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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 공부 5분만 - 서울대학교 습관 디자인 프로젝트
고대원.성은모 지음 / 빈티지하우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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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꿈을 이룬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가 딱 하나라고 생각한다. 습관을 가졌느냐, 가지지 못했느냐. 나는 근 20년 동안 여러가지 독특한 습관들을 꾸준히 유지해왔는데 그럴때마다 사람들은 내게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나요? 질리지도 않아요? 사람들은 습관을 유지하는 일이 대단히 많은 에너지와 어마어마한 의지가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습관은 무의식 중에 발현되는 행위라 그걸 행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저항도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리모콘을 누르면 TV가 켜지듯이, 몸 어딘가에서 탁, 하고 불이 들어오는 것이다. 따라서 뭔가를 습관으로 만들면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도 그 일을 수십년 씩 해나갈 수 있다. 글을 쓰고 싶으면 글쓰기 습관을 들이고 살을 빼고 싶으면 운동하는 습관을 들이면 된다.


참 쉽죠?


하지만 해본 사람은 습관을 들이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 것이다. 습관은 비탈 끝에 걸쳐진 바위와 같다. 딱 한번만 굴리면 되는데, 그 한번이 참 힘들다. 그래서 우리는 습관을 굴리는 방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 바위를 수년 동안이나 밀어보고는 지쳐 쓰러져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안돼. 포기야. 그 순간 본인의 빈약한 의지에 자책감까지 밀려든다. 하지만 당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바위가 너무 컸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한번도 해본적이 없는가? 우리는 왜 항상 실패의 이유를 우리의 내부에서 찾으려 할까? 핵심은 '노오력'이 아닐 수도 있다. <습관 공부 5분만>은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든다.


저자는 우리가 습관 형성에 실패하는 이유가 우리의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굴리려는 습관이 애초에 너무 컸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 책은 만들고 싶은 습관을 정하고, 굴리고, 관리하는 방법을 체계적으로 안내하지만 핵심은 결국 '최대한 작게 시작' 하라는 것이다. 마치 스노우볼 전략처럼, 비탈 꼭대기에서 주먹만한 눈덩이 하나를 굴리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크기가 너무 작아서 과연 이런 게 저 먼 곳의 설산처럼 거대해질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을 갖는다. 하지만 작은 눈덩이를 굴리는 일은 '아무 것도 아닌 일' 이기에 당신은 자신의 행위를 의식하지도 못한 채 그 일을 기계적으로 해나갈 수 있다년 뒤 당신은 눈 앞의 설산을 밟고 지나가는 거대한 눈덩이를 목격할 것이다. 와! 저게 뭐지? 카메라를 꺼내 그 장관을 찍으려는 순간 당신은 당신의 뇌가 걸어오는 전화 한 통을 받게 될 것이다.


"안녕하세요 습관 관리 위원회입니다. 몇년 전 당신이 굴린 눈덩이 하나가 위원회의 정식 습관으로 등록되었습니다. 방금 산 하나를 뭉개고 지나갔네요. 보이시죠?"


이 책은 결코 화려한 성공담을 늘어놓지 않는다. 당신은 '하루에 책 1쪽 읽기', '영어 단어 2개 외우기', '간식 20분 늦게 먹기', 같은 목표를 세우고 그걸 해냈다고 서로를 칭찬하는 사람들을 비웃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한때는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인내와 끈기를 증명해낸 서울대생들이 말이다. 저자는 말한다. 


"모든 것을 잘할 것 같은 사람도 실제로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고통과 어려움을 느낀다는 걸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p.25)


저자는 서울대생 1,225명, 1만 시간의 기록을 화려한 언변도, 뜨거운 열변도 없이 한 자, 한 자 써내려 나간다. 그저 몸에 새겨진 시간의 기록들을 담담하게 고백하는 태도가, 내게는 한복판에 날리는 묵직한 직구처럼 진정성이 느껴졌다.


이 습관 모임은 원래 서울대생만을 대상으로 진행됐으나 책이 나온 이후로 문의하는 사람들이 많아 확장할 계획이라고 한다. 모임에 참가하고 싶거나 관심이 있는 사람은 아래 주소로 연락해 보기 바란다.


홈페이지: 5ivemin.com

인스타그램: 5bunman_go

페이스북: daewon.go.54

유튜브: https://www.youtube.com/channel/UCsv6LX0EAu6BanTSj0aroqg/ab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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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트의 세계
듀나 지음 / 창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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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정체불명의 배터리가 등장하면서 소설은 시작한다. 배터리. 보통 사람들로부터 그들이 가진 초능력을 끌어내는 촉매인간. 배터리의 등장과 함께 인류는 모두 초능력자가 됐다. 독심술, 마인드 콘트롤, 염동력 등등 발현되는 능력에 맞춰 사람들은 자신의 역할을 찾아나간다.


영화 평론가이기도한 듀나가 SF 소설을 쓴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런 류일줄은 몰랐다. 다소 멜랑콜리한, 로우 텐션의 이야기들이 주류일거라 생각했는데, <민트의 세계>는 나의 편견을 우주 밖으로 쏟아올렸다. 우선 이야기 자체가 대단히 흥미진진하다. 타이트한 구성은 그렇게 길지 않은 장편 소설을 단단하게 응축시킨다. 책장을 덮고나면 대단히 훌륭한 일품 점심 요리를 먹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갑자기 등장한 배터리, 그리고 보통 사람에서 개성을 가진 초능력자로 거듭난 사람들. 이 메타포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잠시 생각해 본다. 배터리는 고도로 발달된 현대 기술을, 사람들 모두가 초능력자가 된 현상은 그 기술을 누구나 쉽게 가질 수 있는 현대 기술 문명 사회를 말하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이런 메타포들을 적용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주인공 민트가 청소년이라는 점, 그리고 그녀가 꾸린 집단이 거대 기업에 맞서 싸운다는 점에선 익숙한 억압 구조를 떠올릴 수도 있지만 소설을 읽다보면 뭔가 다른 결이 느껴지는 걸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쉽게 말해 훨씬 가볍고 이야기의 재미에 집중하는 소설이다.


민트는 왜 목숨을 걸고 전쟁을 벌이는 걸까? 표면적으로 그녀는 거대 기업에(LK) 의해 소모성 자원처럼 다뤄지는 초능력자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그 수 많은 사건들을 기획하고 실행해온 것처럼 보인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는 자신의 친구들과 추종자를 데리고 우주로 탈출한다. 거기엔 사람뿐만 아니라 초능력을 지닌 다수의 동물들, 그리고 AI로 만든 인공 정신을 이식한 돼지의 뇌까지 포함된다. 이 장면에서 모세의 Exodus와 노아의 방주가 서로 한발짝씩 엇걸은 장면이 연상되긴 하지만 탑승자들의 면면이 딱히 세계의 축소판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을 것 같다. 그녀가 태운 탑승자들은 오덕 중에서도 진짜 오덕들만 찾아보는 일본 애니를 연상시킨다.


민트가 LK로 부터 탈취한 우주선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건조한 광속 우주선이었다. 그들은 그 우주선을 타고 우주 곳곳을 탐험하며 만물의 지배자가 되려 했다. 이 모든 계획은 민트에 의해 산산조각나고 만다. 그들은 마지막 순간 이 모든 계획이 사실은 인공 정신을 이식한 돼지의 뇌가 꾸민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극도의 혐오감에 몸서리 친다. LK는 민트에게 묻는다. 우주 개척의 선구자가 돼지의 뇌와 기타 어줍잖은 동물들이라는 것, 그들이 인간의 선두에 서는 걸 받아들일 수 있냐고 말이다. 그리고 그녀, 민트는 이름처럼 쿨하게 대답한다. Why not?


한가지 바람이 있다면 이런 소설은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독특한 소재와 낯설음은 저마다의 상상력 속에서 다채로운 색채와 이미지를 만들어 내겠지만, 그것을 화면에 담는 순간 지네 다리를 단 배추흰나비처럼 끔찍해질 게 뻔하다. 이야기를 구현하기에 현대 영상 기술은 한계가 있고, 듀나의 상상력에 준하는 연출자를 찾는 것도 어려울 것이다.


초능력자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민트의 세계>는 강추다. 설령 이런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데도 나른한 오후처럼 꿉꿉한 인생에 청량감을 불어넣고 싶은 사람이라면 일독을 권한다. 그녀의 이름이 괜히 민트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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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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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베카 솔닛의 책들은 하나의 철학을 체계적으로 정리, 설명한다기보다는  그녀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와 사유를 엿볼 수 있는 에세이들로 구성된다. 따라서 특정 키워드, 예컨대 페미니즘 같은 키워드를 통해 솔닛을 접한 사람들은 다소 실망할 수도 있다. 그녀가 비록 '맨스플레인(men + explain)'이라는 단어의 탄생에 지대한 공헌을 한 작가이긴 하지만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페미니스트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그들을 공격하는 자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가르쳐주지는 않는다. 독자는 고명하신 선생님과 제자의 관계로 그녀의 책을 만나는 게 아니라 메가폰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가 열변을 토하는 행동가와 보도에 서서 그녀를 쳐다보는 구경꾼의 관계로 만난다. 그녀의 목적은 물론 당신을 그 보도에서 걸어나와 길 한복판에 서게 만드는 것이다. 장담컨대 눈과 귀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녀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이다. 비록 그 주제가 정치에서 여성혐오, 기후문제에서 인권 문제로 여기저기 옮겨다니지만, 하나 하나의 꼭지에 담긴 생각들은 모두 반짝이는 보석같다.


누구도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꼬치 꼬치 캐묻기를 싫어한다. 사람들은 설명하기 힘든 문제, 설명하기 난처한 문제들에 대해 '원래 그런 거야' 라고 말하고 덮어두기를 좋아한다. 마치 썩어가는 음식물들을 가려둔 것 처럼, 누군가 조금이라도 들추려 들면 정색을 하고 화를 낸다.


레베카 솔닛에게 '원래 그런 것'은 없다. 모든 것이 '문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첫번째 단계는 그것이 문제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예컨대 결혼이라는 제도가 이어져온 수천년 동안 인류 역사에는 부부싸움이 있었을 뿐 '가정 폭력'은 없었다는 사실을 돌아보자. 이게 무슨 말이냐고? 부부싸움은 서로 다른 두 남녀가 같이 살면서 겪는 일상적인 일, 그러니까 개인과 개인, 크게 봐줘야 가정의 문제기 때문에 가정 내에서 당사자들끼리 해결해야 할 문제다. 하지만 '가정폭력'은 어떠한가? 그것은 가족 구성원들의 영혼을 파괴하는 일이며, '사회적 문제'이고, 따라서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된다. 이것이 왜 '이름들의 전쟁'인지 이제 알겠는가?


솔닛이 여기저기 분탕질을 벌이고 돌아다니는 이유는 익숙한 현상을 문제로 명명함으로써, 즉 그들을 그들의 진짜 이름으로 불러줌으로써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만들려는 것이다. 당연한 것들은 차곡차곡 눌러 내부에 쌓아둘 수 있지만 문제들은 그럴 수 없다. 그것은 표면이 거칠고 여기저기 삐죽 삐죽 튀어나와 사람들의 신경을 거슬린다.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어쩌겠는가? 누군가는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을 각오를 하며 이런 일을 벌인다. 그래야 세상은 균형을 맞출 수 있으니까.


개인적으로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라는 한국어판 제목보다는 <Call them by their true names>라는 원제가 훨씬 마음에 든다. 전쟁을 벌이자는 게 아니다. 그들을, 그저 진짜 이름으로 한번 불러보자는 것이다. 다같이 거리로 나와서. 혹은 공원에 비잉 둘러 앉아서 말이다. 나는 이 제안이 주는 평화가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 이것은 사사건건 성대결로 번지고 있는 최근의 우악스러운 사태에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 문제는 당신이 아니라 문제 그 자체다. 문제를 문제라고 말하는 건 당신을 비난하는 게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다. 그러니 다같이 모여 그들을, 그들의 진짜 이름으로 한번 불러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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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519
박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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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은 시간으로 시를 쓰고 살핌으로 사랑을 하는 시인이다. 책날개에 쓰인 말, "돌보는 사람은 언제나 조금 미리 사는 사람이다"라는 말은 그의 사랑과 시에 섞일 정서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박준은 늘 한발짝 뒤에 떨어져 걷거나 미리 나와 기다리는 사람이다. 사랑하는 이가 행여나 잠에서 깰까 조용 조용 책장을 넘기다 깼다는 기침을 느끼는 순간 조용히 책장을 덮고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이다. 나는 박준의 시에서 항상 아련하고 왠지 뜻 모를 아픔을 느끼는데 아마도 그것은 그의 시가 늘 과거의 이야기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시인이 더 이상 그 사랑을 안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면서도 박준은 펑펑 울거나 주고 받은 크기의 부당함에 억울해하거나 가버린 것에 집착하는 법이 없다. 그는 사라진 것을 조용히 놔둔 채 묵묵히 바라보는 시를 쓴다. 연필이 원고지 위를 구르는 소리라도 들렸다간 기억이 산산히 부서지기라도 한다는 듯이. 박준은 한번 뱉은 말은 결코 죽지 않고 어딘가에 모여 쌓인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사랑을 이야기할 때 대상을 직접 찾아가 묻는 대신 말이 쌓인 숲을 찾아간다. 거기서 그는 꽃을 찾듯 흘러간 말들을 기어 올린다. 그렇게 구성된 시간을 박준은 시로 옮겨 쓴다. 그의 말들이 뚜렷한 형체나 색을 보여준다기 보다는 전체가 흐릿하게 채색된 인상으로 남는 이유가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나는 쓰는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읽지 않는 시대에 살아야 하는 모든 사람들을 존경한다. 그들은 쓰러진 담장을 매일 아침 다시 쌓아올리는 답답한 사람들이고 파도에 쓸려 바다 밑으로 끊임없이 가라앉는 사람들이다. 그 중에서도 시를 쓰는 사람은, 그 중에서도 서정을 노래하는 사람은 발목에 가장 큰 족쇄를 차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박준의 성공이 놀랍고 또 반갑다. 그의 서정시가 읽지 않는 시대에 새기는 울림은 우리의 쓰기가 그동안 얼마나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것 같다. 그동안 우리는 시대의 벽을 뚫을만큼 단단하지 못한 우리의 글에 끊임없이 담금질을 계속해왔던 건 아닐까? 젊은이의 외투를 벗게 한 건 강한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햇살이었다는 옛 이야기를 까맣게 잊은 것처럼 말이다.


현실의 고통이 클수록 사람들은 과거에 광택을 더하곤 한다. 그들은 앞으로 나아가기 보다는 뒤를 돌아보며 자신이 더한 밝기에 취해 오늘의 고통을 마취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박준의 시가 성공을 거두는 것도 이해가 된다. 그의 과거는 항상 아름다운 배려로 가득하니까. 만화경에 홀린 아이처럼, 우리는 그 아름다운 세계를 다시 현실에 지으려 노력하기 보다는 과거의 환상에 주저앉는 것이다.


이 시의 성공이 차갑게 식은 우리의 심장에 다시 불을 붙였기 때문인지, 우리를 돌려세워 오늘의 고통에서 눈을 떼도록 마취시켰기 때문인지, 나는 아직 모르겠다. 생각하기에 앞서 나는 그냥 박준의 시가 좋다. 이 시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든, 그것이 작가 스스로 의도한 것이든 그렇지 않든, 나는 사랑하는 사람의 옅은 향만으로도 취해 설레이는 사람처럼, 그의 시를 읽고, 또 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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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북유럽 신화
닐 게이먼 지음, 박선령 옮김 / 나무의철학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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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를 읽다보면 신들이 인간 중에서도 최고의 멍청이들을 모아 놓은 집단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온갖 지혜와 진리를 획득한 신조차 어이없을 정도의 속임수에 넘어가는데, 솔직히 그런 실력으로 어떻게 세상을 다스리는지 알 도리가 없다. 아!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이 이토록 어지러운 건가?


신화는 고대인들의 세계 해석서였다. 해가 뜨고 달 지고 바람이 불고 천둥이 치고 비가 내리고 강이 범람하고. 그들은 변덕스러운 자연 현상이 두려웠고 그 두려움을 몰아내는 방법으로 놀랍게도 이야기를 선택했다. 태양이 움직이는 것은 그것을 집어 삼키려 달려오는 늑대를 피하기 위해서고 천둥이 치는 것은 천둥의 신이 노했기 때문이다. 이유를 알게된 사람들은 더이상 두려워하지 않게됐고 그것을 섬김으로써 다가올 재앙과 화를 막을 수 있기를 바랐다. 이것이 바로 신화가 탄생한 이유와 인간이 신을 섬기게 된 유래다.


따라서 신들은 엉망진창일 수 밖에 없다. 예측할 수 없는 세상의 변화, 단 일초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만물의 특성을 신의 속성으로 반영해야 했기 때문이다. 신들은 인간과 닮았고 인간의 삶에 깊숙히 들어온다. 나는 언제나 그 시절의 이야기가 흥미로웠고 정말로 그 시절이 그립다. 세계에 대해 최초로 입을 연 자가 이야기꾼이라는 것도 반갑다. 그래서 나는 항상 신화에 탐닉했다. 인도, 이집트, 수메르, 동이, 그리스, 북유럽 기타 등등. 만물에 깃든 신들의 세계. 모두가 각자의 신을 섬겨도 벌받거나 생존을 위협당하지 않던 세상.


그 중에서 최고는 역시 북유럽 신화였다. 이유를 생각해보면, 역시 현대 판타지물의 배경과 가장 흡사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북유럽 신화에는 고블린과 드워프를 연상케하는 난쟁이와 다크엘프, 트롤이 등장한다. 스케일 면에선 어떤가? 미드가르드 뱀에 비하면 메두사는 어린 애 장난 같고 미노타우루스는 펜리스의 에피타이저 수준이다. 생활도 훨씬 구체적이다. 토르는 오딘, 로키와 함께 연회장에 모여 매일 맥주를 마신다. 즐기는 고기는 돼지와 염소인데 황당하게도 그 염소가 이끄는 마차를 탄다. RPG 게임의 전설템 같은 도구들도 수두룩하게 나온다. 태양신 프레이에게는 저절로 싸우는 검과 황금갈퀴를 날리는 돼지가 있고 그의 주머니에는 차곡차곡 접어 넣을 수 있는 배 한 척이 들어 있다. 오딘은 절대로 빗나가지 않는 창 궁니르를, 토르는 그 유명한 망치 묠니르를 휘두른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나의 마음을 끈 건, 그들에게 라그나로크가 있었다는 것이다.


라그나로크. 신들의 황혼. 인간만큼 어리석고 타락한 신들은 약속의 때에 이르러 서로를 죽이는 대전쟁을 벌인다. 이 날 오딘은 드디어 펜리스에게 먹혀 음흉과 비밀로 가득했던 삶을 마감한다. 항상 말보다 주먹이 빨랐던 폭력범 토르도 미드가르드 뱀이 뿜은 독에 맞아 죽는다. 나는 그 어떤 신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이 핏빛 대멸망이 마음에 든다. 이 이야기는 아무리 위대한 존재도 결코 소멸의 운명을 피할 수는 없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하물며 인간은 어떻겠는가? 라그나로크가 벌어진 뒤 펼쳐지는 무의 잿더미는 삶의 끝이지만 동시에 싸움과 증오, 슬픔과 고통의 끝이기도 하다. 피로한 신들은 하늘에 올라 지긋지긋한 영생을 사는 게 아니라 마침내 완전한 무로 돌아간다. 나는 여기서 지극한 안도를 느낀다.


<북유럽 신화>는 어린애들도 넘어가지 않을 조악한 이야기와 대화로 가득하고 아주 조금 남은 재미마저 번역이 먹어치우지만, 나는 이 책을 두 번이나 읽었다. 이야기는 그런 것이다. 머리를 통째로 꺼내 박박 문질러 닦아도 지워지기는 커녕 점점 넓게 번져나간다. 이것은 평생 조금씩 변하며 머리 속에 고유한 흔적을 남긴다. 이야기가 우리와 평생을 함께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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