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컷들 - 방탕하고 쟁취하며 군림하는
루시 쿡 지음, 조은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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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컷들의 영원한 친구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이렇게 썼다.


"암컷은 착취당하는 성이며, 진화의 근본적인 차이는 난자와 정자에서 비롯된다."


성과 성역할에 대한 신화는 뿌리가 깊다. 여성은 조신하고 신중하며 모성으로 알을 품는다. 알을 품으려면 모성이 있어야 하는데 모성은 말 그대로 엄마에게만 존재하므로 출산과 육아는 암컷의 몫이다. 그것은 자연이 정해놓은 섭리다.


암컷은 조신하고 신중하기 때문에 짝짓기 때도 어두운 관객석에 앉아 신나게 춤을 추는 무대 위 수컷들을 수줍게 바라본다. 수컷은 포식자의 눈에 잘 띄는 화려한 깃털을 휘날리며 가장 마음에 드는 암컷 앞에 선다. 암컷은 못 이기는 척 수컷의 손을 잡고 으슥한 풀숲으로 이동한다.


선택은 수컷의 몫이므로 진화의 바퀴를 굴리는 것도 수컷이다. 암컷은 그 선택을 받아들일 뿐이다. 생물학을 지배해 온 이 가부장적 프레임은 우리가 이 쇼를 다른 관점에서 해석할 여지를 삭제해 왔다. 혹시 암컷은 관객이 아니라 심사위원이었던 게 아닐까? 수컷이 그 무의미하고 에너지 비효율적인 행동을 수백만 년간 유지해 온 이유는 선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선택당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냐는 말이다.


야생에는 강간이 횡행한다. 암컷이 강제로 교미를 당하는 모습은 정말 처참하다. 작은 암컷이 몸짓이 큰 수컷을 당해낼 수는 없다. 이 관점에서 암컷은 결국 착취당하는 성이며 진화의 바퀴를 굴리는 건 다시 수컷이 몫이 된다. 그러나 이 사건 전후로 벌어지는 암컷의 '교활한 음모'는 눈을 번쩍 뜨게 만든다. 암컷의 생식기는 능동적인 기관이다. 그들은 "생리, 화학적 특성을 이용해 정자를 보관, 분류, 거부할 수 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수컷의 정액은 갖다 버리고, 선택된 정자는 난자로 가는 직통 노선에 올라 적극적으로 이동 속도를 높이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미로 같은 통로 속에서 헤매다 끝나게 할 수도 있다."(p. 199) 게임을 시작하는 건 수컷이지만 이기는 건 암컷이다.


작고 수동적이며 안전지향적이라 모험과 도전을 모르는 암컷과 자기의 우수한 유전자를 사방팔방 뿌리도록 진화한 수컷. 이 성신화는 수컷의 외도와 암컷의 정절을 자연의 섭리로 정당화했다. 암컷은 작고 약하며 수컷은 크고 강하다는 편견은 수컷 중심의 위계와 지배를 당연시하는 구실이었다.


세상에는 이 신화들이 말 그대로 신화일 뿐이라는 증거가 차고 넘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짜 뉴스가 세상을 지배하는 이유는 과학계가 남성의 소유물이었기 때문이다. 최근 재미있게 보고 있는 애플 TV의 <레슨 인 케미스트리>에서 주인공이 한 남자 화학자에게 생각나는 여성 과학자의 이름을 아는 대로 대보라고 말한다. '마리 퀴리'. 나와 그 남자는 이 이름 외에 어느 것도 말할 수 없었다.


생물학자들은 기존의 이론을 뒤집을 반증이 발견되었을 때 그것을 단순한 예외로 치부해 왔다. 벌과 개미는 여왕을 정점으로 한 사회를 구성하는 '매우 특이한 생물'이다. 수컷보다 암컷이 훨씬 크고 강한 사마귀는 '아주 보기 드문 곤충'이라 할 수 있다. 마다가스카르 숲에 터를 잡은 베록스시파 여우원숭이 사회에서는 알파 암컷이 무리를 지배한다. 그곳에서 수컷은 이등 시민이다. 포유류가 구성한 공동체에서 이런 사례는 '매우 드문 일'이다.


<암컷들>은 이런 신화들이 진화생물학의 최전선에서 어떻게 박살 나고 있는지 보여준다. 암컷들의 놀라운 생태를 읽고 있으면 이게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세계가 맞나 싶을 정도로 충격적이다. 심지어 자연계에는 명확한 암수 구분조차 그리 흔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여남과 암수로 구분된 세계야말로 진정 '예외'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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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또 내일 또 내일
개브리얼 제빈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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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히 <닥터스>의 IT 버전이라 부를 만하다. <닥터스>는 <러브 스토리>로 유명한 에릭 시걸의 소설로 하버드 의대생들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다. 어릴 때부터 친했던 두 친구 바니 리빙스턴과 로라 카스텔로가 그 주인공이다. 둘은 서로를 그냥 친한 친구로 생각했으나 각자의 삶을 수십 년 살고 나니 역시 나에겐 너밖에 없었다는 깨달음을 얻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잘 산다는 이야기다. 둘 사이에는 모든 것이 완벽하고 매력적인 흑인 친구 한 명이 있어 중요한 구심점이 돼준다. 이 흑인 친구는 똑같이 의사를 꿈꿨으나 피부가 검다는 이유로 무차별 폭행을 당해 손을 쓸 수 없게 되었다. 그는 결국 외과 의사를 포기하고 변호사가 된다!


여기서부터는 스포가 되니 읽기에 주의를 기울이기 바란다. 바니 리빙스턴을 샘으로 로라 카스텔로를 세이디로 흑인 친구를 마커스로 대체한 뒤 각각을 MIT, 하버드의 컴공과로 바꾸면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의 이야기를 얼추 맞출 수 있다. 세월이 흐른 만큼 인종적 다양성을 추구하는데 샘은 한국계, 세이디는 유대인, 마커스는 일본계다. 이들은 <닥터스> 시대에는 최고였지만 이제는 한물 간 '의사'대신 게임 디자이너를 직업으로 택한다. 하지만 이야기에서 차지하는 각자의 역할은 <닥터스>를 빼다 받은 듯 선명하다.


두 소설을 비교하며 나는 감초 역할을 하는 세 번째 친구가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데 얼마나 유용한지 배울 수 있었다. 이 친구는 때로는 두 사람의 갈등을 조절하고 때로는 위기에서 구해내며 그러면서도 미움을 받지 않아야 한다. 마치 고대 연극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이야기가 막히거나 지루해질 때쯤 전능을 발휘해 활로를 열어준다. 그러다 보니 이 친구는 돈도 많고 외모도 뛰어나며 심지어 지적으로도 두 사람을 능가한다. 그러면서도 주인공들과는 어떠한 이성적 관계도 맺지 않는다. 그야말로 무성의 신이 캐릭터로 형상화한 것이다.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은 마지막 부분에 살짝 변주를 가해 세 사람 사이에 긴장을 형성한다. 그 긴장에서 튀긴 불꽃이 결국 우정의 숲을 모두 불태워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지만 늘 그렇듯 새로운 희망은 절망에서 피어오른다. <라스트 제다이>가 <라이즈 오브 스카이워커로>로 이어지듯이.


이 방식이 새롭다고 볼 수는 없지만 나름 세련되게 윤색된 면은 있어 보인다. 모두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의 구조를 가져와 지금 시대에 맞춰 리모델링하는 것. 이것만 잘해도 베스트셀러 작가가 될 수 있구나. 사람들이 그토록 지루한 희곡을 쓴 셰익스피어를 이렇게 찬양하는 이유도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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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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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기억에 대한 소설이다. 이제는 지나간 옛일을 오늘의 내가 서술한다. 목소리는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다. 가을 햇볕이 아침나절 스며든 벽돌 담장에 손을 댔을 때 전해지는 온기처럼. 소설은 눈으로 좇을 수밖에 없지만 스며드는 감정은 이와 다르지 않다.


어떤 양자는 벽을 그냥 통과하고 어떤 양자는 그렇지 않다. 광자는 빛의 최소 단위이고 광자는 양자다. 우리는 어떤 광자가 벽을 통과하고 어떤 광자가 그러지 못하는지 알 수 없다. 그것은 단지 확률로 기술될 뿐이다.


우리 삶을 구성하는 시간에도 비슷한 면이 있다. 시간은 대부분 우리의 인생을 투과해 지나간다. 시간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바람이다. 움켜쥘 수도, 멈춰 세울 수도 없다. 그런데 어떤 시간은 우리 삶을 강타한 뒤 튕겨져 나온다. 그 충격으로 삶은 멈춰버린다. 시간은 커다란 덩어리가 되어 우리 몸의 일부가 된다. 우리는 그것을 기억이라 부른다. 이후의 삶은 예기치 않게 더해진 이 이물을 녹이고 삭이는 일들로 채워진다. 멈췄던 시간은 어느덧 다시 흐르고 기억은 우리 몸에 골고루 퍼져 은은한 잔향을 남긴다. 가을 햇볕이 아침나절 스며든 벽돌 담장, 거기서 전해지는 온기처럼.


어떤 소설들은 이야기 이상을 담는다. 그런 소설들을 읽고 나면 무언가 깨닫게 된다. 진리라는 말은 거창하고 낯 간지럽고, 또 너무 명확하다. 확실히 뭔가를 알게 됐다는 게 아니다. '알 것 같다'는 느낌이다. 그 모호함이 오히려 내 삶을 나아가게 만든다. 도착한 그곳이 종착지가 아니기 때문에. 나는 이 '알 것 같다'는 느낌을 간직한 채 다시 일상을 살아간다. 언젠가 이 느낌은 다시 기억 위로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다시 가라앉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다시 가라앉을 것이다.


앤드류 포터는 제임스 설터와 비슷한 면이 있는데 좀 더 따뜻하다. 설터는 마음에 공백을 남기고, 포터는 꺼내 올린다. 나는 이런 류의 소설을 정말 좋아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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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각본
김지혜 지음 / 창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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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 혈연을 기반으로 한 행복공동체가 아니라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하부 조직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족에는 아빠와 엄마와 아들과 딸과 크게는 사위와 며느리가 존재한다. 구성원들을 부르는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다. 호칭은 각각의 역할을 규정한다. 예컨대 아빠는 돈을 벌어오고 엄마는 살림을 하며 아들과 딸은 학업에 전념하여 입신양명하고 사회적 위치를 갖추고 난 뒤엔 부모를 공양한다. 자녀가 결혼하여 사위나 며느리가 생기면 조직은 분할하거나 확장한다. 호칭은 성별을 따르고, 호칭이 역할을 규정하므로 결국 가족 내에서의 직책은 '성'이 결정한다. 저자 김지혜 교수는 이것이 견고한 '각본' 같다고 말하는데, 실상은 조직도라고 불러도 크게 무리가 없어 보인다.


가족각본은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너무나 당연하고 평범해 자신이 각본을 따르고 있다는 것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이 역할이 자신을 대단히 괴롭힐 때도 있다. 그럴 때조차 우리는 이 역할 자체에 의문을 던지기보다는 각본을 잘 수행하지 못한 자신의 능력 부족에 괴로워한다. 남들은 다 하는 걸 왜 나는 하지 못하는가!


각본의 실체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은 성소수자 혹은 퀴어라고 불리는 인물이 가족의 구성원으로 등장할 때다. 이들은 가족각본이 정해놓은 역할을 꼬이게 만든다. 당신의 아들이 여성으로 성전환을 하거나 동성의 애인과 결혼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해 보자. 일단 호칭부터 문제다. 평생 아들로 불러왔던 그를 이제는 딸이라고 불러야 한다. 아들과 결혼한 동성의 애인은 뭐라고 불러야 할까? 그는 사위인가? 아니면 며느리인가? 둘 중엔 누가 아내고 누가 남편인가? 호칭의 혼란은 단순히 그들을 부를 때의 불편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호칭에는 기대되는 역할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족 안에서 누군가의 호칭이 바뀌면, 그의 역할도 달라진다.


2022년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는 활동가들의 앞에 피켓을 든 반대자들이 나타났다. 그들이 들고 온 피켓 중 특히 김지혜 교수의 눈길을 끈 것은 "남자가 며느리? 여자가 사위?"라는 문구였다고 한다. 동성결혼에 대한 거센 저항은 여느 나라든 마찬가지겠지만 며느리와 사위가 그 핵심으로 떠오른 나라가 또 있을까? 웃기는 일이다. 결혼이 두 사람의 행복을 위한 것이고 그렇게 결합한 공동체가 가족이라면 그 구성원이 남남이든 여여든 여남이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가족각본은 그것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어떤 세상을 꿈꾸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회가 젊은이들에게 결혼을 종용하는 이유는 결혼=출산=육아를 하나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특히 며느리가 중요하다. 우리나라가 레즈비언보다 게이 커플에 더 민감한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남자 며느리는 자기 배로 아이를 품지 못하고, 젖을 먹일 수도 없다. 아이가 자라는 데는 무엇보다 '엄마'의 손길이 필요하다. 남자 며느리는 심지어 직장을 관두지도 않을 텐데 과연 '제대로 된 육아'를 할 수 있을까?


가족 내에서 성역할이 고정되어 있는데 사회에서 성평등을 추구하겠다는 건 모순에 불과하다. 남편이 돈을 벌어오고 여성이 출산과 육아를 담당한다면, 직업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남자에게 더 많이 부여하는 것도, 남녀 간의 소득 격차가 벌어지는 것도 지극히 합당한 일이다. <가족각본>은 가족이 강제하는 각자의 역할이 단순히 가족 내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준다.


<선량한 차별주의자>에서도 그랬지만 김지혜 교수의 책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비틀어 새로운 세계를 맞이하는 충격을 선사한다.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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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 나는 무엇이고 왜 존재하며 어디로 가는가?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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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과를 선택한 이유는 문학적 감수성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이 얘기는 지난 <생물학의 쓸모>에서도 한 적 있다. 그런 감수성으로 이공계의 메인스트림을 맞닥뜨렸을 때? 솔직히 나쁘진 않았다. 아마도 내가 이 분야들을 이야기의 관점으로 접근했기 때문인 것 같다. 생각해 보면 나는 확실히 특정 분야 그 자체보다는 그것에 대한 '역사'를 더 좋아했다. 철학보다는 철학사, 과학보다는 과학사, 수학이 아닌 수학사, 기타 등등.


양자역학이 어쩌고 저쩌고, 데카르트가 어쩌고 저쩌고, 파인만이니, 파동함수니, 쿼크, 힉스, 페르미, 라마누잔, 가우스 아무튼 그들의 연구는 단 한 글자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들에 '대한' 이야기만 줄줄이 읊고 다니던 시절. 지금도 크게 달라진 건 없지만 창피하지는 않다. 링 위에서 뛸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그것을 우러러보고 사랑하는 마음을 무시한다면 우리네 평범한 인간은 모두 경멸 속에서 살아야 한다. 과학을 존경한다면 그걸 사랑하는 이도 존경받아야 한다.


나는 비록 본성을 거스른 일련의 선택 덕분에 수많은 수학, 과학 교양서를 거쳐 여기까지 왔지만 다른 문과생들은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유시민 작가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평생 문과들과 어울려 살았다. 공부를 할라치니 아는 과학자가 없어서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물어보지 못했다. 닥치는 대로 살아온 인생과 같이 우연히 마주친 과학 교양서를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는 꽤 많은 과학책을 읽은 문과생이 되었다.


유시민 작가의 말에 따르면, 공부는 그렇게 해도 되지만 남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줄 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한다. 과학과 인문학은 연구 대상과 방법이 다르고, 쓰는 말과 사고방식도 같지 않다. 과학자는 현상을 관찰해 가설을 추론하고, 실험과 분석으로 그것을 검증한다. 하지만 결과를 이야기할 때는 그 반대다. 이를테면 양자역학이 무엇인지 밝히고, 그것이 어떻게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냄새 맡는 세상을 만드는지 설명한다. 바로 이 순서가 문과에게는 좋지 않은 것이다.


물리학자도 잘 모른다는 양자역학을 제일 먼저 공부하라는 것은 '문과 학대'일 수 있다.(p. 290)


문과의 고충을 잘 아는 저자는 정확히 반대로 과학을 시작했다. 위대한 철학이든 사상이든 인간의 정신은 모두 뇌활동의 결과다. 그래서 시작을 뇌과학으로 했다. 그러면 생물학에 관심이 생기고 생명 현상을 확실히 이해하기 위해 화학을 들여다보게 된다. 원소주기율표를 이해하려면 양자역학을 알아야 하고 그러다 보면 우주론이, 바로 그 우주를 기술하는 언어인 수학에 호기심이 생긴다.


그래서 이 책은 정확히 이 순서를 따른다. 문과생이 과학책을 읽고 정리한 내용을 모은 걸 과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는 그 어떤 과학책보다 명료하다. 중언부언이 없고, 알쏭달쏭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이것이 무지의 소치라는 것을 배제할 수는 없다. 알면 알수록 모르게 되는 것이 학문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 호쾌함에 어딘지 모를 믿음이 생긴다. 최근에 이런저런 방송에 나오며 여러 과학자들을 사귀고, 그들이 감수까지 봤다고 하니 그냥 써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서당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했는데, 하물며 유시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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