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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
무라카미 하루키.가와카미 미에코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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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인터뷰집이다. 인터뷰어는 가수 출신의 소설가로 심각한 하루키 덕후.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하루키는 무척 음흉한 사람이다. 무슨 말인지 알고있지만 자기 말의 일관성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모른척을 한다거나 자기 철학을 관철하기 위해 말을 돌리는 경우도 많다. 이런 사람에게, 그것도 문단의 대선배에게 난처할 수 있는 질문을 끝까지 물고 늘어질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토록 위험천만한 인터뷰를 무려 11시간 동안 끌고 나갈 수 있었던건 인터뷰어가 심각한 하루키 덕후고 이 애정이 하루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편집자라던가 동년배의 작가, 혹은 문학계 기자가 아닌 팬. 그것도 날카로운 통찰력을 지닌 팬이 던지는 질문은 그간의 인터뷰에서 볼 수 없었던 통쾌함과 따뜻함을 동시에 전해준다. 하루키 자신도 꽤 즐거웠는지 이런 말 저런 말을 아끼지 않고 쏟아낸다.


어떻게 소설을 쓰는가? 하루키에게 이야기란 어떤 의미인가? 더하여 소설가란 무엇인가? 이런 주제를 놓고 봤을 땐 그 결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 닿아 있고 특정 작품에 대한 편중을 생각하면 <기사단장 죽이기>의 출판 기념 특별 대담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기사단장 죽이기>를 읽으며 이데아니 메타포, 하루키 특유의 이계로의 여행이 어떤 뿌리에서 나와 어떻게 발전해 나가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의미를 내포하는지 알고 싶다면 이 책은 큰 힌트가 될 수 있다. 물론 하루키 자신이 소설을 해석하는 행위에 경기를 일으킬 정도의 거부감을 갖고 있어 절대 명확한 답을 내놓지는 않지만("그런가요?", "그런 건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습니다만.", "호오, 그렇게 보면 그럴 수도 있겠네요.") 인터뷰어의 비수같은 질문들이 하루키의 모호함을 예리하게 잘라나간다. 웬만한 신뢰관계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했을 인터뷰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하루키는 정말 부러운 작가고, 꽤 뒤늦게 인정한 사실이긴 하지만 나는 그의 소설을 상당히 좋아한다. 특히 모든 것이 리얼한 현실을 묘사하고 있음에도 어느 순간 스르륵, 그야말로 구렁이 담 넘어가듯 무리없이 이세계로 빨려들어가는 순간은 사실은 내가 그리고 싶었고, 내가 가려고 했던 방향이 바로 그곳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이러한 인식은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기점으로 급변한 것인데 이후로 나는 그가 하는 말을 최대한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기울인다. 그가 주류 문학계로부터 그토록 심한 비난과 냉대를 받아왔음에도 동시대의 독자들과 누구보다도 가까이 호흡하는 작가라는 점, 그런 냉대와 비난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무려 30년이 넘게 활발히 작품 활동을 이어간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엄청난 판매부수를 본 받고 싶기 때문이다(웃음).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 누가 무슨 소리를 지껄이든 결국 내 소설을 쿨하게 써나가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 것이다. 한 걸음, 한 걸음. 한 글자, 한 글자. 퇴근길, 지하철이 쏟아내는 시커먼 사람들을 지켜보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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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 스쿨 잭 리처 컬렉션
리 차일드 지음, 정경호 옮김 / 오픈하우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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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질긴 장르 소설 탐색을 끝내고 나는 두 명의 작가를 얻었다. 해리 보슈 시리즈의 마이클 코넬리와 이 책 <나이트 스쿨>의 작가 리 차일드. 리 차일드를 설명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잭 리처'를 언급하는 것이다. 이는 양날의 검이기도 한데, 최근 몇년 동안 헐리웃에서 동명의 시리즈에 쳐바른 똥칠 때문이다.


영화는 핵망이었다. 190센티가 넘는 거구의 헌병대 소령 잭 리처를 사이언톨로지의 난쟁이 톰이 연기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두 편을 모두 본 나로서는 잭 리처라는 이름에 경외심을 가져야 할 어떠한 이유도 없었다. 아무리 마음을 다잡고 책을 읽으려 해도 내 눈엔 자꾸 난쟁이 톰의 모습이 밟혔던 것이다.


이런 편견을 깨준건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주제로 세계의 내노라 하는 작가들이 단편 소설을 써서 엮은 <빛과 그림자>였다. 나는 여기서 처음으로 리 차일드라는 이름과 만나는데, 이 책에 실린 수 많은 단편들 중에서도 그의 작품은 단연 독보적이었다. 이때서야 나는 비로소 언젠가 리 차일드의 작품을 읽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첫 작품이 바로 <나이트 스쿨>.


<나이트 스쿨>은 '그 미국인이 1억달러를 원한다'는 메시지를 찾아 CIA, FBI, 미 육군 헌병대가 합동 작전을 펼치는 빅스케일 추리 소설이다. 다른 시리즈에 비해 잭 리처의 육체적 활약은 떨어진다고 하는데 시리즈를 처음으로 읽어본 나에겐 그런 것이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방향은 한참이나 멀지만 차포 떼고 단순히 말하면 존 르 카레의 미국식 캐쥬얼 버전이랄까? 저 단순한 메시지 하나에서 독일과 미국을 아우르는 밀도있는 추리 서사가 펼쳐진다는 건 실로 이 작가가 플롯을 구성하고 이야기를 짜넣는 능력에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가장 감명 받은건 <나이트 스쿨>이 전체 546페이지에 달하는 책이고 400페이지가 넘도록 뚜렷한 액션이 보이지 않는데도 지루할 새가 없다는 것이다. 1억 달러의 가치를 지닌 테러 무기는 뭘까? 리 차일드는 낚시 바늘에 이 단순한 미끼하나만을 건채 독자들을 끊임없이 유혹한다. 그는 독자를 데리고 같은 곳을 맴맴도는 미로로 인도하는데 지쳐 쓰러질려고 할 찰나 이야기는 빛나는 실마리를 잡고 벽을 넘어 뛰어오른다. 이제 바로 다음이 목적지라는 기대는 우리로 하여금 같은 미로를 맴맴 도는 행군을 또다시 견디게 한다. 이 책을 펼친 순간 이 이야기를 거부하는 방법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장르 소설은 이러쿵 저러쿵해도 결국 이 힘이다. 바로 뒷 페이지에 어떤 이야기가 써있을지 궁금하게 만드는 것. 페이지를 뭉텅이로 넘겨 결말을 미리 보지 않으면 호기심이 내뿜는 연기로 머리가 간질간질하고 호흡이 빨라져 참을 수 없게 되는 것. 나도 몇번이나 그 유혹에 맞서 싸워야했다. 하지만 나는 끈질기게 그 맛을 아껴먹었고 허기와 포만이 기분 좋게 반복되는 시간을 즐기며 부드럽게 결론에 다다를 수 있었다.


나는 다음과 같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강력히 권한다. 첫째, 영화 잭 리처 시리즈에 큰 실망을 한 사람. 둘째, 존 르 카레의 무게와 비관을 떠나 잠시 머리를 비우고 싶은 사람. <나이트 스쿨>은 전형적인 미국 영웅과 헐리웃 식 해피엔딩의 규범을 따르지만 그런 걸로 치부하기엔 이야기가 가진 힘이 참으로 크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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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다시 여름, 한정판 리커버)
박준 지음 / 난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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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의 시를 처음 봤을 때, 그의 시는 시릴정도로 아리고 깊어서 나같은 사람은 도저히 닿을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시는 나와 동일한 언어로 구성되는 데도 불구하고 완성된 시는 그 자체가 하나의 새로운 언어처럼 느껴진다. 그의 시를 읽고있으면 시인은 태생부터 다르다는 말이 뼛속까지 스며든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을 먹던 시인은 울고 또 운다. 이 책은 산문집으로 팔리고 있지만 실상은 시인지 산문인지 구별되지 않는 문장들이 초겨울의 낙엽처럼 쓸쓸하게 떨어져내린다. 단어 하나 하나에 시리듯 베어있는 감정들은 조금이라도 시선을 돌리거나 무관심으로 지나치면 툭, 하고 터져 눈물을 흘릴 것만 같다. 어째서 시인들은 신경쇄약에 걸리지 않는 걸까? 돌담을 스치는 바람에도 가슴이 에는 통증을 느낀다면 삶은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무너져내릴 것이다. 시는 무너져버린 삶을 다시 쌓아올리는 작업일까, 아니면 무너지지 않도록 빗대어 놓는 버팀목일까? 무엇이 됐든 시는 아리고 슬프다. 아리고 슬픈 시를 나는 읽고 또 읽는다.


어느 곳 하나 힘준 데가 없는데도 그의 문장은 높은 산처럼 다가온다. 그 무게엔 놀라울 정도의 끈기가 담겨 있어 반드시 목적한 곳까지 닿고나서야 주저앉아 해소의 감정을 풀어낸다. 나는 그 발걸음을 본 순간 그것을 따라가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추격전도, 총격도, 폭발도 없는 드라마인데도 긴장의 끈이 놓이지 않는다. 빨려든다는 표현은 그의 담담한 발걸음과 어울리지 않고 스며든다는 표현은 한 걸음 한 걸음 속에 담긴 힘을 전달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하나도 특별할 것 없는, 이 담담한 시인의 발걸음조차 표현하지 못하는 내 언어의 초라함이 나는 슬프다. 따라가기를 멈추고 머리를 쥐어짜보지만 허공에서 물을 긷는 것처럼 손에 쥐어지는 말은 없다. 그동안 시인은, 예의 그 담담한 걸음을 계속하고 내가 할 수 있는건 뒤쳐진 거리를 따라잡아 다시 그 한 걸음 한 걸음을 지켜보는 것 뿐이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시인은 울고 또 운다. 마음 한켠에선 누군가의 고통을 이토록 뻔뻔히 구경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하는 걱정이 스며든다. 나는 시인의 어깨를 다독여줄수도, 그의 손을 잡아줄수도 없다. 나는 돈을 주고 그의 책을 사 읽는 것이, 어쩌면 그에 대한 모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살에 갇힌 시인의 고통을 지폐 한장과 바꾼 천박함.


나는 아무래도 박준의 팬이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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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건강실록 - 역사 선생님도 가르쳐주지 않는
고대원 외 지음 / 트로이목마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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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건강실록>은 <조선왕조 실록>이 아니라 <승정원 일기>에서 이야기의 근거를 찾는다. 왕조 실록만큼, 아니 왕과 비빈, 기타 그 가족들과 관련된 병에 대해서만큼은 실록보다 훨씬 상세히 기술한 것이 <승정원 일기>다. 한의학을 전공한 9명의 저자는 방대한 양의 사료를 뒤져 35개의 이야기 꼭지를 뽑아냈다.


크게 1, 2챕터는 왕과 비빈의 생로병사를 기술하고 3, 4에서는 조선시대에 이름을 떨친 의사들과 왕궁에서 향유한 의료 문화에 대해 설명한다. 저자가 9명이나 되어 글의 질이 들쭉날쭉하고 방향이 없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1, 2챕터는 사실상 지루함과의 싸움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다. 저자들은 의학인으로서, 정치적 관점은 미뤄둔 채 철저히 병에 집중했다고 말하지만 그 탓에 이야기가 빈약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게다가 <승정원 일기>가 왕궁의 병사를 아무리 상세히 기술했다 하더라도 현대의 의학인들이 그것만 보고 당시의 병을 진단하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시도는 아주 좋아보였지만 결과는 꽤 빈약했다. 현대 의학의 관점으로 당시의 병을 진단하고 가상의 치료를 상상해본다던가, 뭐 이런 파격적인 시도는 애초에 불가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의 1, 2챕터는 역사 이야기도, 의학 이야기도 아닌 어영부영한 자세로 지루한 줄타기를 계속한다.


그러나 3, 4챕터에서는 나름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물론 여기서도 의사들만이 쓸 수 있는 독특한 관점이나 해석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야기에 집중을 하니 어정쩡한 자세는 똑바로 서고 드디어 방향을 갖게 된다. 조선시대 의학 얘기라 하면 허준과 <동의보감>밖에 알지 못하는 나에게 전설적인 명의들의 이야기는 새롭고 다채로웠다. 동방의 작은 나라에 불과했지만 의학에서 만큼은 확실한 명성이 있었던 것 같다. 수백년 전에 활약한 꼬레(Corea)의 의사들을 보고 있으면 내가 나의 역사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지 반성하는 계기가 된다. 챕터 4는 왕궁이 향유한 일종의 웰빙 라이프 소개서다. 화장품과 차, 각종 건강식들. 왕궁의 소소한 생활상을 써보려는 사람들에게 이 부분은 디테일을 더하는 좋은 아이템이 될 것이다.


<조선왕조 건강실록>은 시도는 좋았지만 좋게 봐줘야 30% 정도의 성공을 거둔 미완의 책이다. 하지만 그 시도는 확실히 박수쳐줄 가치가 있다. <왕조 실록>와 <승정원 일기>에는 이것말고도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을까? 누군가 이 사료들을 열심히 연구해 조선 역사를 그저 <왕조 실록>으로 퉁치지 않는, 다양한 분야의 독특한 관점을 담은 역사책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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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박상영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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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신의 세계에서 맺는 피상적 인간관계, 반지하 월셋방의 찌질한 인생, 주류 사회에 끼지 못하는 외로움, 독특한 생각과 취향,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비웃고 뒤트는 시니컬한 유머와 독설. 한국의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이 모든 속성들을 골고루 갖고 있는 박상영표 소설에서 다른 뭔가를 하나 찾자면 그건 아마 '퀴어'일 것이다. 동성애. 소외받은 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소외된 인간들.


박상영 소설 속의 동성애자들은, 그러나 사회의 노골적 편견과 몰이해에 고통받는 존재는 아니다. 작중 화자의 말에 따르면 박상영은 결코 동성애를 대상화하여 저급하게 소비하지 않는다. 핍박받는 자들의 절규와 고통으로 그 존재 이유를 증명해야 한다면 그건 핍박받는다는 사실 그 자체보다 더 나쁜 일이다. 기부금을 받기 위해 TV로 송출되는 자선단체들의 광고를 보라. 화면 안에는 끔찍하게 병들고 다친 수 많은 '불쌍한 인간'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더 많은 기부금을 끌어내기 위해 가장 처절한 상처를 까뒤집고 전시한다. 광고 속에서 그들은 일종의 상품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동성애자는 불쌍하기 때문에 이해해줘야 하는 대상이 아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자연의 섭리를 어기게 된 자들을 긍휼히 여기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가장 완벽한 상황은 역설적으로 그 누구도 그들을 이해하려하지 않는 것이다. 두 사람이 중국집을 갔다고 하자. 한 사람은 간짜장을 다른 한 사람은 짬뽕을 시켰다. 이 경우 두 사람은 서로의 선택에 대해 이해하려 노력할까? 상대가 짬뽕 혹은 짜짱면을 시킨 이유를 곰곰이 생각하여 그 선택의 정당성을 찾아낼까? 무슨 소리. 두 사람은 서로 무엇을 시켰는지도 모른채 그저 자신의 메뉴를 맛있게 먹고 가게를 떠날 것이다. '서울에 사는 27세 남자'라는 말과 '서울에 사는 27세 게이'라는 말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는 세상. 진짜 괜찮은 세상은 우리가 동성애를 '받아들일' 필요도 '이해할' 필요도 없는 세상이다.


이런 관점에서 나는 박상영의 소설들을 다시 읽어 본다. 그는 그가 창조한 작중 인물의 말처럼 동성애를 대상화하여 천박하게 소비하진 않는가? 게이들에게 침을 뱉는 사람들, 퀴어 축제에 난입해 "우리 아이들이 무엇을 보고 배울지 걱정된다" 고 소리지르는 '똑똑한' 엄마들, 사랑을 강조하는 종교의 어처구니 없는 몰이해, 그리고 이모든 사회적 편견과 폭력에 시달려 자살하는 게이들. 박상영 소설 속의 게이들은 그 누구도 이러한 폭력에 시달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같이 침울하고 허무한 삶을 산다. 그들은 앞으로 나아가기 보다는 과거의 실수를 무한히 반복하며 스스로를 늪에 빠뜨린다. 이유가 뭘까? 그리고 바로 이 순간, 바로 이 의문을 떠올린 순간 나는 나조차도 엄청난 편견을 가지고 이 소설을 읽었음을 깨닫는다.


갈 곳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젊은이들, 피상적 관계 속에 나와 타인을 이어주던 고리들은 점점 얄팍해지고, 반대로 나를 에워싼 껍데기는 갈수록 단단해지는 사람들. 그래서 외로워지고, 외롭기 때문에 더 외로워지는 인간들. 외로움이 만든 인생의 구멍을 탕진적 소비와 SNS에서 만든 가짜 자아로 채우려는 사람들. 그들은 게이여서 그런 삶을 사는 게 아니다. 그것은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젊은이들이 가진 보편적 삶, 보편적 고민, 보편적 고통인 것이다. 소설 속 인물들이 보여주는 탕진과 방황을 볼때마다 나는 무의식 중에 사회적 편견과 멸시가 그들을 이런 상태로 몰아 넣고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아니,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들은 게이여서 그런 삶을 사는 게 아니다. 우리와 똑같이,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기에 그런 삶을 사는 것이다.


당신은 동성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대답은 멋지고 쿨할 수 있다. 하지만 무의식은? 포용과 친절 속에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끔찍한 편견이 내포되어 있다면? 어쩌면 이 소설은 일종의 테스트인지도 모르겠다. 당신이 게이에 대해, 정말로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판단하는 테스트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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