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전목마의 데드히트 - 개정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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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전목마의 데드히트>는 대학시절 읽었던 책인데, 끔찍하게 지루했던 걸로 기억한다. 도통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이 즐비했고, 하루키 특유의 쿨함과 자의식 과잉이 합쳐져 자아내는 허세적 분위기가 가득했다. 예컨대 친구의 애인이나 부인과 섹스하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화자의 태도나, 남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엄청난 미녀가 유독 하루키를 형상화한 캐릭터와 섬싱을 만들어내거나, 불현듯 경험한 에피파니에 의해 내 영혼을 구성하던 뭔가가 영원히 떨어져 나가고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나일 수는 없게 됐다는 식의 어쩌고 저쩌고 같은 얘기 말이다. 아무튼 이런 얘기를 반복해서 듣고 있으면 생굴에 날계란을 풀어 먹는 것처럼 느끼하다.


그런데 근 30년이 지나 다시 읽어보니 웬걸,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아니 뭐 나쁘지 않은 게 아니라 꽤 재밌었다. <회전목마의 데드히트>는 그냥 전형적인 하루키 소설이었다. 느끼한 걸 아무리 먹어도 버틸 만큼 위벽이 탄탄해진 건지, 번역된 책을 거의 다 읽으면서 하루키를 인정하고 또 존경하게 된 탓인지 모르겠지만, 한여름에 에어컨을 틀고 소파에 누워 후루룩 말아먹기에 좋은 책이다. 옆에 싱하 탄산수와 헤네시를 섞은, 이가 시릴 정도로 상큼한 하이볼을 더한다면 완벽한 주말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아 지금 좀 하루키스러웠나?


소설은 하루키가 누군가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소설로 쓰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하루키는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자신은 극히 일부분만 수정했을 뿐 소설이 어떠한 각색이나 과장이 없는, 근본적으로 사실을 그대로 옮긴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을 그대로 믿고 책을 펼치면 친구의 애인이나 부인과 섹스를 즐긴다는 그들의 고백에 심장이 바운스 바운스한다. 이름 정도는 바꿨다 해도 하루키의 주변 사람들은 그게 누군지 다 알 텐데, 정말 이래도 괜찮은 건가? 하루키가 몸담은 초 유명인들의 사교계에서 이 정도는 애교인가 보구나, 하는 왜곡된 세계관을 갖게 된다.


마지막 작가의 말까지 다 읽고 나면 이게 다 거짓말이라는 걸 알게 된다. 하루키는 이 단편집을 통해 본인이 장편을 쓸 수 있을지 시험해 봤다고 하는데, 그러려면 누군가의 말을 듣고 그대로 옮기는 형식이 아니고선 불가능했다고 말한다. 소설 앞과 뒤의 얘기가 달라 무엇을 믿어야 할지는 모르겠다. 사실 <회전목마의 데드히트>에 등장하는 하루키가 현실 세계의 하루키와 같은 사람이라 생각하는 게 촌스러운 발상일 수도 있다. 어쨌든 이건 소설이고 그는 소설가 아닌가. 소설가란 시작부터 끝까지 다 거짓을 말해도 무관한 직업이다.


출간하여 독자 앞에 내놓는 작품이 뭔가의 연습이라는 게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하루키의 일부 에세이와 소설들은, 내용상으로 비슷한 탓도 있겠지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1948년생의 작가가 아직도 활동을 하고 있는 걸 보면 결국 하루키의 작품들은 궁극의 지점에 도달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 아닐까 싶다. 참 멋있는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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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음을 돕는 의사입니다
스테파니 그린 지음, 최정수 옮김 / 이봄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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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는 자기 자신을 파괴할 권리가 있을까? 나라는 존재가 나 자신의 것이라는 생각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나의 소유물을 내가 어떻게 다루냐 나라는 문제 앞에서는 꽤 복잡한 논의가 발생한다. 몇 가지 생각을 해보자.


자기 소유물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게 어떠한 경우에도 침해할 수 없는 절대 권리라면 내가 내 몸을 어떻게 다루든 문제가 없을 것이다. 이런 논리라면 매춘도 정당한 상거래로 인정해야 한다. 내 몸을 내가 팔아 생계를 잇겠다는 데 누가 참견할 일이란 말인가. 권리는 오직 윤리와 도덕이 허용하는 선에서만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라면 장기 매매에 대해 생각해 보자. 돈이 필요한 사람은 신장을 팔고 신부전을 앓는 사람이 그걸 산다. 이 거래에는 단 한 구석도 부도덕한 면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왜 우리 사회는 장기 매매를 불법으로 규정하는 걸까?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부자들의 부속품으로 전락하여 인간성이 상실되는 결과를 두려워하는 걸까?


모호한 예시는 이것 말고도 많다. 최근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마약만 해도 그렇다. 자기 방구석에서 평생 마약을 하다 죽는다면, 아무리 생각해도 그걸 금지할 만할 명분이 없어 보인다. 약에 취해 살인을 저지르는 것도, 자기 집에 불을 지르는 것도, 치료 시설에 들어가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키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국가가 마약을 금지하는 이유는, 중독자가 많아지면 생산력에 공백이 생기고 그로 인해 세수가 감소하는 등 다양한 사회 문제가 발생해 국가 체계가 붕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비용의 문제지 윤리적 문제는 아니다.


자기 자신을 파괴할 권리에 국가가 어느 수준까지 개입해야 옳은가 따지는 일은 이처럼 딱 부러지지 않는다. 적극적 개입을 옹호한다면 우리가 마약을 규제하는 것과 같은 논리로 술, 담배, 심지어 정제 탄수화물이나 단순당을 금지해도 딱히 반대할 근거가 없다. 반대로 완전한 자유를 허용한다면 코카인을 빨고 주식 거래를 하든, 자기 각막을 팔아 대출금을 갚든 아무 문제가 없다.


최근 각국에서 합법하되는 추세를 보고 있으면 안락사에는 후자의 논리가 따르는 것 같다. 삶의 결정권은 오직 자신에게 있으며 이를 막는 것은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자유와 권리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죽을병에 걸려 회생이 불가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고 있다. 이 결정의 밑바탕에는 우리 인간에겐 불필요한 고통 없이 존엄하게 죽을 권리가 있다는 생각이 깔려있다. 나는 이것이 불필요한 윤리적 수사라고 생각한다. 안락사를 살인으로 보는 사람들을 달래기 위한 핑계라는 말이다. 우리 사회에는 회생 불가의 병 말고도 인간의 존엄을 헤치고 정신적, 신체적으로 고통을 주는 상황이 셀 수 없이 많다. 왜 이런 사람들에게는 안락사를 허용하지 않을까? 여기에는 국가가 마약을 통제하는 이유와 정확히 같은 논리가 적용된다.


이처럼 안락사를 결정하는 순간에는 윤리 도덕적 고민보다는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따지는 논리가 더 강하게 작용한다. 인간보다 사회, 혹은 국가, 혹은 정부가 더 위에 있는 것이다. 안락사를 막는 건 국가의 폭력일 뿐이다.


나는 추호의 의심도 없는 안락사 지지자, 그것도 모든 대상에게 허용하자는 적극적 옹호자다. 그런데 죽음이 코 앞에 다가와 풍기는 냄새를 맡다 보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흔들렸다. 나처럼 확고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안락사의 대상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꿔보길 바란다. 예컨대 우리의 엄마, 아빠가 안락사를 원한다면? 당신의 사랑하는 딸이, 당신이 사랑하는 아들이, 대한민국은 희망이 없다며, 왜 나를 이런 나라에서 낳았냐며, 조력 자살을 신청하겠다면 어떤 마음이 들 것 같은가?


안락사에 대한 거부감은 책을 읽기 전 까지는 전혀 예기치 못했던 면에서도 발생한다. 이 책에는 저자가 진행한 조력 자살 사례가 꽤 많이 등장하는데, 그걸 쭉 읽고 있으면 어느 순간 묘한 감정이 든다. 동의를 했든 어쨌든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결정적 행위는 그들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들은 남을 죽인 대가로 보험 수가를 받아 직업을 유지한다. 저자는 어느 날 안락사를 마친 뒤 알 수 없는 뿌듯함을 느끼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 몸을 흔들었던 경험을 고백한다. 그녀는 이 대목에서 자신이 얼마나 당황했는지를 얘기한다. 그녀만큼 나도 당황했다. 그녀의 고백을 들으며 내 마음속엔 형용할 수 없는 이질감이 고여 들었는데 그게 불쾌감인지, 섬뜩함인지, 분노인지, 공감인지, 아니면 죄책감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솔직히 책 자체는 굉장히 지루한 편이다. 하지만 반복되는 고백을 읽다 보면 책 내용과는 무관한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른다. 한 사람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린 확고한 신념이란 게 알고 보면 얼마나 얕고 연약한 것인지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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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신자
비엣 타인 응우옌 지음, 김희용 옮김 / 민음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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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신자>는 2016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동조자>의 후속작이다. <동조자>는 박찬욱 감독이 HBO 드라마로 제작하면서 유명해졌다. <동조자>는 읽지 못했지만 <헌신자>를 토대로 미루어 짐작컨대, 이 책엔 이른바 웨스턴 1 티어 국가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만한 문장들로 가득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HBO의 드라마화에는 재미있는 구석이 많다. 21세기 최악의 제국주의 국가에서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책이 영상화되다니. <현신자>는 제국이 쌓은 자산으로 자유를 얻은 프랑스 지식인들이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위선을 유머러스하게 까발리는데, 전작 소설의 드라마화는 이 책의 주요 테마를 그대로 재현하는 것 같지 않은가? 그런데 이 대목에서 미국이 진짜 대단한 건 이 부조리한 상황을 유려한 쇼비즈니스로 포장할 줄 안다는 점이다.


미국은 <동조자>에 퓰리처 상을 수여함으로써 출판계의 '쇼 미더 머니'에 응했고 발 빠른 재간둥이들이 읽지 않는 자들을 위해 화면을 마련했다. 자본주의는 자신에게 침을 뱉는 행위마저 상품으로 만들어 소비자에게 판매한다. 이 소름 돋을 정도로 무감각한 자동 생산 체계를 보고 있으면 우리에게 과연 자본주의를 극복할 방법이 있을지 의문이 든다.


책의 배경은 1980년대의 파리다. 프랑스인 아버지와 베트남 어머니를 가진 '잡종 새끼' '나'는 CIA의 비밀요원이자 베트남 공산당에 소속된 스파이다. '나'는 공산당이었지만 스파이로서 남베트남 망명군에 침투에 있었기에 공산당에게 붙잡혀 이른바 재교육이라 불리는 무지막지한 고문을 당한다. 결국 '보트 피플'이 되어 베트남을 탈출한 '나'는 이곳저곳을 떠돌다 고국을 식민화했던 '아버지의 나라' 프랑스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나'는 마약상이 된다.


'나'는 위선적인 프랑스 지식인들에게 마치 보복이라도 하듯 마약을 판매한다. 그리고 그 자신도 서서히 중독되어 간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 보지만 '나'를 지배한 건 결국 돈의 맛이었다. 평범한 월급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고급 가죽 구두와 일제 카메라를 목에 걸고, 일본인 관광객으로 위장한 마약상은 질주하는 돈의 경주에 합류해 스릴을 즐긴다. '나'는 생물학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그리고 삶에서도 이중으로 분열한다.


<헌신자>의 문장은 마음이 아플 정도로 아름답다. '나'의 자조 섞인 유머와 폐부를 찌르는 촌철은 진정 우아하고 정확하게 이 세계의 부조리를 드러낸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저자 비엣 타인 응우옌 또한 '나'와 같은 이중의 어둠에 갇혀 분열하고 있는 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계의 각성을 촉구하는 사람이, 자기 책을 엄청나게 팔아 자신이 극복하려는 세계의 발전에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기여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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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을 다하면 죽는다 총총 시리즈
황선우.김혼비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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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의 김혼비와 <멋있으면 다 언니>의 황선우 작가가 편지를 주고받는다. 서로를 향한 연정을 아낌없이 드러내는데 아직 그렇게 친한 사이가 아니다 보니 초반엔 뚝딱뚝딱 서먹하다. 상견례 자리에서 처음 사돈을 마주한 분위기. 숨 막히는 침묵이 두려워 끝도 없이 덕담을 늘어놓는 기분이랄까?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는 말은 정말 마음에 안 든다. 열심히 사는 사람을 전부 촌스러운 꼰대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온 힘을 다하는 마음이 혐오의 대상이 됐을까? 열심히 해도 무엇하나 이룰 수 없다는 좌절감이 온 세상을 뒤덮은 것 같이 숨이 막힌다. 곰곰이 들여다보면 최선을 다해 얻고자 하는 열매의 위치가 지나치게 높아진 게 원인인 듯한데... 서울숲 트리마제나 한남 나인원 아파트에 살고, 메르세데스 벤츠, BMW, 포르셰 카이엔을 몰며, 한 달에 두어 번은 인당 30만 원짜리 오마카세를, 분기에 한두 번은 해외여행을 가는 삶은 과거에도 지금도 심지어 미래에도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현대인의 불행이 지나치게 벌어진 소득 불평등에서 시작한다는 걸 인정하지만, 그 뿌리를 키워 꽃을 피운 건 삶이라는 신앙에서 모든 가치를 말살하고 유일신이 되어버린 마몬(물신)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이 마몬의 것이 될 거라 정확히 예측했던 낙관주의자 마르크스는 그러나 그 마몬이 가진 태생적 모순으로 인해 우리 사회가 평등한 공산주의로 이행할 것이라 확신했다. 이 똑똑이가 한 말 중에 가장 유명한 걸 고르라면 아마 '종교가 인민의 아편'이라는 말일 것이다. 21세기엔 '인플루언서의 위로가 아편'이 됐다. 이 두 문장은 듣는 사람에게 상당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는 공통점이 있다. 대충 살아도 괜찮다는 말, 뜨거울 필요 없다는 말, 쉬어가도 좋다는 말들은 불성실과 자기혐오, 나태와 패배감을 긍정하는 게 아닐 것이다. 사람들은 이 따뜻한 위로에 얼마나 뜨거운 노력이 있었을지는 생각하지 못한다. 유튜브를 만들고, 강연을 기획하고, 책을 써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게 '최선을 다하지 않고선'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말이다.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는 초반의 어색함을 뒤로하고 한 자 한 자 묵묵히 나아가 상처받기 싫어 꽁꽁 싸매둔 뽁뽁이를 톡톡 터트리며 우리네 마음에 도착한다. 거대한 해일이 온몸을 덮치는 게 아니라 발 앞에서 찰랑대던 파도가 어느덧 발등을 적시며 촉촉이 스며든다. 두 작가가 들려주는 오직 '자기만의 생'을 듣고 있으면 두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문장은 독특하고, 유머가 넘치고, 삶에 대한 조용한 환희로 가득하다.


나는 이 책이 이 모든 아름다움을 절단당한 채 오로지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는 '짤'로 남을 까 두렵다.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는 말은, 가진 힘을 모조리 쏟아낸 뒤 불현듯 찾아온 공허에 마음을 데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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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 리터러시 - 혐중을 넘어 보편의 중국을 읽는 힘
김유익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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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중국은 어떤 의미일까? 전근대와 근대의 수백 년 간 중국은 천하의 중심이었고, 중화의 본토였으며, 사대의 대상이었다. 대중화가 북방의 유목민족에게 완전히 패해 멸망한 뒤에도 그 주종의 관계는 끝내 살아남아 오히려 신하가 주인의 정신을 계승했다는 소중화에 갇히게 되었다. 그 뿌리가 너무 깊었는지 내 윗세대는 확실히 중국에 대한 모호한 환상을 품고 있는 것 같다. 이색적 풍광을 끝도 없이 내놓는 광활한 대지, 춘추와 전국을 수놓은 철학자, 화산과 곤륜을 지배한 강호인의 향연.


한국이 경제 발전을 이루고 최근엔 문화 분야에서까지 막대한 영향력을 갖게 되면서 이 관계는 완전히 뒤집어졌다. 요즘 사람들에게 중국은 모든 분야에 짭퉁이라는 독극물을 풀어놓은 파렴치한 나라이자 공중도덕을 지키지 않는 미개한 민족, 질병을 퍼뜨리고 인권을 탄압하는 비윤리적 독재국가에 불과하다.


정치, 문화적으로 여전히 후진 나라가 짭퉁을 팔아 돈 좀 벌었다고 대국의 행세를 하니 여간 웃긴 게 아니다. 대국의 자부심이 단순히 권력자들만의 인식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중화 민족주의로 무장한 인터넷 세상의 키보드 워리어들을 보라. 그들은 김치가 파오차이의 아류라며 한국을 도둑놈 취급하고 한복을 자기네 전통 복장이라고 우길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역사까지 중화민족의 것으로 둔갑시키려 한다. 중국은 확실히 혐오하지 않기가 더 어려운 나라다.


하지만 한 번 생각해 보자. 어떤 나라든 경제가 발전해 세계의 이목을 끌면 동시에 민족주의가 싹을 틔운다. 한국인에게는 국뽕이 없을까? 유튜브에는 놀라운 한국 문화에 충격을 받은 외국인들의 비디오가 넘쳐난다. 두 유 노우 김치? 두 유 노우 강남스타일? 두 유 노우 BTS?


반한감정과 혐중정서는 두 나라의 경제 발전에 약간의 시차가 발생하면서 생긴 자연스러운 결과물처럼 보인다. 반한은 꿀 수 있는 최고의 꿈이 고작 소중화였던 나라가 세계에 가하는 충격에 대한 시기이고, 혐중은 언제까지나 미개한 나라로 남을 것 같았던 후진국이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면서 생긴 공포가 원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는 결국 누가 먼저랄 것도 없는 쌍방의 문제다. 중국인에게는 중화 중심주의가 존재하고 한국인에게는 국뽕이 있다. 중심과 뽕은 관계에서 상대방을 대등한 존재로 인정하지 않고 우열을 세우려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이 우열 가리기는 누가 보편이냐는 싸움이기도 한데, 한국을 비롯한 서구 세계는 유독 중국의 것들을 특수하게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당신에겐 전 세계 인구의 20%가 믿고 따르는 신념과 행위를 특수하다고 볼 용기가 있는가?). 한국은 이 보편의 싸움에서 현명한 지저스처럼 중국은 중국의 것이고, 한국은 한국의 것이며, 서구는 서구의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소중화가 트라우마인 이 나라는 그 정신적 공백을 서구적 가치관으로 채워 넣어 자기만의 길을 가려는 이웃나라를 이른바 Global Standard에 미치지 못하는 후진국으로 재단한다.


한편 이 혐오가 실재하는지에 대한 의문도 가져볼 만하다. 한국에서 연쇄 살인마가 잡혔다고 해서 한국인 전체를 연쇄 살인마로 볼 수 없듯이, 중국에 한국을 혐오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중국인 전체를 반한론자로 싸잡아 비판할 수는 없는 법이다. 게다가 우리는 이 세상을 직접 보고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를 통해 인식한다. 일부 채널의 과격한 메시지를 세계의 전부로 착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럴 땐 집단에서 벗어나 시민과 시민으로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 좋다. 그러니까 관계의 두 축을 중국인과 한국인으로 놓는 게 아니라 탕웨이와 나로 세워보는 것이다. 그러면 우린 육아의 고민을 공유하고, 맛있는 막걸리에 환호하는, 평범하고 대등한 인간이 된다.


저자는 이 책의 핵심 내용이 '우리의 물리적 '부근' 혹은 '주변'과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깊이 관찰하고 이해하기 위한 방법론'(p.20)이라고 말한다. 관찰의 좋은 점 중 하나는 자기를 객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객관화가 잘 되면 자신이 부당한 처지를 당했을 때 분노하기보다는 그 원인을 찾으려 노력한다. 또 원인을 알고 나면 차분하고 합리적으로 해결 방안을 강구하게 된다.


중국이라는 나라는 한반도를 똑 떼어 다른 곳에 붙이지 않는 이상 인류의 역사가 다 할 때까지 우리와 함께할 이웃나라다. <차이나 리터러시>는 우리가 이 이웃나라를 어떻게 바라보는 것이 좋을지, 그리고 그들과 관계를 맺을 때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게 좋을지에 대한 나름의 궁리를 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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