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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드 블러드 - 테라노스의 비밀과 거짓말
존 캐리루 지음, 박아린 옮김 / 와이즈베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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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 유니콘 테라노스의 핫한 사기극이 400페이지에 걸쳐 쏟아진다. 성공과 야망에 취해 양심을 잃은 엘리트의 최후가 자못 희극적이다. 거짓이 정의의 심판을 받는 드문 해피엔딩이라 읽는 마음에 상쾌함이 분다. 아주 재미있는 책이다.


테라노스는 엘리자베스 홈즈라는 한 매력적인 여성이 설립한 혈액분석기 제조 스타트업이었다. 보수적이기로 소문한 의학계에, 약관의 나이, 그것도 스탠포드를 중퇴한 학력으로 도전장을 내민다는 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단 한 방울의 피로 수 백가지의 질병 검사를 할 수 있는 솔루션이라니! 과감한 아이디어가 창업자의 배경과 얽히자 성공 신화의 씨앗이 잉태됐다. 사람들은 그녀의 대범함에 놀랐고 그녀의 비전이 바꿀 세상에 가슴이 부풀었다. 너도 나도 지갑을 털어 수 천억을 투자한다.


돌이켜보면 그 똑똑한 사람들이 왜 그리 하나같이 바보처럼 굴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사기극에 속아 주요 주주로 참여한 면면은 놀라울 정도로 화려하다. '아이언맨'의 실제 모델이기도 한 오라클의 CEO 레리 앨리슨부터 얼마전 디즈니에 폭스 엔터를 매각한 언론계의 전설적 재벌 루퍼트 머독까지. 그들은 10억, 20억도 아니라 무려 천억 단위의 수표를 앉은 자리에서 끊어줬다. 도대체 왜? 나는 그 이유를 기회의 기회비용과 신뢰 구축의 메커니즘에서 찾고자 한다.


실리콘밸리에선 기회의 기회비용이 너무나 거대하다. 무슨 말이냐고? 만약 당신이 1997년 야후의 CEO고 1조원에 구글을 인수할 기회가 있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 거래는 우리가 익히 알듯 야후의 포기로 끝이 났고 이후 구글은 시가 총액 1,000조의 기업으로, 야후는 흔적조차 사라져버렸다. 물론 사업상 실수는 얼마든지 저지를 수 있다. 하지만 실리콘밸리에선 그 규모가 엄청날 뿐만 아니라 그 사실이 역사에 새겨져 영원한 조롱의 대상이 된다. 그 동네에선 안목이 없는 회사라는 이미지보다 더 최악인 건 없다. 미래를 보지 못하는 바보, 쿨하지 못한 인간들. 실리콘밸리에선 이처럼 투자를 해서 망하는 것보다 좋은 투자를 거절하는 것에 대한 기회비용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크다. 게다가 향수를 일으키는 배경의(대학 중퇴) 매력적인 CEO가 가슴을 뛰게 하는 거대한 비전을 들고 나온다면 사람들의 머리 속엔 위대한 그(스티브 잡스)의 그림자가 각인될 수 밖에 없다. 이 경우 CEO의 편집증에 가까운 비밀 유지, 오만한 성격, 기행, 기타 안하무인적 행동들은 오히려 '좋은 지표'로 간주되기에 이른다.


테라노스 사태를 통해 나는 신뢰라는 게 빈약한 사실 위에서도 얼마든지 강력하게 구축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전달하려는 내용이 믿을만한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건 그 내용을 둘러싼 사람들의 영향력이다. 오바마가 엘리자베스 홈즈를 백악관에 초청해 앞으로 미국을 이끌어 갈 차세대 CEO라 지목한다면 우리가 감히 테라노스를 사기꾼이라 부를 수 있을까? 앞에서도 말했듯 테라노스에 투자한 사람들의 면면은 전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에서부터 국방장관, 언론 재벌, 주요 산업계의 리더들 까지 대단히 화려했다. 그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하나같이, 대학 중퇴자의 농간에 속고 있다는 건 태어나서 처음으로 탄 비행기가 납치 됐는데 그 범인이 당신의 외삼촌일 확률보다 희박하지 않을까?


하지만 신뢰가 구축되는 과정을 돌아보면 이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니까 신뢰란, 레리 앨리슨과 루퍼트 머독과 헨리 키신저와 오바마가 테라노스를 믿기 때문에 형성되는 게 아니라 루퍼트 머독이 레리 앨리슨을, 헨리 키신저가 루퍼트 머독을, 오바마가 헨리 키신저를 믿기에 형성되는 것이다(이 관계는 단지 예시일 뿐 사실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이처럼 신뢰는 사슬처럼 이어진다. 뒤에 연결되는 사슬은 자기가 연결되는 사슬의 단단함만을 따질 뿐 이 고리 전체가 매달려 있는 거치대의 견고함을 따지지는 않는다. 시간이 갈수록 사슬은 점점 단단한 고치를 형성해간다. 복잡하게 얽힌 사슬로 인해 거치대의 부식과 부패는 효과적으로 감춰진다.


이는 마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연상케 한다. 최초의 대출자는 신용도가 심각하게 낮은 부실 채권자지만 은행은 여기에 고신용 대출자들을 섞어 우량 금융 상품을 만들고 보험회사는 그 금융 상품의 신용도에 맞춰 상품을 판매한다. 이후 수 많은 파생상품들이 동일한 전제에 근거해 같은 행동을 거듭하며 거대한 버블이 형성된다. 반대로 이 말은 초기에 나의 신용을 보장해줄 Key Person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 준다. 보잘것 없는 저축은행이 탑 중의 탑을 모델로 기용하는 이유. 제품이 부실한데도 TV CF에 투자금을 쏟아붓는 이유. 유명한 사기꾼이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이를 꼭 명심하는 게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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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사건으로 보는 돈의 역사 돈의 역사 1
홍춘욱 지음 / 로크미디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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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역사>는 세상만사가 결국 돈의 문제라는 결론을 지지한다. 인간의 역사는 돈의 역사다. 돈의 흐름에 따라 국가의 흥망성쇠가 정해졌다. 과거 역사책에 국가의 패망 원인으로 단골처럼 등장했던 '무리한 토목공사' 라는 말이 기억나는가? 이는 무리한 노역으로 백성들의 생업이 무너지고 그로 인해 거두어들일 조세가 줄어들었으며 이는 국가 재정에 악영향을 끼쳐 통치력을 상실, 반란 또는 외세의 침략으로 멸망했음을 함축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저자는 돈의 힘이 더 강력해진 근대의 여명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대항해시대의 선두주자로 전세계 은 유통량의 상당량을 차지했던 초강대국 스페인은 왜 보잘것 없는 영국에 패권을 넘겨줄 수 밖에 없었을까? 로마 이후 처음으로 유럽을 제패할 것처럼 보였던 나폴레옹의 프랑스는 또 어떻고?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산업혁명을 일으킨 영국은 현대 금융서비스의 선두주자 이기도 하다. 산업과 금융은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이어져 있다. 부국강병의 길은 결국 축재의 길과 같은 것이다. 비록 현대에 이르러 금융에 방점을 찍은 영국이 산업을 등에 업은 독일에 밀리긴 하지만 큰 그림의 측면에서 그냥 넘어가주자.


이후 이야기는 미국 대공황과 플라자 합의 한국의 IMF 구제금융으로 이어가며 국지적 경제 현상을 통해 거시적 경제 원리를 설명하려 시도한다. 이 과정에서 금본위제와 스태그플레이션, 그 유명한 일본의 자산 버블에 대해 배울 수 있다. 이 단어들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불편했던 사람들이라면 이번 기회를 통해 공부해보기 바란다. 각 장의 끝에는 깨알같이 그 장의 내용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을 담았다. 보통 사람들에게 최대한 쉽게 경제 이야기를 전하려는 저자의 의도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가독성이다. 읽기가 쉬울 뿐만 아니라 내용이 잘게 쪼개져 있어 책만 들면 참새 머리처럼 쉴새 없이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사람에겐 안성맞춤이다. 그러나 이러한 장점은 필연적으로 깊이의 부족과 산만함으로 이어진다. 얼핏보면 거시적 관점에서 돈의 역사를 주유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특정 사건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도약하다보니 생각보다 부드럽게 이어지지는 않는다. 각 장이 단편적이고, 가끔은 말을 하다 만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점은 모든 경제 문제를 통화공급의 문제로 환원시킨다는 점이다. 복잡한 인간 세상의 돈 문제가 그처럼 단칼에 설명이 된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다양한 이론들이 치열한 갑론을박을 벌이는 각축장이다. 저자는 자신의 이론과 반대에 선 이야기를 절대로 꺼내지 않는다. 특히 1997년 이후의 한국을 설명하는 부분에선 상당히 편파적이다. 이 책이 정말 보통 사람들을 위한 경제 입문서를 지향한다면 이러한 차별은 지양했어야 옳을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이 책을 초심자에게 권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무엇보다 균형잡힌 시각을 갖길 원한다면 다른 책들을 대안으로 삼는 게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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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홀 The Hole
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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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은 구멍의 깊이만큼 어둡고 축축한 소설이다. 이야기는 현재에서 시작해 과거로 흘러간다. 주인공 부부는 불의의 사고를 당해 부인은 죽고 남편은 전신마비에 이른다. 꼼짝도 못하는 사위를 장모가 보살피기 시작하는데, 그녀는 우연히 죽은 딸의 일기를 보게되고 사위에 대한 태도가 차갑게 변한다.


일기에 뭐가 적혀있었던 걸까?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턱 관절이 부러져 말도 못하는 '나'는 삶의 전부를 장모에게 맡긴 채 살아가야만 한다. 끈질긴 재활 끝에 겨우 왼팔 하나를 움직일 수 있게 됐지만 병문안을 온 사람들에게 전하는 '나'의 메모는 오해와 무관심 속에서 번번히 물거품이 되고만다. 오가는 사람들로부터 장모가 마당에 커다란 구멍을 파고 있다는 얘기를 듣는다. '나'는 장모가 연못을 만들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안다. 그 구멍은 연못으로 쓰일 것이다. 그 구멍은 연못으로 쓰일 것이다. 그 구멍은 연못으로 쓰일 것이다.


이야기가 과거에서 현재로 흘렀다면 <홀>은 따분한 인과응보의 소설이 됐겠지만 그 순서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이야기는 축축한 긴장을 흡수한다. 많이도 아니다. 책장을 넘길때마다 조금씩 흘러나오는 서스펜스에 서서히 중독된다. 소재면에선 스티븐 킹의 <미저리>를 떠올리게 하지만 이야기 면에선 아예 서 있는 위치가 다르다. <홀>이 훨씬 더 절망적이다. 이 소설은 희망고문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준다. 그것이 어떻게 인간을 절망시키는지를. '나'는 등 뒤에서 서서히 차오르는 물의 냉기를 느끼면서도 몸을 일으키기는 커녕 소리도 지르지 못한다. 작가는 애초에 '나'를 구해줄 마음이 하나도 없었던 것 같다. 무서운 건 장모가 아니다. 작가다.


익숙한 일상에서 미지와 공포, 긴장을 만들어내는 데 있어선 편혜영을 따라올 자가 없는 것 같다. 그녀는 요란한 사건을 만들지 않고도, 피와 시체를 빼고도 털을 쭈뼛 세우는 어둠을 만들어낸다. 그녀의 어둠은 단단히 응축된 구체처럼 눈에 띄는 게 아니라 뿌연 안개처럼 온 세상을 뒤덮는다. 어느샌가 안개의 한복판에 들어와 길을 잃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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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 - 산업도시 거제, 빛과 그림자 질문의 책 22
양승훈 지음 / 오월의봄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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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는 제목에서 풍기는 무거움과는 다르게 대단히 재미있는 책이다. 사회학 학술서처럼 보이고 내용도 그게 맞기는 하지만 서술 방식이 에세이같아 가독성이 매우 뛰어나다. 제공하는 통계들은 저자가 자신의 주장에 객관성을 부여하기 위한 시도일뿐 반드시 독해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토록 술술 읽히는 사회학 책이 언제 또 있었는가를 돌이켜보면, 글쎄 기억이 나질 않는다. 거의 독보적인 책이다.


저자는 대우조선해양이라는 회사에 5년간 근무하며 경험한 일들을 토대로 산업도시 거제와 대한민국의 조선업을 분석하고 그 미래를 조망한다. 나는 이 시도가 사실상 대한민국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돌아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조선업의 시작과 함께 탄생한 거제의 중산층이, 조선업의 몰락으로 인해 해체될 위기를 그리지만 이를 산업도시 거제와 조선업 종사자들로만 한정해 해석할 이유는 없다. 현재 대한민국이 누리는 부의 대부분은 제조업으로부터 축적된 것이며 우리가 중산층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이 산업의 절정과 함께 탄생했기 때문이다. 제조업이 차지하는 경제 비중은 매년 감소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30%에 달한다. 이는 OECD 가입국 중 최고이며 세계의 공장이라 불리는 중국보다도(29%) 높은 수치이다. 혹자는 이것이 한국 경제의 문제라 지목하며 여타의 선진국들과 달리 제때에 서비스업으로 방향 전환을 하지 못한 결과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사람들은 자기가 익숙히 접하는 현상과 미디어를 통해 세상을 파악하기 때문에 그 현상을 지탱하는 내부 구조에 대해서는 둔감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이마트나 롯데백화점에 가서 물건을 사지 그 제품을 생산한 공장에서 사지 않는다. 미디어는 연일 4차 산업 혁명을 부르짖고 AI, IoT, 스마트 산업 혁명을 쏟아내며 새롭게 탄생한 유니콘을 조명할뿐 어느 시골 구석에 쳐박힌 알짜 중소기업의 공장에 눈을 돌리진 않는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이 가장 강한 건 아니다. 세상은 마치 이들의 주도로 굴러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제조업이 탄생시킨 중산층과 높은 그들의 소득으로 인한 욕망의 발전이 없었다면 그들이 설 무대는 결코 도래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한민국에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어느 대학을 나오든, 무슨 전공을 했든, 근면과 성실만 있으면 누구나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던 시절 말이다. 이제 그런 유토피아는 사라져갈 위기에 처해 있다. 가장 흔한 분석은 이렇다. 기술로는 선진국을 따라가지 못하고 가격으로는 개발도상국과 경쟁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진국들은 어땠을까? 세계 조선업의 패권은 영국에서 스웨덴, 스웨덴에서 일본 그리고 한국으로 넘어왔다. 이들은 단물이 빠진 제조업을 버리고 제때에 방향을 전환했기 때문에 오늘날처럼 부자 나라가 된걸까? 그 말이 맞다면 제조업은 단순히 미래로 가기 위한 통과의례에 불과할 것이다.


공장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우리 머리 속에 무엇이 떠오르는지 생각해보자. 쉼없이 돌아가는 기계, 소음, 먼지, 재해, 기름에 쩐 작업복,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나 가는 곳. 산업과 직군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대기업 제조 공장을 한번이라도 찾아본 사람은 이것이 얼마나 큰 편견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나는 제조업이 구시대의 산물이라는 생각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특히 '부의 평등'을 고려하는 사람들이라면 절대로 제조업에서 눈을 돌려선 안된다. 1980년대, 대한민국의 구석에서 시작한 조선업은 수십만 명의 사무직과 생산직을 고용하며 그들에게 크고 안정적인 소득을 안겨줬다. 그들은 용접 기술이나, 지게차 운전 면허증이나, 도색 기술 하나만 가지고 있어도 그런 부를 거머쥘 수 있었다. 5조 5천억이 넘는 매출에 20%에 육박하는 영업이익을 내는 우리나라 최고의 IT 기업 네이버는 9천 명 정도의 인원을 고용하지만 고작 2~3%의 영업이익을 내는 한심한 LG전자는 7만 명이 넘는 사람을 고용한다. 최저시급이나 받는 생산직들이 많은 탓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지금 당장 인터넷에 대기업 생산직 평균 연봉을 검색해 보기 바란다. 앞으로 대한민국에 수백개의 IT 유니콘 기업이 탄생한다 하더라도 제조업 절정기만큼 두터운 중산층을 만들어내지는 못할 것이다. 고용 창출 능력과 다양성 측면에서 제조업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대한민국도 올라올 만큼 올라왔으니 이제 공단으로 대표되는 제조업은 전부 개발도상국에 맡기고 제약, 반도체 같은 최첨단 공장과 금융, 관광, IT 서비스를 중심으로 경제를 재편해야 할까? 아니. 문제가 있으면 고치면 되지 버릴 필요는 없다.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는 정확히 이런 의견을 견지하며 세계 1등의 조선업을 해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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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텐 국가를 말하다 - 국가라면 꼭 해야 할 것, 절대 해서는 안 될 것!
이중텐 지음, 심규호 옮김 / 라의눈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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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중톈은 중국의 르네상스인으로 불리는 학자로 그 별명에서 알 수 있듯 다양한 분야에 통달한 지식인이다. 본업은 미학이지만 이름을 얻은 건 CCTV에서 진행했던 <삼국지 강의> 덕분이었다. 나는 방송이 아니라 책으로 접했는데 우리 세대가 공유하는 삼국지에 대한 열광을 감안하더라도 엄청난 책이었다. 두꺼운 책 두 권을 눈깜짝할 새에 읽었던 기억이다.


이중톈 선생의 가장 큰 특징은 가독성이다. 아무리 어려운 개념이라도 그의 손을 거치고 나면 엉켰던 실타래가 술술 풀리는 것처럼 시원하게 설명이 된다.


그런데 이 책은 좀 다르다. 그 자신이 선언하듯 <국가를 말하다>는 학술서다. 한자어 특유의 모호한 뜻풀이가 반복되는가 하면 내용 자체가 친숙하지 않아 그것이 학계에 널리 통용되는 정의인지 아니면 이중톈 선생의 독자적 해석인지 구분할 길이 없다. 이러한 모호함 때문에 독자는 똑같은 말이 반복된다고 느낄 수도 있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처럼 지나치게 사변적인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다음은 '악'에 대한 선생의 설명이다.


악은 음악의 뜻이자 쾌락의 뜻이기도 하다.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음악처럼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데, 예로 상하의 질서를 정연하게 만들고 악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화창하게 만든다(p. 189).


이는 서주 시대의 덕치 제도를 설명하면서 주공이 왜 '예악'을 덕치의 실행 방법으로 고안했는지를 말하는 대목이다. 얼핏보면 어려울 게 없는 문장이지만 하나하나 세세히 뜯어보면 모호한 구석이 많다. 우선 '악이 쾌락의 뜻' 이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악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즐거움을 불러일으킨다는 말일까?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 '음악처럼 조화를 이뤄' 야 한다는 건 그렇다치고 '예로 상하의 질서를 정연' 하게 하는 걸 납득해도 '악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화창하게 만든다' 는 건 뭘까? 딱딱한 위계질서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악으로 치유해줘야 한다는 말일까? 다음은 이 단락의 결론으로 오묘한 동어반복의 미로에 빠지는 기분이 든다.


물론 여기서 중심이란 덕이고 두 개의 기본점은 예와 악이다. 예는 차이를 변별하고 악은 조화로운 통일을 추구한다. 예는 질서를 중시하고 악은 화해를 강조한다. 예와 악은 모두 덕치를 위한 것이다. 덕치가 근본이 되어 예악을 실시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예악 제도' 이다(p. 189).


<국가를 말하다>는 역사, 그 중에서도 제국의 제도에 집중한다. 시황제의 천하 통일 이후 수 많은 왕조가 중원 제패와 멸망을 반복하며 대륙의 주인으로 거쳐갔지만 '제도' 만큼은 큰 변화없이 이천년 넘게 중국을 지배해왔다는 게 이 책의 요지다. 선생은 2천년간 이어져온 제국의 제도에 '공화'는 없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공화'란 무엇인가? 왕이 없다는 것이며 국가의 주인인 백성에게 권력이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대륙에 공화의 전통이 없었기 때문에' 라는 말에 숨은 진짜 의미가 무엇일까? 힌트를 주자면 중국 당국이 이 책의 출판을 막으려 했다는 것이다.


사실 공화의 전통을 가진 나라는 전 세계의 역사를 통털어도 손에 꼽을 정도이다. 시민 혁명이 일어난 프랑스에는 공화의 전통이 있었는가? 영국은? 독일은? 비슷한 제도를 공유했던 한국은 어땠을까? 대한민국은 이중톈 선생이 중화에 크게 미치지 못하는 소국이라 칭할만한 나라지만 공화의 전통없이도 그 장점을 발견하고 수많은 사람이 피땀을 흘려 제도로 확립한 나라다. 12억 인민도 못해낸 일을 그 10분의 1도 안된 시민들이 이뤄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은 선생의 진의를 확인하고나서야 올바른 가치를 지닐 수 있다. '공화의 전통이 없다' 라는 선생의 말은 사실상 전제국가로 나아가는 자국의 상황을 변명하기 위함이었을까? 아니면 국가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에둘러 표현한 풍자일까? 나는 어느정도 판단이 섰지만 독자들을 위해 그 답은 보류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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