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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 더 나은 오늘은 어떻게 가능한가 - 더 나은 오늘은 어떻게 가능한가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전병근 옮김 / 김영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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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사피엔스를 지구상에서 유일한 생물종으로 정의하기 위한 사람들의 노력은 실로 눈물이 겨울 정도였다. 그들은 행여나 빼앗길 키워드를 선점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생각하는 사람, 놀이하는 사람, 웃는 사람, 정치하는 사람 호모 어쩌구 저쩌구 기타 등등. 하지만 유발 하라리만큼 충격적인 주장을 펼치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다. 하라리는, 인류가 오늘날과 같은 문명을 이룰 수 있었던 이유가 다른 무엇도 아닌 이야기를 창조하고 믿는 능력이었다고 말한다. 국가, 민족, 화폐, 법인. 이는 모두 허구의 이야기에 불과하며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지만 우리는 우리가 반만년간 역사를 이어온 단군의 후예라는 사실을 믿으며 태극기 앞에 자긍심을 느끼고, 종이 쪼가리에 불과한 돈으로(혹은 계좌에 새겨진 몇 자리 숫자로) 실물을 사고 팔고, 세계 곳곳에 자리잡은 우리 기업의 활약상에 자부심을 느낀다.


하라리는 같은 이야기를 믿는 사람들 사이에 대규모 협력이 가능했으며 이것이 바로 우리의 문명을 이룩한 원동력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야기는 세상에 단 하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한 민족의 이야기가 다른 민족의 이야기보다 중요하다는 편향이 일어났을 때, 그것은 늘 재앙으로 번지곤 했다이와같은 이유로 하라리는, 이야기가 결코 21세기의 답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생각이다. 왜냐하면 이야기를 믿지 말아야 한다는 것 또한 하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는 완전히 규모가 다른 새로운 이야기의 등장이야말로 우리를 구원할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한두개의 국가, 한두개의 민족이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바야흐로 전인류적인 문제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우리 모두의 대응이 필요하고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 '인류는 모두 하나'라는 전지구적 이야기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우리는 그동안 고수해왔던 편협한 민족, 국가 중심의 이야기에서 인류의 이야기로 진화해야 한다. 국가와 민족 이야기는 그 특성상 결국 분열할 수 밖에 없지만 다행히 인류는 단일한 종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다(과거 호모 사피엔스가 같은 종의 유인원들을 잔인하게 멸종시킨 것이 이렇게 도움이 될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그러나 낙관적인 전망을 하기엔 아직 이르다. 새로운 이야기의 창조자들이 우리 모두를 같은 인류로 인정해줄지는 여전히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발전과 자유의 범람이 인류에게 문명 발달의 혜택을 골고루 나눠준 시기는 아주 짧았다. 그것은 치열한 체제 경쟁의 시기에(냉전) 나타난 아주 이례적인 혜택에 불과했다. 하라리는 사람들이 민주주의와 독재의 갈등을 두 가지 윤리 체계의 갈등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하며 아래와 같이 지적한다.


"이는 사실 데이터를 처리하기 위한 두 가지 상이한 시스템 간의 갈등입니다. 민주주의는 정보를 처리하는 힘을 분산시키고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결정을 내리는 반면, 독재는 정보와 권력을 한곳에 집중합니다. 20세기의 기술을 감안할 때 너무 많은 정보와 힘을 한곳에 집중하는 것은 비효율적이었습니다. 아무도 모든 정보를 충분히 빨리 처리하고 옳은 결정을 내릴 만한 능력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마지막 문장이다. 20세기에는 범람하는 데이터를 혼자서 처리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기계 학습과 인공지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21세기에는 완전히 다른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 독재는 오히려 정보를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데이터는 한곳에 모일수록 더 효율적이며 그걸 혼자서 처리할 능력을 갖추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기 때문이다. '혼자서'라는 말을 믿지 못하겠다면 구글과 아마존, 애플, 바이두, 알리바바의 연합 법인 혹은 미국, 러시아, 중국, 영국의 연합국이 정보를 독점한다고 생각해보자.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최첨단 기술로 무장한 회사나 국가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조지 오웰의 '빅브라더'는 정보를 독점하여 인간을 억압하지만 21세기의 빅브라더는 우리를 억압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완전히 무가치한 존재, 이 사회에서 무관한 존재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세상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우리로부터 소비자의 지위를 빼앗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소비가 없는 자본이 가능한가? 섬길 자가 없는 권력이 존재할 수 있는가? 하지만 이런 세상은 어떤가? 로봇이 다른 로봇과 주식을 사고 팔고, 채굴 로봇이 전기 회사에 충전료를 지급하고, 전기 회사가 로봇 제조사로부터 시스템을 운영할 기계를 구입하는 세상 말이다. 미래에는 모든 생산활동은 당연하고 심지어 소비활동에서 조차 로봇에게 의존할 수 있다. 여기에 과연 인류의 자리가 존재할 수 있을까?


기술이 지배하는 극도로 효율화된 사회에서는 한계비용이 제로에 가깝게 떨어질 수 있고 여기서 얻은 막대한 이득을 정부가 세금으로 거둬들임으로써 인간은 공짜 복지를 누리는 파라다이스를 꿈꿀 수도 있다. 하지만 지구의 자원이 모두 고갈되거나 혹은 태양이 곧 소멸할 시기에 정부와 기업이 자신의 모든 자원을 안드로메다로 옮길 것이며 여기서 말하는 자원에 '인간'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발표하면 어떨까?(시스템의 운영 방식을 결정할 소수의 의사결정권자들은 당연히 예외다)


거대 권력에 착취당하는 사회는 오히려 인간에게 희망적이다. 싸워야 할 명분과 대상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억압을 이겨내고 자유를 쟁취한다는 '꿈'을 꿀 수 있다. 하지만 이 사회와 완전히 무관한 존재로 전락한 인류에게 허락된 꿈은 무엇일까? 정부가 안드로메다로 이주하겠다는 발표를 했을 때 우리는 어떤 명분을 갖고 그 결정에 반대할 수 있을까?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이미 로봇과 인공지능이 대체했기 때문에 우리는 더이상 정부에 세금을 내지도, 외계인의 침략으로부터 지구를 지키기 위해 피를 흘리지도 않는다. 억압보다 무서운건 무용함이다. 미래의 기술은 인간으로부터 그 어떤 것도 착취하지 않을 것이다.


결정의 시간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으며 시계의 속도는 점점 빨라진다. 인간에게 아직 미래를 창조할 능력과 감수성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면 서둘러야 할 것이다. 인류의 위대한 정신은, 곧 소멸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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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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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는 문화비평가이자 역사가이며 환경, 반핵, 인권 운동가인 레베카 솔닛의 에세이다. 그녀로 하여금 이 에세이를 쓰게 만든 계기는 아마도 책머리에 등장하는 그녀의 경험이었던 것 같다.


그녀는 어느날 한 파티에 초대됐다. 장소는 해발 2,743미터에 지어진 튼튼하고 호화로운 별장. 사슴뿔 장식과 수 많은 킬림, 장작 때는 난로까지 갖춰진 우아한 곳이었다. 사람들이 파티를 마치고 하나둘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파티의 주최자가 저자의 일행을 붙잡고 말을 걸기 시작한다. 주최자는 남자였고 그는 솔닛이 두어권의 책을 쓴 작가라는 것 말고는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솔닛의 일행과 남자는 책에 대해 얘기했다. 솔닛은 자신이 최근에 출간한 <그림자의 강: 에드워드 마이브리지와 기술의 서부시대>에 대해 얘기했다. 그러자 남자가 갑자기 솔닛의 말을 끊더니 그 해 '마이브리지'에 관해서 나온 아주 중요한 책에 대해 아냐고 그녀에게 물었다. 솔닛은 남자의 가르침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무지한 여성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했고, 남자는 거만함과 우쭐함을 곁들인 지루한 장광설을 끝도없이 늘어놓기 시작했다. 참다못한 솔닛의 친구가 그에게 말했다.


"그게 바로 이 친구 책입니다."


그는 세네번 이 말을 반복할때까지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마침내 진실을 깨달은 그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 그리고는 거기서 얘기를 끝냈냐고? 천만에. 아주 잠깐 할 말을 잃고 멈췄던 그가 다시 그 지루한 장광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는 '마이브리지'에 대한 솔닛의 책을 읽은 적도없으며 그저 뉴욕타임즈에 실린 북리뷰를 읽었을 뿐인데도 말이다.


레베카 솔닛은 이 경험을 포함한 한편의 에세이를 '톰디스패치(www.tomdispatch.com)'에 게재하고 그 글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은 관심을 받았다. 그녀의 글 덕분에 '남자들은 나를 가르치려 든다'는 웹사이트가 생겼고 그 유명한 '맨스플레인'이라는 신조어가 탄생했다.


솔닛이 살아온 세계에서 여자라는 사실은 공신력 있는, 믿을만한, 과학적인 의견을 내놓지 못하는 부류로 판단하는 '결정적 증거'가 된다. 여자의 말은 비논리적이고, 감성적이며, 타당하지 못하다. 때로는 은연 중에, 대부분은 노골적으로 표출되는 이러한 편견은 여자라는 인간이 살고 있는 이 세계에 전염병처럼 퍼져있다.


솔닛은 결코 상황을 과장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담담히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서술해 나간다. 남자들이, 여자들에겐 절대 없다고 생각하는 그 차가운 이성의 냉철함을 가지고 말이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과연 내가 성차별로부터 자유롭다고 확신할 수 있을지 의심이 든다. 성차별은 어제와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것은 수천년간 이어져온 문화적 산물이며 그로인해 우리의 행동과 말 한마디 한마디엔 우리도 눈치채지 못하는 편견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다.


차별을 부수려는 싸움은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아주 짧은 평화의 시간, 극소수의 지역을 제외하고는 계속해서 이어져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남성들이 최근의 현상을 급진적이라 느끼는 이유는 아마도 미디어의 발달로 인해 여자들의 목소리를 내는 채널이 많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20년전만 해도 방송국 한두개만 꽉 잡아두면 그녀들의 목소리를 지울 수 있었다. 남자들은 그 짓을 엄청나게 성공적으로 수행해왔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할 방법이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지금 댐이 터지기 직전의 강밑에 서 있다. 바보짓을 하는 게 소원이라면 그 댐을 당신의 '떡 벌어진 두 어깨'로 막아서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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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선택 - 성공과 실패의 갈림길에서 당신을 구해줄 어느 철학자의 질문수업
김형철 지음 / 리더스북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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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책을 읽을 때마다 의문이 들곤합니다. 기업 경영자들이 이 정도로 깊이가 없나? 하는 의문 말입니다. 저자는 SERI CEO 최우수 강사로 뽑힌 적이 있고, 각종 리더십 교육에서 활약하는 걸 보면 이분은 분명 우리나라 유수 기업들의 CEO 혹은 리더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는 분일 겁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 마치 어린이용 논리, 철학 입문서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쉬운 게 나쁜 건 아닙니다. 경험이 많으신 분이니 분명 리더들에게 잘 통하는 화법을 갖추고 계실테고, 따라서 이 책의 구성과 논조에 대해 경험이 일천한 제가 이러쿵 저러쿵 떠드는 건 건방진 일일 겁니다. 하여 저는 이 책에 대해서는 더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이런 게 통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철학을 공부한다는 건 철학사와 철학자와 그들이 한 유명한 말을 외우는 게 아니라는 것 쯤은 모두 알고계실 겁니다. 철학은 우리에게 생각하는 방식을 알려줍니다. 이 책에 담긴 22개의 챕터, 거기에 등장하는 22명의 철학자들은 분명 어떤 분들에겐 '음, 유명하다는 철학자들의 강의를 들으니 어쩐지 우쭐한 기분이 드는군' 하는 허세를 느끼게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제시함으로써 자기만의 새로운 사고틀을 만드는데 도움을 주려는 목표가 있었을 겁니다. 이를 반증이라도 하듯 챕터의 마지막에는 각각 하나씩의 딜레마 상황이 제시됩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까요? 생각하기에 대한 연습문제인 셈이죠.


책을 다 읽고 보니 다음과 같은 요소가 아주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우선 리더들의 시선을 잡아줄 도발적인 질문이 필요합니다. '군주는 왜 공포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인센티브를 가장 정의롭게 나누는 방법은?' 같은 펀치라인 말입니다. 리더들은 바쁩니다. 하루에도 수십개의 보고서와 시장분석지를 받아보겠죠. 그런분들의 시선을 끌려면 추상적인 말로는 안됩니다. 가슴을 뚫어야 해요. 그리고 이런 질문들을 과거의 유명한 철학자들이 제기했다는 사실을 밝힌다면 권위가 실립니다. 마키아벨리(이름도 참 멋있죠)나 롤스 같은 이름들 말입니다. 어디서 한번쯤은 들어본 이름이거든요. 기업 경영자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을 것 같은 철학자들이 실제로는 경영과 밀접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저절로 '오~'하는 기분이 듭니다.


여기까지 왔으면 내용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대부분 뻔한 얘기들이 반복되죠. 이 뻔함을 애써 수습하는 건 마지막에 나오는 실습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리더들을 철학의 세계에서 다시 일터로 돌려놓는 겁니다. 거기서 뭔가 자신의 대답을 내놨다, 그러면 이제부터 그 판단에는 철학적 권위가 실리는거죠. 더 자신있게, 자기 판단을 확신하는 겁니다. 사실 딜레마라는 게 답이 없는 거 거든요. 뭘 생각했든 오답은 아닙니다. 그 판단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는 아무도 추적하지 않으니까요.


요리보고 저리봐도 저에겐 자극이 될 만한 요소가 없는 책이었지만, 여러분은 어떠실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리더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크게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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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기의 감각 - 삶의 감각을 깨우는 글쓰기 수업
앤 라모트 지음, 최재경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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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기의 감각>은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와 나탈리 골드버그의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에 한 발씩 걸치고 있는데 뭐가 됐든 작법 실습서는 아니다. 어떤 단어를 골라야 하지? 대사는 어떻게 써야 하지? 플롯은 어떻게 구성하지? 에 대한 대답은 거의 나오지 않을 뿐더러 나왔다 하더라도 시원치가 않다. 사실 이 질문들에 답할 수 있는 책은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없을 것이다. 글쓰기에 대한 최고의 조언은 그냥 '쓰라'는 말 말고는 해줄 게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책은 그냥 다른 사람은 어떻게 쓰나 정도를 참고하기 위해 읽어야 한다. 이런 책을 열심히 찾아 읽으면 언젠가 나도 글을 쓸 수 있게 될거야 라고 생각한다면 한참이나 잘못짚었다. 그냥 글쓰기에 뜻을 갖고, 글쓰기를 계속해나가는 사람들끼리 그 외롭고 힘든 작업에서 얻은 상처를 서로에게 까보이는 동병상련 공유기랄까? 뭐 이 정도로만 받아들이고 넘어가야 한다.


물론 진짜 실습서에 가까운 책도 있다. 이런걸 원하는 사람은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를 찾아가기 바란다. 구체적인 쓰기 지침이 있는 책으로는 여지껏 이것보다 나은 책을 본적이 없다. 게다가 이 책은 문제집에 가까운데도 불구하고 전체가 하나의 이야기처럼 술술 읽힌다. 읽는 재미까지 쏠쏠한 레전드 클라스의 작법서다.


반대로 재미를 극단적으로 추구하고 싶다면 역시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다. <쓰기의 감각>은 자신의 개인사를 술술술 내보인다는 점에서 <유혹하는 글쓰기>와 비교될만한데 재미만 놓고 봤을 땐 여름 전어와 겨울 방어만큼의 차이가 있다. 둘 중에 선택을 하라면, 난 언제나 방어의 편이다.


처음 몇 페이지를 읽었을 땐 분명 기대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애초에 글쓰기 꿀팁 같은 건 있지도 않다고 생각하거니와 있다하더라도 너무 당연한 것들이라고 생각했기에(엉덩이를 붙이고 끝까지 완성하라, 나의 초고도 당신의 초고만큼 엉망이다 등등) 나는 다른 것을 찾았다. 오랫동안 소설을 써온 사람이 형식의 족쇄를 벗고 자유롭게 내뱉는 문장의 향연, 때로는 통쾌하고, 때로는 감탄하고, 때로는 뼛속까지 공감되는 말들을 하나하나 주워담으며 따뜻한 연대를 이뤄나간다. 하지만 기대는 머지않아 덜컹. 초반에 반짝하는 섬광에 눈이 멀어 끝까지 달리긴 했지만 페이지가 쌓일수록 지리멸렬한 전개에 입맛이 싹 달아나고 말았다.


앤 라모트의 팬이라면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그녀를 좀 더 잘 알게 될테니까, 마치 현실 세계의 친구가 된 것처럼 알 수 없는 유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팬이 되기엔 국내에 소개된 책이 너무 없다. 소설가인데도 불구하고 소개된 책들은 거의 에세이인걸 보면 작가 자신도 정작 자신이 말한 쓰기의 규칙들을 지키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이 책은 엄연히 소설 작법서다). 350페이지가 넘어가는 책. 수백개의 칼럼으로 쪼개 매일 하나씩 읽었다면 그런대로 읽을만 했겠지만 한권의 책으로 만나기엔, 속이 부대끼는 게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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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소설의 계보학 - 탐정은 왜 귀족적인 백인남성인가
계정민 지음 / 소나무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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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소설의 계보학>은 해부의 첫 대상으로 뉴게이트 범죄 소설을 다루는데 이 소설들은 당시 영국 정부가 발행하던 범죄자들의 전기물인 뉴게이트 캘린더에서 주인공을 가져왔다. 뉴게이트 캘린더는 정부가 시민을 교화하기 위해 만든 책이었다. 흉악한 범죄자들의 생애과 그들의 처참한 최후를 상세히 기술함으로써 잠재적 범죄자들의 싹을 자르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뉴게이트 소설또한 그러한 의도를 품고 기획된 걸까? 전혀. 여기가 바로 뉴게이트 소설의 진가가 발휘되는 지점이다.


뉴게이트 소설은 뉴게이트 캘린더와는 달리 범죄자를 영웅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이 소설들은 대중의 폭발적인 지지 얻었다. 왜일까? 왜 범죄자들은 영웅이 되었고 영웅이 된 범죄자들은 사랑을 받은걸까? 뉴게이트 소설은 단순히 일탈의 욕구를 충족시킨 게 아니었다. 그 서사에는 당시의 대중들이 폭넓게 공감할 수 있는 뭔가가 있었던 것이다. 이 소설이 발흥한 19세기의 영국으로 돌아가보자. 산업혁명 이후로 자본주의는 급속도로 발전했고 그 시발점이자 씨앗이었던 영국은 그 누구보다도 찬란한 업적을 이뤄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폭발적 성장은 누군가의 희생이 전제되는 법이다. 산업자본을 이룬 부자들은 끝없는 호사를 누렸고 도시로 몰려든 노동자들은 강도 높은 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려 가난을 면치 못했다. 그들은 국가와 법이 시민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자와 체제, 즉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누구를 위하여 법은 존재하는가? 누구를 위하여 정부는 존재하는가? 따라서 법을 무시하고 잠시나마 체제를 농락한 범죄자들은 영웅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뉴게이트 소설은 바로 그 전복성으로 인해 세상에서 완전히 잊혀지고 만다. 지배자들은 무식한 하층민들이 체제의 허점을 발견하고 불만을 품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까 두려웠다. 잡초는 밟아야 한다. 그래도 일어선다면, 불을 질러 새카맣게 태우는 것이다.


이 세계의 좌측 끝에 뉴게이트 소설이 있다면 오른쪽 끝에 서 있는 게 바로 추리소설이다. 뉴게이트 소설과는 달리 추리소설은 오늘날까지 생명력을 이어올 뿐만 아니라 엄청난 인기까지 동반한다. 왜일까? 그것은 추리소설이 가진 보수성 때문이다.


탐정은 왜 항상 귀족적인 백인 남성인가? 그들은 노동을 하지 않는다. 탐정에게 범죄 수사는 취미이자 자신의 지적 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놀이일 뿐이다. 범죄자가 무질서를 의미한다면 탐정은 질서를 의미한다. 백인에 귀족 그리고 질서. 추리소설에서 범죄자가 탐정을 이기는 경우를 본 적 있는가? 그 누구보다도 탁월한 지능을 가진 탐정은 더럽고 추악하고 교활한, 법 질서를 무너뜨리려는 범죄자를 완벽하게 제압한다. 추리소설의 발흥기에 범죄자로 묘사된 사람들은 당시 유럽의 선진국으로 몰려들던 외국인이었다. 가난하고 천한자들이 우리의 세계(그들의 세계)를 파괴할지 모른다는 공포. 탐정은 무지한 사람들의 범죄 행위로부터 체제를 지키는 파수꾼이었던 것이다. 어딘가 익숙한 냄새가 나지 않는가?


하지만 추리소설의 가장 큰 문제점은 탐정이 서사를 독점하는 데 있다. 내가 추리소설을 싫어하는 이유는 탐정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게 아니라 이야기가 탐정을 위해 존재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추리소설은 오로지 탐정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탐정에게만 힌트를 제공한다. 독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마지막 장에 이르러 탐정이 풀어내는 사건의 전말을 들은 뒤 탁, 하고 무릎을 치는 것 뿐이다.


독자는 위대한 영도자의 지도를 따라야만한다. 생각하는 것은 금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도 금지. 이러한 태도가 내면화된 시민들은 실세계에서도 소극적으로 변할 수 밖에 없다. 스스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존재라는 자각은 전혀 하지 못한 채 자기들을 이끌어줄 구세주만을 바라는 것. 오늘날 선거는 유명한 탐정을 찾아 사건을 의뢰하는 것과 닮아있다. 모쪼록 현명하게 나라를 잘 "이끌어주길" 바랍니다. 우리는 오늘도 나라를 구원할 명탐정을 찾아헤맨다.


이러한 추리소설의 보수성은 20세기 초반 미국에서 태동한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 의해 어느 정도 변화를 겪지만 오늘날까지도 전통 추리소설에 비해 하드보일드 장르는 싸구려 B급 감성으로 매도되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몰이해를 고려하더라도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이 저자의 말대로 진짜 전복성을 가지고 있는지는 진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이 장르에 대한 개인적 애착때문인지 저자는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을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면이 있다. 하드보일드 추리 소설에는 대개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팜므파탈이 등장하고 결국 파멸하는데, 나에겐 이 구조가 실제 체제에는 반항할 용기가 없는 남성이 자기보다 약한 여자에게 화풀이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자와 외국인들이 내 직장을 뺏어갔다고 울분을 토하는 러스티 벨트의 백인 제조업 노동자들이 떠오르지 않는가? 설령 이 장르가 그런 사람들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반성의 기회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고 하더라도 그 효과에 대해선 여전히 물음표가 떠오른다. 싸구려 펄프 매거진에 찍혀 나오는 싸구려 소설. 남자들은 자신의 분신이 등장하는 소설을 읽으며 반성을 하기보단 대리만족을 느끼지 않았을까? 탐정이 팜므파탈의 손에 수갑을 채우는 순간 그들이 느낀 희열이 정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범죄소설의 계보학>은 책 전체에 걸쳐 다소 같은 말이 반복되는 면이 있고 너무 많은 발췌본이 등장하여(특성상 그럴 수 밖에 없는 점은 이해한다) 흐름을 끊는 면이 있지만 해당 장르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겐 신선한 충격을 안겨줄 만한 요소가 충분하다. 우리가 익숙하게 접해왔던 이야기들에, 우리가 눈치채지 못했던 의미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놀랍고, 한편으로는 소름이 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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