그로테스크한 저택에서 벌이는 퇴폐적 에로티시즘의 묘사로 끝날 수도 있었을 소설을 검은 범죄의 웅덩이로 이끄는 건 범죄 조직의 두목 간트다. 간트는 미첼과 함께 고리 대금업을 하는 친구의 두목이었다. 미첼은 단박에 간트의 눈에 들었다. 하지만 그 보다 더 좋아한 건 대저택에 고이 모셔둔 롤스로이스 실버 고스트. 간트는 그 사실을 털어놓고 미첼은 장난감 가게에서 실버 고스트 모형을 산 뒤 예쁘게 포장하여 간트에게 보낸다. 전쟁의 시작 된다.


대저택에선 정체 불명의 집사 조던과 미첼이 한 팀을 이루고 다른 쪽에선 간트와 그가 동유럽에서 고용한 암살자가 한 편이 된다. 전쟁은 미첼의 친구가 대저택의 나무에 매달려 죽는 것으로 시작한다. 섹스대신 카시트를 축축히 적시는 핏물이 소설을 채워간다. 그 피가 다 마르기도 전에 다른 피가 흘러 나온다. 모든 범죄 소설에서 피가 멈추는 시점은 언제나 똑같다. 그것은 더 이상 흘릴 피가 없을 때이다.


켄 브루언의 주인공들은 저학력에 알콜 중독자 혹은 범죄자지만 하나 같이 책을 끼고 산다. 그들은 범죄 소설에 푹 빠져 살다 어느 순간 그 소설과 크게 다를 거 없는 삶을 살아간다. 고독과 우울, 심각한 정신적 결함 그리고 독서의 결합.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소설 전체에 형언할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번역된 대사가 너무 올드하고 짧은 문장이 독특한 리듬을 만들어내는 문체를 잘 살려내지 못한 번역이었음에도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책이었다. 2017년에 작은 소망이 하나 있다면 이 작가의 책이 모두 한국에 소개되는 것이다. 흔한 말로, 인생 작가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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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자들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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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피>가 나에게 준 것은 김언수였다. 책이 가져다준 재미보다 더 큰 선물은 김언수였다. 김언수는 앞으로도 계속 소설을 써낼 것이다. 그 말은 내 삶의 무료와 권태, 좋은 책을 고르는 피곤함이 다소 해소될 것임을 의미한다. 주저없이 고른 두 번째 소설, <설계자들>이다.


<뜨거운 피>에 비해 이야기의 밀도가 낮은 감은 있지만 책장을 넘기게 하는 힘만큼은 여전히 놀라울만큼 강렬하다. 암살자들의 이야기다. 거칠고 촌스럽게 치고받지 않는 그들은 서로 칼 한 자루를 손에 쥐고 반보 싸움을 한다. 정중동. 멈춰 있던 몸이 눈 깜짝할 새에 움직여 급소에 칼날을 꽂는다.


주인공 래생은 '도서관' 소속이다. 도서관은 지난 수 십년 간 대한민국의 권력들이 초법적 수단을 강구할 때 마다 적절한 해결책을 제시해준 암살 단체다. 이 업계는 설계자와 암살자로 구성된다. 설계자는 기획하고 암살자는 실행 한다. 수녀원 쓰레기통에서 태어난 주인공 래생은 도서관에서 자라 암살자 교육을 받고 자연스레 암살자가 된다. 실력 좋고 얼굴도 잘생겼지만 그에겐 알맹이가 없다. 그저 계획에 따라 타겟의 목에 칼날을 꽂는 킬링 머신. 


도서관의 수장 너구리 영감이 래생을 선택한 이유는 그가 고아였기 때문일 것이다. 너구리 영감은 래생을 학교에도 보내지 않았다. 그가 원한건 도서관이라는 시스템을 이룰 부품이었기 때문이다. 가족, 친구, 사랑. 이런 것들은 인간의 존재를 충만하게 만들지만 부품으로선 불량 요소일 뿐이다. 살아갈 수록, 그나마 친구라고 부를 수 있었던 동료 암살자들이 죽어가는 것을 볼 때마다 래생의 숨에 짙은 허무의 냄새가 배어나온다. 래생은 생각한다. 그가 죽을 때 눈물을 흘려줄 사람은 누구인가. 래생 자신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암살을 반복하는가.


래생의 이름은 올 래(來)에 날 생(生)이다. 래생은 그 뜻을 이번 생은 글렀으니 다음 생에나 잘해 보라는 의미로 해석하지만 이름을 지어준 너구리 영감은 한번도 그 뜻을 말해주지 않는다. 래생의 해석은 일종의 자조로 보인다. 도서관의 부품일 뿐인 자기 삶에 대한 자조. 그걸 알면서도 자신을 이 세상과 연결해주는 유일한 끈인 도서관을 떠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비웃음. 하지만 자조란 확신 혹은 믿음과는 그 궤를 달리한다. 자조에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다는 일말의 꿈틀거림이 존재한다.


이 희미한 저항은 암살 시스템 전체를 붕괴시키려는 한 여자 설계자를 만나면서 점점 커져간다. 처음에 래생은 여자의 계획이 무모하며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시스템의 맨 꼭대기에 그것을 통제하는 왕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그 왕을 죽이고 나면 전체가 무너질 거라 생각한다. 천만의 말씀. 그것은 시스템을 만든 것이 인간이라는 착각에서 비롯된 편견이다. 래생은 말한다. 인간이 시스템을 구성하는 게 아니다. 시스템이 적절한 인간을 골라 자신을 구성하는 것이다. 악당이 사라진 자리는 눈깜짝할 새에 다른 악당이 차지하고 만다.


그러나 여자는 래생의 말은 아랑곳하지 않고 차근 차근 계획을 수행해 나간다. 그 단호한 의지 속에서 래생은 자신의 삶이 누군가에게 중요한 의미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올 래에 날 생. 이 이름은 과연 무슨 뜻일까? 그가 핵폭탄을 들고 시스템의 핵심으로 파고든 순간 이름은 완전히 새로운 풀이의 가능성을 지닌다. 올 래에 날 생. 미래를 낳는 자. 아마도 그의 이름은 이렇게 해석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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