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61 | 62 | 63 | 64 | 65 | 66 | 67 | 68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 하워드 진의 자전적 역사 에세이, 개정판
하워드 진 지음, 유강은 옮김 / 이후 / 201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이 말은 지난 오랜 시간 나를 괴롭혀왔던 위대한 중립주의자들에게 그들의 행동이 진정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설명할 실마리가 되었다. 중립주의자들은 차분하고 지적이며 여유롭다. 고귀한 그들은 타인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는 문명인의 불문율을 지키려 짐짓 나의 말을 들어주는척 하지만 사실은 벌겋게 달아오른 두 볼, 주먹을 꼭 쥔 두 손, 흥분으로 갈라진 목소리를 유치하고, 감정적이며, 불확실하고, 편향적이라 생각한다. 그들은 그 모든 걸 온화한 미소를 곁들인 냉담한 눈빛으로 말한다.


달리는 기차 위에 왜 중립은 없는지 생각해 보자. 여기 우측으로 질주하는 기차가 있다. 꼬리칸에 탄 사람들은 이를 좌측으로 달리게 하거나 적어도 멈춰 세워 어디로 가야할지 고민해보려한다. 그들은 이 의견을 전하기 위해 기관실로 향한다. 그런데 기관실에서 보내온 직원은 그들에게 이 기차는 우측으로 가고 있는게 아니며 더 이상 소란을 피우면 기차에서 내쫓겠다고 위협한다. 꼬리칸 사람들이 창문을 가린 커튼을 걷고 밖을 내다본다. 직원의 말이 뻔뻔한 거짓말이라는 걸 알아챈다. 이제 꼬리칸 사람들의 행진에는 피의 대가가 따른다. 바닥에는 축 늘어진 부상자들이 즐비하고 죽음과 추방의 위협은 어린이와 어른을 구분하지 않는다. 이때 위대한 중립주의자들이 그들 앞에 나타난다. 당신들은 왜 이 기차가 우측으로 달린다고 생각하는가? 기관사는 분명 그렇지 않다고 말하지 않는가? 설령 당신들의 말이 맞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이렇게 많은 피를 흘리는 게 정당한가? 당신들은 그렇다고 하고 기관사는 아니라고 하니 나는 판단할 수 없다. 나는 중립을 지키겠다.


기관사 여러분, 우리가 당신들의 말에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꼬리칸 사람들이 맞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건 우리는 이 모든 소동과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당신들이 무슨 짓을 벌이든 우리는 객실에 앉아 조용히 독서를 하겠습니다.


말하고 그들은 자신의 의자에 얌전히 앉는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중립의 허구성이 드러난다.


달리는 기차 위에서 중립을 선언한다는 건 기차의 질주 방향에 몸을 싣겠다는 의미다. 무거운 엉덩이를 딱 붙이고 앉아 아무리 꼼짝 안한다 해도 기차의 움직임을 멈출 수 있는 건 아니다. 진정한 중립이란 기차에서 내리는 것, 즉 이 사회에서 떠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중립주의자들은 기차 안에서 침묵을 지키는 걸, 그렇게 기차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걸 지켜보는 게 중립이라고 생각한다.


역사는 달리는 기차와 같다. 이 비유에서 중요한 건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역사는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그 방향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은 역사에 고삐를 채워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마음에 드는 사람들은 박차를 가해 속도를 높인다따라서 중립을 선언한다는 것, 아무런 방향도 선택하지 않는다는 건 '현재의 방향을 받아들이겠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그들은 단호히 중립을 선언하지만 결코 멈추지 않는 역사는 그들을 '특정 방향'으로 실어간다. 이것이 바로 달리는 기차 위엔 중립이 없는 이유다.


하워드 진은 1922년 뉴욕의 빈민가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유대계 이민자의 2세였던 그는 조선소에서 하급 노동자로 일하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다. 이후 제대군인 원호법에 따라 뉴욕 대학교를 졸업하고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가난한 이민자의 2세가 미국 최고 교육기관의 혜택을 입었다면 대개는 그 혜택을 이용해 상류 사회에 편입할 꿈을 꾸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는 인종차별이 극심한 미국 남부, 그것도 흑인 대학의 역사학 교수가 되어 정든 뉴욕을 떠난다. 물론 그에게 대단한 인권 의식이 있었던 건 아니다. 빈민가 출신답게 그는 유색인종과 친밀했고, 그래서 자기가 잘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며, 결정적으로 그에게 교수직을 제안한 대학이 거기 밖에 없었으므로 그것을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이후 그의 인생은 극심한 진보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가게 된다.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는 하워드 진이 차별과 폭력, 전쟁과 비인륜이라는 가시밭 길을 맨발로 걸으며 기록한 에세이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 미국을 휩쓴 각종 인권, 반전 운동에 이름을 올리며 만인의 자유와 평등, 평화를 위해 싸웠다. 그 역사적 기록들이 사실 우리와는 그닥 관련이 없어 이 담담한 회고록은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이 시사하는 바를 적어도 하나만큼은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으며 최근에 우리가 광장에서 이루어 낸 일을 돌이켜봤을 때 그 이해는 확신으로 이어지기에 충분했다.


세상을 바꾸려는 의지가 있고, 그 의지를 소리내어 말하고, 그 의지를 행동으로 옮기면, 반드시 거기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진보(이 말이 불편하다면 변화)의 가시밭길은 나 홀로 걷는 외길이 아니다. 흐름 속에서 보면 우리는 때때로 웅덩이에 갇히고 바위에 부딪혀 길목에서 맴돌지만 역사적 관점에선 다양한 지류가 큰 강을 이루고 큰 강들이 비로소 거대한 바다에서 합쳐지는 형국으로 보여진다.


"투쟁의 과정에서 낡은 질서의 힘은 부식되기 시작하고 사람들의 생각은 변화한다. 저항하는 사람들은 일시적으로 패배하지만 분쇄되지는 않으며, 결국엔 다시 일어나 반격을 재개한다.


역사의 모든 일은, 일단 벌어지고 나면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됐을거라 믿는 필연성의 유혹에 직면한다. 결과를 보고난 뒤에는 그것과는 다른 모습을 상상하긴 쉽지 않다. 그러나 나는 역사의 불확실성을, 뜻밖의 일이 벌어질 가능성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바꾸기 위해 그 무엇보다도 우리의 행동이 중요함을 확신한다." (본문 중)


하워드 진은 1922년에 태어나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87년이다. 그는 자신의 두 눈으로 변화를 목격하고 자신의 두 손으로 그 변화를 이끌어냈다. 그가 증명한바에 따르면 역사는 기필코 나아간다. 어디로? 우리가 향하는 곳으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이지 않는
폴 오스터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폴 오스터의 책들은 대부분 지루한데 그 정도를 다음과 같이 구분하겠다.


미치도록 지겨움: 환상의 책

뭔가 있는 것 같아 계속 읽기는 하는데 어쨌든 지겨움: 뉴욕 삼부작, 거대한 괴물, 보이지 않는

재밌지만 적당한 선에서 끝내줬으면 더 좋았을 지겨움: 공중곡예사

완벽하지만 뒤에 실린 부록 때문에 지겨움: 빵 굽는 타자기


자, 이 책은 뭔가 있는 것 같아 계속 읽기는 하는데 어쨌든 지겨운 범주에 속한다. 이 범주에 속한 3권의 공통점은 모두 스릴러, 서스펜스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갑작스런 실종, 미지의 남자, 살인.


장르 문학의 속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게 포스트모던 문학의 특징인데 이는 언젠가 보르헤스의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며 쓴 것 같으므로 오늘은 생략하겠다. 보르헤스의 포스트모던이 신화적, 환상적 이야기에 뿌리를 대고 있다면 폴 오스터는 확실히 도회지 출신다운 세련된 면이 있다. 그는 환상적인 이야기를 쓰지만 배경은 언제나 눈에 잡힐듯한 현실이다. 보르헤스를 아예 읽지 못하는 사람도 폴 오스터를 읽는 건 가능할 것이다. 물론 지겨움을 잘 참아내야하긴 하지만.


<보이지 않는>은 그 동안 내가 읽어온 폴 오스터의 책 중 가장 노골적으로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포스트모던!)를 하는 이야기다. 작품은 과연 작가의 손에서 완결되는가? 작가가 결론을 내린 이야기는 거기서 생명을 잃고 박제된 채로 영원히 살아가는가? 독서란 행위의 본질은 무엇인가? 독자는 독서를 통해 이야기에 개입할 수 있는가? 독자는 작가가 박제한 진리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는가?


포스트모던 문학에서 이야기는 그 자체가 하나의 주제가 된다. 그들은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를 함으로써 이야기가 발화자의 입에서 완결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려 한다.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청자이자 동시에 화자이므로 작가와 독자의 관계를 흐릿하게 만든다. 독자는 이야기의 신전에 앉아 작가의 계시를 받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자기가 받은 계시를 스스로 이야기하며 그 이야기가 그 계시와 얼마나 일치하는지에는 관심이 없다.


폴 오스터는 자신의 자아를 두 개로 나눠 <보이지 않는>의 화자로 등장시킨다. 이 책의 1부는 대학 시절의 폴 오스터(작중 인물 워커)가 주인공이며 그가 보른이라는 정체불명의 교수를 만나 겪는 신비한 일을 다룬다. 2부는 성공한 소설가 폴 오스터(작중 인물 짐)의 시점으로 쓰였으며 한 때 대학 친구였던 워커가 자신이 쓴 소설 원고(이 책의 1 부)를 소포로 보내면서 시작한다. 둘은 편지를 주고 받으며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짐은 1부를 탈고한 이후 더 이상 진전이 없던 워커에게 중요한 실마리를 던져 그가 다시 원고 앞에 앉게 한다.


3부는 워커가 죽기 직전 남긴 원고인데, 온전한 문장이 아니라 일종의 개요였다. 아마도 3부가 온전한 문장으로 <보이지 않는>에 실린 이유는 짐이 워커의 개요를 토대로 3부를 완성했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 4부는 짐이 워커의 누나를 만나 그의 원고에 대해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누나는 짐에게 워커의 원고를 다듬어 한 권의 책으로 완성해주길 원한다. 그리고 짐은 수락한다. 따라서 우리가 읽은 <보이지 않는>은 워커의 원고를 토대로 짐이 쓴 소설일 것이다.


그렇다면 잠깐만.


<보이지 않는>의 작가라고 소개되는 폴 오스터, 책의 표지에 버젓이 자신의 이름을 올린 이 뉴저지 출신의 신비주의자는 무엇을 한 걸까?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포스트모던 문학의 백미를 느낄 수 있다. 짐과 워커는 폴 오스터가 창조된 허구의 인물이지만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 속에서 마침내 자기들을 창조한 작가를 제거해버린다. 이 책의 진정한 작가는 누구인가? 짐? 워커? 폴 오스터? 아니면 그들 모두? 내 말이 말장난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폴 오스터가 짐과 워커로부터 원고를 받아 <보이지 않는>에 그대로 옮겨놓은 게 아니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작가의 권위는 사라지고 오로지 무한히 확장하는 텍스트만이 남는다. 진실을 확증해줄 절대 권력의(작가의) 부재로 인해 세상은 모호하고 불확실한 혼돈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하나의 진리를 파기함으로써 수백, 수천 만개의 새로운 진리를 획득한 것이다. 누가 진리는 오직 하나라고 말했는가? 끊임없이 원본과의(진리) 대조를 강요하며 진실인지 거짓인지 추궁하는 독재자는 포스트모던의 유희에 단단히 묶여 단두대의 칼날 앞에 목을 드러낸다.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 포스트모던이 단순한 말장난처럼 느껴지는가? 하지만 이런 생각이 정치, 사회적으로 해석될 때 탄생하는 의미는 당신의 생각을 고쳐줄지 모른다. 작가라는 절대 권력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화자가 되는 것. 권력에 짓눌리고 패배감에 젖어 수동적 좀비가 되는 것과 권위를 부정하고 이 세계를 자신의 손으로 재창조할 수 있다고 믿으며 광장으로 나가는 시민. 포스트모던의 바보같은 말장난이 정말 이것과 다르다고 생각한다면,


시간을 갖고 꼭 한 번 생각해보길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딱 90일만 더 살아볼까
닉 혼비 지음, 이나경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닉 혼비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은 재미다. 둘째는 캐릭터다. 훌륭한 캐릭터들이 위트있는 대사로 황당한 이야기를 만든다. 이것이 <딱 90일만 더 살아볼까>를 설명하는 가장 적합한 문장이다.


<하이피델리티>만큼 현실감이 있지는 않지만 그건 이 소설의 등장인물과 상황이 <하이피델리티>보다 더 황당하기 때문이다. 주요 등장인물은 총 네명으로 다음과 같다.


마틴: 전직 유명 토크쇼 주인공. 10대 소녀와의 섹스 스캔들로 사회에서 매장. 돈과 명예를 모두 잃고 나락으로 추락한 남자.


제이제이: 슈퍼 빅 밴드를 꿈꾸며 영국으로 넘어온 미국 락커. 한때 R.E.M의 매니저가 연락을 해 올 정도로 잘나갈 뻔 했지만(Almost Famous!) 팀은 해체, 피자 배달로 연명하는 남자.


모린: 중증장애 아들을 둔 50대 여자. 젊은 시절 딱 한번, 낯선 남자와 섹스 후 가진 아들이 바로 눈물의 씨앗이 된다. 단 한번의 실수로 평생 족쇄에 묶여 사는 불쌍한 여인.


제스: 언니가 행방불명된 후 소외감을 느끼고 방황하는 틴에이저. 타인에게 상처받기 전에 먼저 상처를 주는 전략으로 18년을 살아왔다. 그렇게 열심히 관계를 파괴하다 더이상 파괴할 게 없어지자 스스로를 파멸시키기로 결심한다.


보시다시피 이렇게 이상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렇게 클라스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한 권의 소설 속에서 이야기를 끌어갈 수 있을까? 그건 이 네명이 희망과 열의와 사랑과 우정과 온갖 종류의 다짐, 온갖 종류의 의지가 뒤섞여 광란과 흥분의 시간을 만들어내는 신년 이브, 우연히 토퍼스 하우스 옥상에서 마주치기 때문이다. 처음엔 마틴 그리고 모린, 제스, 제이제이의 순서로. 그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듯 찬바람 아파트 옥상에서 서로를 마주한다. 목표는 같다. 옥상 밑으로 뛰어내려 자신의 대갈통을 더러운 보도 위에 짓이기는것!


자살을 결심한 네 명이 우연히 한 장소에서 만나 서로의 사연을 공유하고 어느새 모락모락 피어오른 애정의 열기 속에 그들을 다시 한번 생에의 의지를 불태우고... 같은 뻔한 이야기가 예상되지만 그건 닉 혼비를 너무 얕잡아 보는 것이다. 참신한 문장을 쓰지 않으면 자동으로 전기 충격이 가해지는 고문 의자에 앉아 집필을 하는 듯 닉 혼비는 혼신의 힘을 다한 블랙코미디를 발작적으로 전개한다. 때로는 그 강렬한 독설에 마음이 마비되기도 하지만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후려갈기는 그의 문장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갖고 싶은 탐나는 보물이다.


닉 혼비가 자살을 너무 희화화하는 건 아니냐고 느낄 수도 있지만 얘기를 들어보라. 사실 중증장애 아들을 둔 모린의 실제 모델이 닉 혼비 본인이다. 그는 첫 결혼에서 낳은 첫 아들이 생후 18개월 중증자폐아라는 진단을 받는다. 이쯤에서 우리는 절망을 이기는 방법에 대한 어렴풋한 실마리를 쥐게 된다. 하나는 고백이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거란 걱정은 버리고 마음 속에 응어리진 고통을 입 밖으로 뱉어내는 것이다. 그것이 설령 지나치게 희화화된다 하더라도 그건 조롱이나 좌절의 의미가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한다. 그것은 일종의 치유다. 유머는 사실 가장 비극적인 상황에서 잉태되는 눈물의 열매인 것이다. 고난의 체에 거르고 걸러진 슬픔이 순도 높은 정수가 되어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세우고 마침내 열어내는 꽃. 그것마저 시련의 바람에 떨어지고 나면 그 밑에서 잔뜩 웅크리고 있는 황홀할정도로 새까만 빛을 내뿜는 열매 하나를 얻게된다. 그게 바로 유머인 것이다. 


고난을 당해본 사람들만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안다. 하지만 내 바람은 여러분들이 평생 이 말의 뜻을 모르고 사는 것이다. 그럴수만 있다면, 그럴수만 있다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 권으로 읽는 일제강점실록 한 권으로 읽는 실록 시리즈 9
박영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끝으로 '한 권으로 읽는 실록' 시리즈는 완전히 막을 내린다. 나는 조선 왕조 실록과 세종대왕 실록을 읽고 일제강점기로 넘어왔는데 개인적으론 이 책이 가장 지루했다.


본기를 편년체로, 이후 열전을 덧 붙이는 방식으로 단원을 마무리하는 건 시리즈 전체가 대동소이 하지만 이상하게 이번 책은 본기와 열전의 내용이 많이 겹치는 기분이다. 그것도 단락을 넘나들면서 말이다. 아무래도 일제강점기는 왕조실록이 기술한 시간보다 훨씬 짧고 따라서 강점의 시작부터 끝까지 생존해 있었던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사건과 인물이 중복 등장할 수 밖에 없었지 않나 싶다.


내가 이 책을 지루하다고 생각한 또 하나의 이유는 아마도 내가 이 시대의 인물과 사건을 잘 모르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우리의 역사 교육은 대개 이 시점이 본격화 되기 전에 끝나버린다. 안창호, 안중근, 김좌진, 김구 우리가 거론할 수 있는 독립운동가들이 뻔하디 뻔하다는 사실은 우리의 빈약한 역사 교육을 반증한다. 나는 때때로 그 시대에 대한 우리의 분노가 정확히 누구, 어떤 대상을 향한 것인지 잘 모르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대상없는 분노는 그저 우리를 미친 사람으로 보이게 할 뿐 누구에게, 왜, 어떤 반성을 받아내야 하는지, 그 행동의 방향을 정확하게 가리키지 못한다우리의 과거는 여전히 청산되지 못한 채 뚝뚝 피를 흘리며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다. 어쩌면 그 이유가 주변국의 뻔뻔함이 아니라 우리의 빈약한 역사 인식에 있는 걸지도 모른다.


어째서 강점기에 대한 드라마는 나오지 않는 걸까? 따지고 보면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하고 한 많은 시절 아닌가? 이야기가 쏟아져도 수백 개는 쏟아질 수 있는 시기다. <야인시대> 같은 드라마가 있기는 했으나 역사 드라마라기 보다는 그냥 주먹질 얘기에 불과했다. 일제가 철수하면서 당시의 역사를 철저히 지웠거나 조금 음모론을 덧붙이면, 그 역사가 대중 속으로 깊숙히 파고들어가는 걸 원치 않는 권력 집단이 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그 시대의 인물과 사건을 정확하게 배워 알고 있었다면 이 책은 이 정도로 지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처음 들어보는 인물 처음 들어보는 사건이 내러티브 없이 단순 사실만으로 채워지면 아주 지루한 보고서가 될 수 밖에 없다. 안타까운 현실이고, 반성해야 할 사실이다. 내 생각에 이 책은 기존 시리즈의 구성을 완전히 탈피했어야 했다. 사람들의 흥미를 확실히 끌 수 있는 주제는 당시의 친일파들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추적이다. 이대 초대 총장인 김활란이 대단한 친일파였다는 사실과 그 유명한 사립명문 휘문이 친일파 민영휘가 설립한 재단이라는 말은 우리의 인식을 깨우기에 충분하지 않은가?(물론 현재 휘문의 이사장은 민영휘의 셋째 아들의 후손으로 친일 행위로 축적한 재산을 찾기 위해 국가와 소송을 벌이는 첫째 자손들과 명백히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 쐐기를 박으려면 근대 자본가들이 자본을 축적한 방식과 그것이 현재 어떤 회사, 어떤 집단의 재산으로 승계되었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아마도 이 일이 너무 방대하고 까다로우며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사안이기 때문에 한 권의 책에 담기엔 적합치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시리즈와 결이 맞지 않는 부분도 있고 말이다. 그러나 이유가 어쨌든 이 책은 상당히 아쉽다. 가장 정열적으로 다뤄야 할 36년이 단순한 사실의 나열로 그치는 건 이 책의 팬들에게 강한 아쉬움을 남길 게 분명하다. 작가가 수 십년간 쏟아부은 땀과 노력에는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일제강점기를 한국의 근대사로 봐야할지 망국의 왕조사로 봐야할지 잘 모르겠다. 그 시간은 우리 모두에게도 큰 트라우마라 어두운 단지 밑에서 악취나는 시간을 꺼내 세세히 분류하고 파악하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저 읽는 사람이기에 이런 책이 더더욱 많아져야 한다고 너무나 쉽게 말한다. 윤동주가 쉽게 씌어진 시를 창피해하듯 나는 이 말을 너무나 쉽게 꺼내는 내가 창피하다. 하지만 읽는 것, 그래서 깨우치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그 정도인 것 같다. 부족하지만 이렇게라도 보탬이 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
김은주 지음 / 봄알람 / 201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양 철학사의 계보에서 여성 철학자가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더 놀라운 건 내가 숱하게 서양 철학사를 접하면서도 그 사실을 단 한 번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성은 고대의 일부 문화에서(현재도 일부의 원시 문화에서), 아주 짧은 시간을 제외하면 늘 사회적 약자에 머물러왔다. 심지어 여성이 인간의 한 종류로 취급된 것도 꽤 최근의 일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성을 조애, 즉 동물과 같은 비이성적 존재로 분류했다. 여성들이 참정권을 얻게 된 건 그 위대한 진보적 선진국에서 조차 채 100년이 되지 않는다.


한 마디로 철학이 말하는 인간은 남성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들이 논하는 세계의 보편은 남성의 보편이지 결코 여성을 포함한 보편이 아니었다. 철학은 아주 오랫동안 여성을 배제해 온 것이다. 왜? 보편의 세계에 편입하기에 여성은 예외적 존재였고 비이성적 행동과 감성에 지배받는 예측 불가능한 괴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예수라는 사람이 보편적 사랑을 논하며 수고롭고 짐 진 자 모두를 하나로 묶는 모험을 감행했지만 그의 사후 교회는 철저히 여성을 쫓아냈고 그들의 역사에서 여성의 흔적을 지우기에 급급했다. 로마 가톨릭은 아직도 여자 신부를 용인하지 않는다. 일부 개신교의 목사들은 '여자가 생리대를 차고 교단에 오르는 건' 용납할 수 없다고 말한다.


20세기에 이르러 여성들이 철학사에 등장하기 시작하지만 그저 주변부를 맴돌 뿐이었다. 한나 아렌트 조차 초창기에는 그녀 자신으로서 보다는 하이데거의 연인으로 더 유명했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을 집필한 뒤 한나 아렌트가 없었다면 결코 그것을 완성하지 못했을 거라고 말했지만 이는 여성이 아직도 남자의 뮤즈나 위대한 '지지자'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이 책은 20세기에 등장한 6명의 여성 철학자 또는 사상가의 삶과 철학을 짤막하게 소개한다. 어떠한 계보로 묶인 것은 아니지만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세계, 대립과 차별을 낳는 이분법적 세계관, 거기서 소외된 경계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경험들을 독특한 사상으로 풀어낸 철학자들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크게 두 가지의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됐다.


첫째, 페미니즘은 단지 가부장제의 반담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남자가 갖지 못한 여성만의 특징을 강조할수록 여성은 과도하게 신격화 되어(예컨대 생명을 창조하고 보호하고 기르는 숭고한 존재) 스스로 그 판단에 취해 결국 가부장제가 지키려는 이분법을 더욱 강화시키는, 그리하여 그 체계에 포섭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여성은 남성과 다른 '또 하나의 인간'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여야 한다. 페미니즘의 목표는 여성을 남성과 똑같은 자격을 가진 존재로 인정 받는 것으로 그쳐선 안된다. 이러한 논의는 결국 남성의 '승인'을 필요로 할 뿐만 아니라 여자답지 못한 여자, 혹은 남자답지 못한 남자를 경계 밖으로 몰아내는 폭력을 자행한다. 여자는 절대로 '또 하나의 남자'가 되서는 안된다.


둘째, 보편이라는 이름이 가진 폭력성이다. 모든 문제는 우리가 세계를 개념으로 이해하려는 것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제인'이라는 인간을 파악할 때 그녀를 여자, 엄마, 혹은 주부라는 개념 안에서 이해하려 한다. 하지만 개념이란 개개의 개체가 가진 다양하고 모순적인 개성이 지워진 파편에 불과하다. 우리는 개인을 특정한 범주로 묶어 이해하려는 태도를 거부해야 한다. 인간은 결코 개념으로 기술될 수 없고 개념으로 기술된 인간은 팔이나 다리, 혹은 눈, 코, 입이 사라진 불구로서 쓰여질 뿐이다.


그러니까 보편 개념이란 일종의 라이센스와 같은 것이다. 세계의 지배자들이(그들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끊임없이 우리편인지 아닌지를 묻기 위해 만든. 그리하여 자신의 세계로 받아들여야 할지 말지를 결정하기 위한 증명서 말이다. 우리는 이러한 자격증을 과감하게 찢어 버려야 한다. 그 자격이 주어졌을 때 따라오는 사회적 이득을 포기해야 한다. 모두가 그것을 포기할 때 자격은 더 이상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우리 모두가 믿기를 거부한다면 신조차 이 세계에서 지워버릴 수 있거늘 하물며 인간이 만든 제도나 규범이 문제겠는가?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는 175p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책이지만 내용은 결코 만만치 않다. 개념이 어려운데다 생소하기까지 하다.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해 이 책을 세 번이나 읽었다. 정확히 들어맞는지는 좀 더 생각해 봐야 할 문제지만, 나는 이 책의 본문을 인용하여 그 난해함을 옹호하려 한다.


쉽게 읽히는 글은 이미 우리가 복종하고 있는 문법과 사상 그리고 문화를 내포한다. 우리는 이러한 전제를 잊고, 글을 읽고 이해했다고 착각한다. 그런 쉬운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오래된 낡은 집단 안에 깊이 묶여버려,


새로운 사고와 관점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p.6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61 | 62 | 63 | 64 | 65 | 66 | 67 | 68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