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또 내일 또 내일
개브리얼 제빈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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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히 <닥터스>의 IT 버전이라 부를 만하다. <닥터스>는 <러브 스토리>로 유명한 에릭 시걸의 소설로 하버드 의대생들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다. 어릴 때부터 친했던 두 친구 바니 리빙스턴과 로라 카스텔로가 그 주인공이다. 둘은 서로를 그냥 친한 친구로 생각했으나 각자의 삶을 수십 년 살고 나니 역시 나에겐 너밖에 없었다는 깨달음을 얻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잘 산다는 이야기다. 둘 사이에는 모든 것이 완벽하고 매력적인 흑인 친구 한 명이 있어 중요한 구심점이 돼준다. 이 흑인 친구는 똑같이 의사를 꿈꿨으나 피부가 검다는 이유로 무차별 폭행을 당해 손을 쓸 수 없게 되었다. 그는 결국 외과 의사를 포기하고 변호사가 된다!


여기서부터는 스포가 되니 읽기에 주의를 기울이기 바란다. 바니 리빙스턴을 샘으로 로라 카스텔로를 세이디로 흑인 친구를 마커스로 대체한 뒤 각각을 MIT, 하버드의 컴공과로 바꾸면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의 이야기를 얼추 맞출 수 있다. 세월이 흐른 만큼 인종적 다양성을 추구하는데 샘은 한국계, 세이디는 유대인, 마커스는 일본계다. 이들은 <닥터스> 시대에는 최고였지만 이제는 한물 간 '의사'대신 게임 디자이너를 직업으로 택한다. 하지만 이야기에서 차지하는 각자의 역할은 <닥터스>를 빼다 받은 듯 선명하다.


두 소설을 비교하며 나는 감초 역할을 하는 세 번째 친구가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데 얼마나 유용한지 배울 수 있었다. 이 친구는 때로는 두 사람의 갈등을 조절하고 때로는 위기에서 구해내며 그러면서도 미움을 받지 않아야 한다. 마치 고대 연극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이야기가 막히거나 지루해질 때쯤 전능을 발휘해 활로를 열어준다. 그러다 보니 이 친구는 돈도 많고 외모도 뛰어나며 심지어 지적으로도 두 사람을 능가한다. 그러면서도 주인공들과는 어떠한 이성적 관계도 맺지 않는다. 그야말로 무성의 신이 캐릭터로 형상화한 것이다.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은 마지막 부분에 살짝 변주를 가해 세 사람 사이에 긴장을 형성한다. 그 긴장에서 튀긴 불꽃이 결국 우정의 숲을 모두 불태워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지만 늘 그렇듯 새로운 희망은 절망에서 피어오른다. <라스트 제다이>가 <라이즈 오브 스카이워커로>로 이어지듯이.


이 방식이 새롭다고 볼 수는 없지만 나름 세련되게 윤색된 면은 있어 보인다. 모두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의 구조를 가져와 지금 시대에 맞춰 리모델링하는 것. 이것만 잘해도 베스트셀러 작가가 될 수 있구나. 사람들이 그토록 지루한 희곡을 쓴 셰익스피어를 이렇게 찬양하는 이유도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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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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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기억에 대한 소설이다. 이제는 지나간 옛일을 오늘의 내가 서술한다. 목소리는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다. 가을 햇볕이 아침나절 스며든 벽돌 담장에 손을 댔을 때 전해지는 온기처럼. 소설은 눈으로 좇을 수밖에 없지만 스며드는 감정은 이와 다르지 않다.


어떤 양자는 벽을 그냥 통과하고 어떤 양자는 그렇지 않다. 광자는 빛의 최소 단위이고 광자는 양자다. 우리는 어떤 광자가 벽을 통과하고 어떤 광자가 그러지 못하는지 알 수 없다. 그것은 단지 확률로 기술될 뿐이다.


우리 삶을 구성하는 시간에도 비슷한 면이 있다. 시간은 대부분 우리의 인생을 투과해 지나간다. 시간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바람이다. 움켜쥘 수도, 멈춰 세울 수도 없다. 그런데 어떤 시간은 우리 삶을 강타한 뒤 튕겨져 나온다. 그 충격으로 삶은 멈춰버린다. 시간은 커다란 덩어리가 되어 우리 몸의 일부가 된다. 우리는 그것을 기억이라 부른다. 이후의 삶은 예기치 않게 더해진 이 이물을 녹이고 삭이는 일들로 채워진다. 멈췄던 시간은 어느덧 다시 흐르고 기억은 우리 몸에 골고루 퍼져 은은한 잔향을 남긴다. 가을 햇볕이 아침나절 스며든 벽돌 담장, 거기서 전해지는 온기처럼.


어떤 소설들은 이야기 이상을 담는다. 그런 소설들을 읽고 나면 무언가 깨닫게 된다. 진리라는 말은 거창하고 낯 간지럽고, 또 너무 명확하다. 확실히 뭔가를 알게 됐다는 게 아니다. '알 것 같다'는 느낌이다. 그 모호함이 오히려 내 삶을 나아가게 만든다. 도착한 그곳이 종착지가 아니기 때문에. 나는 이 '알 것 같다'는 느낌을 간직한 채 다시 일상을 살아간다. 언젠가 이 느낌은 다시 기억 위로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다시 가라앉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다시 가라앉을 것이다.


앤드류 포터는 제임스 설터와 비슷한 면이 있는데 좀 더 따뜻하다. 설터는 마음에 공백을 남기고, 포터는 꺼내 올린다. 나는 이런 류의 소설을 정말 좋아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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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각본
김지혜 지음 / 창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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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 혈연을 기반으로 한 행복공동체가 아니라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하부 조직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족에는 아빠와 엄마와 아들과 딸과 크게는 사위와 며느리가 존재한다. 구성원들을 부르는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다. 호칭은 각각의 역할을 규정한다. 예컨대 아빠는 돈을 벌어오고 엄마는 살림을 하며 아들과 딸은 학업에 전념하여 입신양명하고 사회적 위치를 갖추고 난 뒤엔 부모를 공양한다. 자녀가 결혼하여 사위나 며느리가 생기면 조직은 분할하거나 확장한다. 호칭은 성별을 따르고, 호칭이 역할을 규정하므로 결국 가족 내에서의 직책은 '성'이 결정한다. 저자 김지혜 교수는 이것이 견고한 '각본' 같다고 말하는데, 실상은 조직도라고 불러도 크게 무리가 없어 보인다.


가족각본은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너무나 당연하고 평범해 자신이 각본을 따르고 있다는 것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이 역할이 자신을 대단히 괴롭힐 때도 있다. 그럴 때조차 우리는 이 역할 자체에 의문을 던지기보다는 각본을 잘 수행하지 못한 자신의 능력 부족에 괴로워한다. 남들은 다 하는 걸 왜 나는 하지 못하는가!


각본의 실체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은 성소수자 혹은 퀴어라고 불리는 인물이 가족의 구성원으로 등장할 때다. 이들은 가족각본이 정해놓은 역할을 꼬이게 만든다. 당신의 아들이 여성으로 성전환을 하거나 동성의 애인과 결혼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해 보자. 일단 호칭부터 문제다. 평생 아들로 불러왔던 그를 이제는 딸이라고 불러야 한다. 아들과 결혼한 동성의 애인은 뭐라고 불러야 할까? 그는 사위인가? 아니면 며느리인가? 둘 중엔 누가 아내고 누가 남편인가? 호칭의 혼란은 단순히 그들을 부를 때의 불편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호칭에는 기대되는 역할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족 안에서 누군가의 호칭이 바뀌면, 그의 역할도 달라진다.


2022년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는 활동가들의 앞에 피켓을 든 반대자들이 나타났다. 그들이 들고 온 피켓 중 특히 김지혜 교수의 눈길을 끈 것은 "남자가 며느리? 여자가 사위?"라는 문구였다고 한다. 동성결혼에 대한 거센 저항은 여느 나라든 마찬가지겠지만 며느리와 사위가 그 핵심으로 떠오른 나라가 또 있을까? 웃기는 일이다. 결혼이 두 사람의 행복을 위한 것이고 그렇게 결합한 공동체가 가족이라면 그 구성원이 남남이든 여여든 여남이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가족각본은 그것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어떤 세상을 꿈꾸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회가 젊은이들에게 결혼을 종용하는 이유는 결혼=출산=육아를 하나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특히 며느리가 중요하다. 우리나라가 레즈비언보다 게이 커플에 더 민감한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남자 며느리는 자기 배로 아이를 품지 못하고, 젖을 먹일 수도 없다. 아이가 자라는 데는 무엇보다 '엄마'의 손길이 필요하다. 남자 며느리는 심지어 직장을 관두지도 않을 텐데 과연 '제대로 된 육아'를 할 수 있을까?


가족 내에서 성역할이 고정되어 있는데 사회에서 성평등을 추구하겠다는 건 모순에 불과하다. 남편이 돈을 벌어오고 여성이 출산과 육아를 담당한다면, 직업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남자에게 더 많이 부여하는 것도, 남녀 간의 소득 격차가 벌어지는 것도 지극히 합당한 일이다. <가족각본>은 가족이 강제하는 각자의 역할이 단순히 가족 내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준다.


<선량한 차별주의자>에서도 그랬지만 김지혜 교수의 책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비틀어 새로운 세계를 맞이하는 충격을 선사한다.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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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 나는 무엇이고 왜 존재하며 어디로 가는가?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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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과를 선택한 이유는 문학적 감수성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이 얘기는 지난 <생물학의 쓸모>에서도 한 적 있다. 그런 감수성으로 이공계의 메인스트림을 맞닥뜨렸을 때? 솔직히 나쁘진 않았다. 아마도 내가 이 분야들을 이야기의 관점으로 접근했기 때문인 것 같다. 생각해 보면 나는 확실히 특정 분야 그 자체보다는 그것에 대한 '역사'를 더 좋아했다. 철학보다는 철학사, 과학보다는 과학사, 수학이 아닌 수학사, 기타 등등.


양자역학이 어쩌고 저쩌고, 데카르트가 어쩌고 저쩌고, 파인만이니, 파동함수니, 쿼크, 힉스, 페르미, 라마누잔, 가우스 아무튼 그들의 연구는 단 한 글자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들에 '대한' 이야기만 줄줄이 읊고 다니던 시절. 지금도 크게 달라진 건 없지만 창피하지는 않다. 링 위에서 뛸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그것을 우러러보고 사랑하는 마음을 무시한다면 우리네 평범한 인간은 모두 경멸 속에서 살아야 한다. 과학을 존경한다면 그걸 사랑하는 이도 존경받아야 한다.


나는 비록 본성을 거스른 일련의 선택 덕분에 수많은 수학, 과학 교양서를 거쳐 여기까지 왔지만 다른 문과생들은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유시민 작가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평생 문과들과 어울려 살았다. 공부를 할라치니 아는 과학자가 없어서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물어보지 못했다. 닥치는 대로 살아온 인생과 같이 우연히 마주친 과학 교양서를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는 꽤 많은 과학책을 읽은 문과생이 되었다.


유시민 작가의 말에 따르면, 공부는 그렇게 해도 되지만 남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줄 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한다. 과학과 인문학은 연구 대상과 방법이 다르고, 쓰는 말과 사고방식도 같지 않다. 과학자는 현상을 관찰해 가설을 추론하고, 실험과 분석으로 그것을 검증한다. 하지만 결과를 이야기할 때는 그 반대다. 이를테면 양자역학이 무엇인지 밝히고, 그것이 어떻게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냄새 맡는 세상을 만드는지 설명한다. 바로 이 순서가 문과에게는 좋지 않은 것이다.


물리학자도 잘 모른다는 양자역학을 제일 먼저 공부하라는 것은 '문과 학대'일 수 있다.(p. 290)


문과의 고충을 잘 아는 저자는 정확히 반대로 과학을 시작했다. 위대한 철학이든 사상이든 인간의 정신은 모두 뇌활동의 결과다. 그래서 시작을 뇌과학으로 했다. 그러면 생물학에 관심이 생기고 생명 현상을 확실히 이해하기 위해 화학을 들여다보게 된다. 원소주기율표를 이해하려면 양자역학을 알아야 하고 그러다 보면 우주론이, 바로 그 우주를 기술하는 언어인 수학에 호기심이 생긴다.


그래서 이 책은 정확히 이 순서를 따른다. 문과생이 과학책을 읽고 정리한 내용을 모은 걸 과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는 그 어떤 과학책보다 명료하다. 중언부언이 없고, 알쏭달쏭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이것이 무지의 소치라는 것을 배제할 수는 없다. 알면 알수록 모르게 되는 것이 학문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 호쾌함에 어딘지 모를 믿음이 생긴다. 최근에 이런저런 방송에 나오며 여러 과학자들을 사귀고, 그들이 감수까지 봤다고 하니 그냥 써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서당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했는데, 하물며 유시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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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의 쓸모 - 인류의 과거, 현재, 미래를 읽는 21세기 시스템의 언어 쓸모 시리즈 3
김응빈 지음 / 더퀘스트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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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내 선택 과목은 화학2였다. 수학 때문에 인생을 조진 사람이라 또 하나의 수학에 불과한 물리는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지구과학은 과학 같지가 않았고 생물학은 적어도 당시에는 끔찍한 암기 과목에 불과했다. 애당초 왜 이과를 간 걸까? 그건 무려 나의 '친부'가 이공계에도 인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과 진학을 종용했기 때문이었다.


화학2는 좀 달랐다. 이 학문은 지극히 논리적인 데다, 세상을 이해하는 열쇠를 쥐고 있었다. 고분자 화합물의 조립식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5만 조각짜리 직소 퍼즐의 마지막 한 자리를 찾아낸 것과 같은 희열이 느껴진다. 프라모델이나 레고를 좋아한다면 화학을 싫어할 수가 없다. 게다가 세상 만물의 근본이 궁금한 인팁(INTP)이라면? 이 과목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생물학의 쓸모>라니! 화학의 쓸모는 어디에 있는가? 어디 감히 신성한 과학의 영역에 암기 과목에 불과한 생물학 따위가 발을 디딘단 말인가!라고 하기엔 유전공학을 필두로 우리 삶에 밀고 들어온 이 학문의 영향력이 너무나 크다. 화학은 우리 삶과 너무나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어, 이를테면 공기와 같은 존재가 되어 버린 바람에 눈에 띄지 않지만 생물학은 양손에 질병과 노화의 해방을 쥐고 있어 외면하려야 외면할 수가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대한민국은 한때 생물 복제에 관한 한 세계의 중심에 서 있지 않았는가!(황우석 나빠요)


세상의 근원에 어떤 과학이 더 가까운가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 과학에는 위계가 없다. 사실이 있을 뿐이다. 과학은 서로를 배척하지 않고 각자가 배운 것을 나누며 궁극의 진리에 다가선다. 모든 과학은 결국 물리학의 아류일 뿐이라느니, 순수과학과 응용과학을 나누려는 시도 같은 건 대부분 과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분야의 호가사들이 하는 말이다.


우리 사회의 최소 구성단위를 생물이라고 본다면 세계에 대한 이해가 결국 생물학에 대한 이해로 귀결된다는 걸 알 수 있다. 물론 생물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가 원자이니 화학과 물리학이 앞선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그건 마치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픽셀을 살펴봐야 한다는 말만큼이나 공허하다. 적어도 우리 같은 보통사람들에게는.


생물학은 그 간격을 좁혀주는 학문이다. 우리를 아주 먼 곳으로도, 그렇다고 너무 가깝지도 않은 곳으로 데려간다. 그리고는 아주 큰 눈을 끼워줘 생물을 지배하는 유전자와 생물계를 지배하는 다양한 미생물들의 존재를 밝혀준다. 현미경을 처음 발명한 사람들이 자기 손에 득시글한 세균을 처음 발견했을 때 느꼈을 충격과 환희를 상상해 본다. 그 후로 수많은 시간이 흘러 우리는 우리를 살리고 죽이는 미생물들과 그 사이에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관계를 발견하게 됐다.


<생물학의 쓸모>는 세포에서 시작해 호흡으로 넘어가 생명활동을 정의한 뒤 DNA로 근원을 밝히고 미생물과 생태계로 여로를 확장해 나간다. 너무 심오하지도 가볍지도 않다. 적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수준 높은 패키지여행을 제공한다. 정말 쓸모 있는 생물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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