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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중력가속도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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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장르의 매력은 중력의 한계에 묶인 인간의 인식을 우주 밖으로 쏘아보내는 것이다. 우리의 상상력은 의외로, 어쩌면 당연하게도, 지구를 기준으로 형성된다. 판타지 세계의 용은 그 요란한 독특함에도 불구하고 뱀의 비늘과 눈, 악어의 이빨을 갖고 있다. 천사들은 모두 비둘기와 같은 날개를 갖는다. 그런 의미에서 SF 작가들은 모두 지구인들을 위해 소설을 쓰는 우주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술과 중력가속도>라는 제목을 처음 봤을 때 나는 그 내용의 실마리 조차 잡지 못했다. 예술은 중력가속도와 어떤 관계가 있는걸까? 중력과 가장 먼 단어를 하나 고르라면 나는 아마 예술을 골랐을 것이다. 아무리 상상해봐도 그 둘의 접점은 보이지 않는다. 예술은 중력의 속박을 받지 않는 인간의 유일한 행위니까.


소설집의 제목이기도한 이 단편 소설은 화성에서 태어나 '현대 무용'을 전공했고 주거지가 폐쇄되는 바람에 지구로 이민을 올 수 밖에 없었던 은경씨에 대한 이야기다. 화성의 현대 무용이라니, 우리는 여기까지 듣고 나서도 여전히 텅빈 무대 위의 지루한 몸짓이나 온 몸에 페인트를 묻힌 나체의 퍼포머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더 나아가 보자. 그들이 무대를 박차고 뛰어 올라 허공 위로 솟아오르는 모습을 떠올려 보자. 중력이 몇 배나 낮은 그 곳에서, 오색빛 실크옷을 나풀거리며 천천히 강림하는 여신의 모습을 상상해보자.


예술은 우주의 시대에도 여전히 이해받지 못하는 영역으로 남아 있다. 지구의 예술가들은 인생의 대부분을 이 몰이해와 싸우느라 기진한다. 허름한 전시장을 섭외하고, 해설을 추가하고, 열심히 팜플렛을 돌린다. 하지만 은경씨가 처한 현실은 이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지구에선 아무도 은경씨의 무용을 볼 수 없다. 지구의 중력이 은경씨의 무용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이다. 은경씨가 처한 현실은 압도적으로 비참하다. 지구의 예술가들은 언젠가 자신도 고흐나 베토벤이 될 거라 꿈꾸며 하루를 희망으로 채울 수 있다. 그러나 수십억 년이 지나더라도, 지구가 자신의 중력을 낮춰 은경씨에게 공연의 기회를 주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은경씨의 꿈은 지구의 예술가들이 평생을 바쳐 싸워 온 그 몰이해를, 단 한번만이라도 가져보는 것이다.


지구는 마침내 그녀에게 기회를 준다. 그녀는 몇몇 예술 협회의 도움으로 특별한 공연장을 섭외하는데 성공한다. 무대는 거대한 튜브처럼 생긴 비행기. 비행기는 관객들을 싣고 하늘 높이 올랐다가 무작정 땅으로 곤두박질 친다. 자유낙하. 비행기 안은 무중력 상태로 변하고, 드디어 은경씨의 예술이 빛을 발한다. 그러나 관객들 중 그 누구도 심지어 그녀와 결혼할 나조차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지는 못한다. 멀미로 토를 쏟아내느라 눈 조차 뜰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구인에게 은경씨의 무용은 구역질나는 예술이었다.


이후 은경씨는 나와 결혼을 하고 행복한 신혼 생활을 이어간다. 그녀는 늘 밟고 아름답게 살아간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자살을 선택한 이유를 어렴풋이 추측할 수 밖에 없다. 그녀의 죽음은 마침내 꿈을 이룬 자의 허심탄회한 선택이었을까? 아니면 가까스로 얻은 기회가 결국 몰이해로 귀결된 것에 대한 슬픔이었을까? 나는 아무래도 후자에 무게를 두고 싶다. 우주에는 아주 작은 크기에 어마어마한 질량을 가진 중성자 별이라는 게 존재하는데, 그 크기가 점점 작아져 특정 수준에 이르는 순간 붕괴해 블랙홀이 된다고 한다. 은경씨의 고독은 행복한 웃음과 결혼 생활 속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보였지만 그 질량은 여전했을 것이다. 행복이 커갈수록 고독의 크기는 작아지고, 작아진 크기만큼 밀도가 높아진다. 그리고 마침내, 삶이 붕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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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사회과학 - 사회과학자의 시선으로 새롭게 재구성한 5월 광주의 삶과 진실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6
최정운 지음 / 오월의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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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 그러니까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뽑는 일이 대한민국에선 얼마나 힘들게 쟁취한 권리인지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나는 그 일이 1980년 5월에 시작됐다고 생각한다. 1980년 5월 18일 광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이 날을 기점으로 중대한 변화를 겪게 된다.


아프리카의 어떤 나라에서 시민들의 선거를 막기 위해 오른 손목을 강제로 자른다는 뉴스를 보고 나면 사람들은 후진국의 야만성 운운하며 호들갑을 떨 것이다. 하지만 1980년 5월 광주에서 군인이 지나가는 임산부의 배를 대검으로 갈라 죽였다는 얘기를 들으면 어떻게 반응할까? 1980년은 그리 오래된 과거가 아니다. 당시 그 지옥을 살아서 이겨낸 사람들은 여전히 살아 남아 그 지옥을 만들어낸 악마들이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한다. 지구 역사상 가장 끔찍하고 야만적인 일은 내전이나 인종갈등으로 고통 받는 먼나라가 아니라 경제 대국이자 어엿한 민주주의 공화국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5.18의 원인을 한 마디로 규정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시작은 언제나 그렇듯 대학생들이었다. 그들은 1972년 10월 유신 헌법에 의해 종신 직권 체제를 구축한 박정희와 오랜 싸움을 해왔던 터였다. 그런데 1979년 10월 26일 이 독재자가 중정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지고 이틈을 타 전두환의 신군부가 12.12 군사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움켜쥔다. 드디어 대한민국에 봄이 오리라 기대했던 사람들은 새롭게 등장한 악마에게 맞서기 위해 다시 한 번 전열을 가다듬어야 했고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명령은 드디어 전면전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그 핵심에 광주가 있었다.


광주에 파견된 공수부대는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이유 없이 구타하고 연행해 인간 이하의 고문을 자행했다. 이는 시위대에게만 행해진 폭력이 아니었다. 그들은 시내를 돌며 젊은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들였다. 이는 부마 사태의 성공적 진압 이후 공수부대가 자신감을 갖게 된 전략이었다. 무고한 시민들에게 까지 무차별 폭력을 가해 일반 시민들의 시위 가담을 막는 것.


"공수부대의 데모 진압은 이를테면 '전시적 폭력'이었다. 붙잡힌 사람은 사정없이 폭력을 가하여 그 광경을 보는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다시는 데모는커녕 얼씬대지도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공수부대의 폭력은 당하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중략) 


죽거나 살거나가 문제가 아니라 처참하고 눈 뜨고 볼 수 없게 패고 찌르고 자르는 등 엽기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것이 진압의 기본 원칙이었고, 이를 위해 이미 4월에 특수 진압봉을 주문했으며 처음부터 대검을 사용했다.(중략)


이러한 폭력은 시위 진압이라 할 수 없으며 통상적 폭력도 아니었다. 이는 시각적 언어였고 명쾌한 뜻을 전하고 있었다. (중략) 또한 중요한 점은 이들의 폭력, 특히 전설처럼 남아 있는 엽기적 행위는 결코 인간의 공격적 본능이나 분노의 표현이나 환각제의 효과가 아니라 고도로 훈련되고 오랜 연습을 통해 익힌 전문 기술이며 주로 월남전에서 갈고닦은 것이었다." (90~91p)


신군부는 오랫동안 휴가 및 외출, 외박을 금지하거나 밥을 굶기거나 야간 훈련을 지속함으로써 시위대에 대한 공수부대의 적개심을 의도적으로 키워왔다. 광주 진압의 훈련명이 '화려한 외출'이었다는 사실은 이 폭력이 철저히 기획된 것이며 불만에 가득 찬 군인들에게 제공되는 '축제' 였음을 증언한다. 광주 시민은 이 끔찍한 살육제의 희생양이 되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만다. 특히 노인, 아이, 여자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시민들을 심한 분노와 공포 그리고 그걸 지켜볼 수 밖에 없는 자괴감 속으로 몰아 넣었다.


그러나 광주 시민의 격렬한 투쟁을 공수부대에 대한 복수심의 발로로 이해해선 안 된다. 시민들은 폭력을 폭력으로 되갚아주기 위해 일어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해 투쟁했다. 시간이 흐를 수록 민주화, 전두환 타도와 같은 정치 구호가 등장하긴 했으나 이는 시위 과정에서 이 모든 사태를 초래한 원흉이 누구인지 학습하고 알아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된 구호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실제로 저자는 시위대의 대다수가 전두환이 누구인지도 몰랐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5월 18일 광주 시민들을 움직인건 인간이고 싶은 열망, 즉 시대적, 이념적 가치를 초월한 기본권에 대한 사수 의지였다.


기본권에 대한 파괴는 80만 광주 시민을 하나로 뭉치게 했다. 그들은 역사상 유례 없는 절대공동체를 형성한다. 이 공동체 안에서 개인은 사라졌고 개인이 사라지고 나니 개인이 품을 수 밖에 없는 자기애와 이기심도 사라져 버렸다. 그들은 하나였으나 혼자가 아니었고 그것을 자각하는 순간 죽음 조차 아무 것도 아닌 일이 되어 버렸다.


<오월의 사회과학>은 이 절대공동체가 어떤 과정으로 형성됐고 또 어떤 계기로 해체되었는지를 차분히 분석함으로써 이 책이 왜 '그날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월의 '사회과학'인지를 증명한다. 일목요연한 사건 개요, 르포, 이야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이 책이 만족스럽지 않을 수도 있다. 5.18을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면, 이 끔찍한 권력의 폭력을 끝까지 파헤치기 위해, 공수부대의 잔학성을 구체적으로 증언하는 다른 책을 먼저 읽어 적의를 불태우는 것도 좋을 것이다.


5.18같은 어마어마한 사건이 이토록 조용히 묻혀온 데는 권력자들의 억압과 은폐, 호남에 대한 타지역 사람들의 편견에 기인한 바가 클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5.18에 대한 분노를 호남 사람들의 지긋지긋한 피해 의식의 발로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혹은 그런 얘기는 운동권이나 사상적으로 불순한 사람들의 주장으로 여기기도 한다. 이는 대한민국의 권력이 우리에게 짜놓은 프레임이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그것을 유지하는 전략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를 말해준다. 광주 시민들은 5.18에 대해 말할 수도 없고 말하지 않을 수도 없다. 피해자들이 내는 목소리는 언제나 피해에 의해 편향된 것이라는 오해를 견뎌내야 한다. 그래서 광주하고는 아무런 관련도 연고도 없는 사람이 쓴 <오월의 사회과학>은 우리를 기쁘게 하면서 동시에 슬프게 만든다. 나는 사건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 그래서 목숨을 온전히 부지한 삼자만이 역사를 객관적으로 기술할 권리를 갖는다는 사실이 몸서리치게 무섭다.


1980년 5월 광주에 내려진 '신화적' 폭력은 이제 거의 잊혀질 위기에 처해 있다. 어느날 전두환이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를 그저 박정희의 뒤를 이은 또 한 명의 군부 독재자라고 기억할지 모른다. 대한민국의 근대사는 이렇듯 '단기 기억 상실증'으로 고통 받고 있다. 악마는 단지 이름을 바꿨을 뿐이지만 국민은 그 새로운 지도자가 이번엔 정말 '신한국'을 만들어 줄 거라 희망한다. 지구인을 애완 동물로 키우는 외계인이 있다면, 아마 우리를 금붕어라고 부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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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시인선 32
박준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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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확실히 다른 차원의 언어란 생각이 든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 며칠은 먹는 동안 나는 비논리와 비논리의 결합이 진리를 만들어내고 그 진리가 자아내는 운율을 따라 언어가 다른 차원으로 진화하는 과정을 다시 한번 지켜봤다. 나는 현실에 굳건히 뿌리내린 몹쓸 이성과 합리의 벽을 무너뜨리고 싶을 때마다 시집을 꺼내든다.


서정이라는 말이 꼭 슬프다는 뜻은 아닐건대 시는 대개 서정적이면서 동시에 슬프다. 엉엉 우는 울음인가 하면 그렇지 않고 차가운 겨울 바람에 땅 밑으로 끌려 내려온 달빛처럼 스산하고 쓸쓸하다. 고조된 슬픔이 사라지고 난 뒤, 세월이 한참이나 지나 이제는 다 잊었다,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하지만, 어느날 살랑이는 바람에 가슴 깊이 묵혀있던 감정의 잔해들이 먼지처럼 일어나는 순간이 언어화 하는 게 바로 시라는 생각이다. 어쩌다, 문득, 아무런 전조도 없이 시상은 칼날처럼 떨어져 내린다.


이 시인은 찬란한 현재의 사랑을 노래하는 법이 없다. 그의 미인은 늘 과거의 미인이거나 한때 자기 옆에 머물렀던 미인이다.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건 그녀가 지금 없다는 것이다. 시인은 떠나간 자리, 그 휑하게 빈 자리를 메꾸기 위해 애꿎은 그녀의 이름을 지어다 며칠을 먹어 보지만 부활은 오래가지 않는다. 생은 곧 멸과 함께 나오는 것이기에 시인은 자신이 지어 놓은 이름이 며칠 지나지 않아 다시 한 번 사라지는 슬픔을 느껴야 한다.


나는 문득 슬픔이 아름다울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져본다. 슬픔이 아름다울 수 있는 건 오직 그것을 구경하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일이다. 슬픔의 당사자가 과연 그 슬픔을 아름답다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런 잔인한 생각은 해본 적 없고 하고 싶지도 않다. 그런데 시인은 머리말에서 "나도 당신처럼 한번 아름다워보자고 시작한 일이 이렇게나 멀리 흘렀다"고 말한다. 시인은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그리움으로 그 사라진 것의 아름다움을 다시 살리기 위해 가슴 깊이 묻어왔던 감정을 토해낸다. 내눈엔 종종 그것이 아름다워 보인다. 하지만 시인에게는? 나는 그가 한 말을 곰곰히 생각해 본다. "이렇게나 멀리 흘렀다"는 말에 깃든 서로 다른 의미를 생각해 본다. 그것은 자신의 시 쓰기가 우연히 직업으로써의 글짓기가 된 것에 대한 시인의 소회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되어진 일을 보니 슬픔은 배가 되고 아름다움은 처연한 상실감으로 변해 처음의 의도와는 너무나 멀어져버린 실제를 자조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인간은 결코 사라진 것을 되돌릴 수 없다. 오르페우스는 결국 뒤를 돌아보고 에우리디케는 망자가 되어 영원한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되돌리려는 모든 행위, 나는 그 부질없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그것을 감수하는 인간의 비애를 다시 한번 깨닫는다.


시인이 이렇게나 멀리 온 일을 이렇게나 아름답게 여기는 것에 나는 죄책감을 느낀다. 나는 그가 멀리 온 일이 더이상은 멀어지지 않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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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일리의 사람들 판타스틱 픽션 골드 Gold 3
존 르 카레 지음, 조영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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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덤하우스코리아가 우리 나라 출판계에 준 선물이 있다면 켄 브루언과 존 르 카레일 것이다. RHK에는, 시공사가 촌스러운 대사 번역으로 70년대 서가에 쳐박아 버린 켄 브루언과(런던 대로) 열린책이 난독증 유발자로 낙인을 찍어버린 존 르 카레를 양지로 끌어 올린 공로가 있다. 재미와 문학모두 잡으려는 이 외국계 출판사의 노력과 의지에 감사의 인사를.


<스마일리의 사람들>은 존 르 카레의 또 다른 자아 스마일리가 최대의 숙적 카를라와 벌이는 첩보 대전 3부작의 마지막 작품으로, 답답할 정도로 고독한 두 남자의 암투가 드디어 이 책을 통해 막을 내린다. 결투의 시작 <팅커, 테일러, 솔져 스파이>를 영화로 접한 나는 곧장 존 르 카레 빠져버렸고 그 다음 얘기가 <Hornarable Schoolboy>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이 책은 한국어로 번역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2편을 넘기고 3편으로 가야 하나? 그럴 수는 없지. 하지만 서커스와(영국 정보부) 모스크바 센터(KGB)의 대결은 시간을 거듭할 수록 눈에 밟혔다. 애꿎은 영화만 다시 보기를 수차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참지 못하고 결국 <스마일리의 사람들>을 손에 들었다.


후회하지 않을 소설이다. 이것이야 말로 첩보 소설의 진수가 아닐까 싶다. 존 르 카레는 실제로 영국 외무부(영국 정부는 정보부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첩보원들의 소속을 말할 때 대개 외무부라고 한다)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진짜 스파이였다. 틈이 날 때 마다 종이 위에 이야기를 끄적였고 그것이 이 대작으로 태어난 것이다. 탄생 과정이 매우 소박함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가히 흉내낼 수 없는 분위기와 사실성으로 독자를 압도한다. 기밀이라 확인이 불가한 탓에 상상을 좀 덧붙이면, 어쩌면 이 소설이 존 르 카레 자신이 참여했던 작전들의 일지가 아닐까.


스마일리는 제임스 본드 보다는 셜록 홈즈에 가까운 인물이다. 작은 단서에서 건져낸 조그만 실마리를 잡고 하나 하나 사건을 엮어 나간다. 스마일리는 언제나 과묵하다. 답답할 정도로 인내심이 많다. 그는 정보전의 승패가 상대의 정보를 캐내는 것에 앞서 내 정보를 드러내지 않는 것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남자다. 그래서 이 침묵의 노인은 그의 행동을 쫓아가는 독자의 답답함을 알고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나간다. 마침내 진실에 손에 쥐었을 때 조차 그는 잰체하거나 자부심을 갖지 않는다. 그는 더 많이 아는 것이 더 많이 아픈 것이라는 진리를 아는 사람 같다. 우리는 그가 찾아낸 진실을 손에 들고 두 번 세 번 돌려보며 환호를 지르지만 그는 이 모든 소동 앞에서 신음할 뿐이다. 이 고독한 남자의 매력에 빠지고 나면 다른 모든 스파이들은 유치해서 견딜 수가 없어진다.


소설 속에서, 스마일리의 말과 생각은 혼재해 있고 구성마저 매우 복잡한 탓에 이야기를 따라가기는 커녕 문장 조차 잘 읽히지 않는 고욕을 경험할 수 있다. 두 번, 세 번 페이지를 되돌아가며 이야기를 되짚는 경우가 당신만의 사정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복잡성 때문에 우리는 스마일리의 마지막 결투를 두 번, 세 번 다시 읽으면서도 그때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발견하는 놀라움을 경험할 것이다. 스마일리의 침묵이 사실은 무엇을 의미했는지, 우리가 고작 사건의 정황을 파악하고 있을 때 그는 몇 걸음이나 앞서 나가고 있었는지, 되풀이 되는 독서 과정 속에서 속속 드러날 것이다.


<스마일리의 사람들>을 읽고 있으면 암투라는 게 진정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어둠 속에서 상대의 기를 느껴 날아오는 암기를 모조리 피하는 중국 무협 따위의 판타지는 없다. 이기는 방법? 승리를 거둔 뒤 무대를 빠져나가는 스마일리의 상처에서 그 비밀을 알게 된다. 정답은 날아오는 총알을 피하지 않는 것이다. 다만 그 총탄이 살갗을 파고들어 뼈를 부순 뒤 반대 쪽 살갗을 뚫고 지나갈 때, 일말의 신음 소리도 내지 않는 것. 어둠 속에서 터져나와 나의 위치를 밀고할 비명을 숨기지 않으면 적의 무기는 기어이 그 비명을 찾아와 집요한 총탄 세례를 퍼부을테니까. 결국 스파이들의 싸움은 인내와 침묵의 싸움인 것이다.


존 르 카레는 사상의 대립이 만들어낸 냉전과 냉전이 만들어낸 비인간적 첩보전을 황홀할 정도로 고독하게 그려낸다. 흔히 첩보전을 소리 없는 전쟁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비명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비명을 지르지도 못할만큼 압도적 고통이 따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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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로마사 1 - 1000년 제국 로마의 탄생 만화 로마사 1
이익선 지음, 임웅 감수 / 알프레드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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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사를 만화로 읽으면 더 재밌을까? 확실한 건 더 쉽다는 것이다. 모든 심사숙고와 긴 글, 힘들여 얻고자 하는 게 조롱거리가 된 요즘 시대엔 반드시 알려야 할 것을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전달하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만화가 정말 쉬운가 하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일반 인문서라면 페이지에 페이지를 이어 장광설을 늘어놔도 될 일을 만화는 분절된 컷으로 압축 제공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드러난 공백은 읽는 사람의 상상력으로 채우거나 다른 서적을 읽어 보충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만화 인문서는 모두 퀴즈쇼 출전을 대비한 참고서나 점심 시간에 관심도 없는 이야기를 주절주절 쏟아내는 부장님의 잡지식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러니 이 책 하나로 로마사는 끝 이라는 생각은 절대 하지 않는 게 좋다.


만화 로마사는 그간 만화 인문서들이 보여준 전통을 잘 따르고 있지만 그만큼 참신한 면은 없다. 연출적으로는 '먼나라 이웃 나라' 보다는 '고우영의 역사 만화' 시리즈에 더 가깝다. 유치한 아재 개그가 전반에 깔려 있지만 이상하게 어색한 점은 없다. 단, 이 개그 코드가 어느 정도의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지는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만화적 연출과 역사적 사실이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 부분도 아주 간혹 나타나기 때문이다.


작화 또한 참신한 면은 없다. 친숙한 SD 스타일 캐릭터들이 컷을 채운다. 정보 전달이 목적인 만큼 잘게 잘게 컷을 구성한다. 지문은 당연히 많고 보충 설명을 위해 많은 각주를 제공하기 때문에 의외로 읽는 속도가 나지 않는다. 어쩌면 이것이 만화 인문서의 한계인지도 모르겠다. 책도 만화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 재미가 있는 듯 하면서도 재미가 없는 것 같은 묘한 느낌. 이 한계는 만화를 수단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가 아닐까 한다. 전달해야 할 '정보'를 정해 놓고 이를 만화로 그려낸다. 초점이 정보에 맞춰져 있으니 만화 특유의 매력이 잘 살아나지 않는다. '정보'를 '이야기'로 대체하면 완전히 다른 만화가 나올 수도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굳이 제목도 <만화 로마서>가 아니고, 삼국지를 재해석한 <창천항로>나 진나라 역사를 그리는 <킹덤>처럼 새롭게. 그랬다면 '만화지만 훌륭한 책'이 아니라 그냥 '훌륭한 책'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우리에겐 요코하마 미츠테루의 만화 역사서 같은 좋은 전례가 있지 않은가.


물론 그렇게 할 수 없는 이유는 전자보다 후자가 훨씬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만화 로마사>는 출판사에 의해 철저히 기획된 책이다. 편집인들이 편집 의도를 잘 따라줄 무명 작가를 고용한다. '먼 나라 이웃 나라' 같은 대박을 한 번 내봅시다. 이해는 된다. 그저 다음에는 로마사에 깊은 애착을 가진 만화가가 그리는 진짜 만화가 보고 싶을 뿐이다. 주인공은 매번 죽을 수 밖에 없으니 새로운 서술 방식을 도입. 로마 역사 그 자체를 인격화해 마치 자신의 옛 일을 회고하는 형식이라면 꽤 매력적이지 않을까?


전반적으로 참신한 면은 없지만 <만화 로마서>는 두 가지 측면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왜 지금 로마사 인가?' 하는 질문에 시의 적절한 답을 내주기 때문이다. 1,000년도 넘는 세월 동안 수 많은 정복 사업을 벌였음에도 관용과 포용으로 요약되는 그들의 이민족 융합 정책은 전 지구의 역사를 둘러봐도 비교가 없을 정도였다. 따라서 현재 대한민국이 직면한 다문화 사회, 인권의 사각 지대에 놓인 외국인 노동자 문제, 또는 정치적 갈등으로 인한 지역간 대립을 봉합할 수 있는 실마리를 이 책을 통해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로마사라는 중요성과 거대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의 관련 서적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가 유일할 정도로 그녀의 책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나도 크다. <로마인 이야기>를 싸잡아 폄하할 수는 없지만 군국주의 일본을 찬양하고 과거사 청산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으며 대동아 공영권, 나아가 약육강식을 신앙으로 갖는 작가인 만큼 그녀의 책은 아주 신중하게 읽혀야 한다. 하지만 이 <만화 로마사> 같은 반대편의 책이 없다면 사람들은 <로마인 이야기>에 담긴 위험한 생각을 아예 느끼지도 못할 것이다. 다양성은 사회, 문화, 정치를 막론하고 어디서나 중요한 가치로 지켜져야 한다.


쓰다보니 나도 이 책의 가치를 정확하게 가늠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간만에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다시 한 번 꺼내봐야겠다. 이 두 책의 차이가 저자의 의도만큼 확실히 드러난다면, 우리에겐 그 보다 값진 경험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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