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그림자 (합본 특별판) 잊힌 책들의 묘지 4부작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정동섭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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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바람의 그림자>는 '잊힌 책들의 묘지'에서 시작한다. 아무에게도 얘기해서는 안 되는 미로 같은 동굴. 오래된 종이 냄새가 진동하는 그 비밀스러운 장소에서 주인공 대니얼은 훌리안 카락스의 소설 <바람의 그림자>를 선택한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작가였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결정은 들어서는 순간 끝났다. 대니얼은 자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그 책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걸 운명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훌리안 카락스의 <바람의 그림자>는 친아버지를 찾아 나선 한 남자의 오디세이다. 단서는 어머니가 죽기 전 남긴 몇 마디뿐이다. 그 여정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잃어버린 과거를 찾고 저주받는 사랑의 그림자를 발견한다. 이야기는 열어도 열어도 반복되는 마트로시캉처럼 수천 개로 뻗어나간다. 숨도 쉬지 않고 읽은 대니얼은 푸른 새벽녘이 되어서야 마지막 페이지에 가닿을 수 있었다. 졸음과 피곤이 몰려왔지만 그는 잠들 수 없었다. 아직 소설과 작별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폰의 <바람의 그림자>에서 카락스의 소설은 현실이 된다. 카락스의 <바람의 그림자>는 카락스 자신의 인생을 거의 그대로 옮겨 담은 작품이다. 아들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구박만 해대는 계부,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어머니. 카락스는 우연히 계부의 가게를 찾은 부자의 후원을 받아 훌륭한 교육의 기회를 얻는다. 그 부자는 첫눈에 카락스의 비범함을 알아봤다. 자기 아들은 발끝만치도 따라갈 수 없는 재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부자는 자기 아들대신 카락스를 후계자로 점찍는다. 신데렐라가 될 뻔한 이야기는 저주받은 사랑 앞에서 갈기갈기 찢겨버린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동정도 되지 않을 비극. 두 청춘은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파멸한다.


대니얼은 <바람의 그림자>를 유일한 단서로 카락스의 인생을 추적해 나간다. 단순히 호기심에서 시작한 그 일이 또 하나의 오디세이가 된다. 처음 카락스를 찾아 나섰을 때 대니얼은 그 일이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카락스와 그 환상적인 소설 그리고 대니얼의 현실은 거미줄처럼 얽혀있었다. 거기에 붙잡힌 사람들은 거대한 독거미의 먹이가 될 운명이었다.


이 정도 규모의 이야기를 지어내려면 얼마나 큰 고통을 받아야 할까? 이야기는 등장인물들의 인생을 겹겹이 쌓아 장인의 밀푀유를 만들어낸다. 심지어 그 밑에는 프랑코 독재 시절의 암담한 바르셀로나라는 역사적 배경까지 깔려있다. 소설은 소설 속의 현실과 그 속의 환상, 그리고 현실 세계의 시간까지 촘촘하게 구성한다. 그야말로 '스케일'에 압도당한 800페이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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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 빈곤과 청소년, 10년의 기록
강지나 지음 / 돌베개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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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을 겪는 사람의 삶에서 공동체의 질서와 문화는 우선순위가 아니다. 생존은 생존 외에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도록 강한 압력을 행사한다. 가난한 사람은 더 우악스럽게 보인다. 무식해 보인다. 표정은 언제나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 잘못 건드렸다간 칼부림이 날 것 같다. 가난은 좁은 시야를 만든다. 총체적 사고를 베어내고 절박을 심는다. 그래서 사기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잘 작동한다. '저러니까 가난하게 살지'는 대부분 틀린 말이다. '가난해서 저렇게 사는 것이다.'


우리 가족이 커다란 사기를 여러 번 맞게 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첫 번째 사기로 집을 잃었을 때 '길바닥에 나앉는다는 것'이 진짜 무엇인지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가난한 가족이 왜 뿔뿔이 흩어져 각자도생할 수밖에 없는지도 알게 됐다. 어떻게 해서든 위기를 수습하고 싶었다. 그 절박함이 우리를 두 번째 사기로 이끌었다. 사정이 딱해 싸게 집을 내준다는 상투적 낚시를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멍청하게, 구명줄로 생각한 것이다.


가난은 사회적 안전망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이동시키는 디버프도 시전 한다. 돈 때문에 문제를 겪는 가정은 그 문제가 대부분 일가친척과 친구들에게 옮겨 간다. 재수가 옴 붙듯이. 집안이 풍비박산 난 아이들은 학교를 가지 않고 밥을 굶고 비행에 빠지지만 그걸 돌봐줄 어른은 어디에도 없다. 주변의 모든 사람이 이미 원수보다 못한 사이가 됐기 때문이다.


정책과 금융서비스는 애초에 그들 편을 떠났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하기 때문에 대출이 안 된다. 되도 더 비싼 이자를 치러야 한다. 가난한 사람은 돈이 없기 때문에 비싼 월세를 내야 한다. 다양한 지원 정책이 존재하지만 정보는 머나먼 정글이다. 누가 알려주는 사람도 없고, 관심을 기울일 여유도 없기 때문이다.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는 빈곤의 원인과 영향을 청소년의 삶에 맞춰 밀착 분석한다.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의 인터뷰가 상세히 실리고 그 뒤엔 이러한 상황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원인이 학술적 차원에서 이뤄진다. 이 균형이 가난한 삶의 이야기를 단순한 구경거리로 전락하는 걸 막아준다.


빈곤은 찰나에 파고들어 영원히 뿌리내린다. 그 개미지옥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작은 관심과 도움. 아주 작은 관심, 작은 도움이라도 빈곤이 끌고 들어가는 파멸의 추락을 늦출 수 있다. 이거 해준다고 뭐가 되겠어? 해줘도 다시 돌아가잖아!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건 그들이 약해서가 아니다. 게을러서도 아니다. 빈곤이 그만큼 파괴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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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보크
라문찬 지음 / 나무옆의자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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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라문찬의 이름은 레이먼드 챈들러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레이먼드 챈들러! 듣자마자 경애의 마음이 들었는데, 라문찬이라니 글쎄, 아이스크림을 얼음보숭이, 골키퍼를 문지기로 바꾼 것처럼 일말의 물음표가 생긴다. 물론 이는 필명이다.


<드보크>는 90년대 학생운동권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추리 소설이다. NL과 PD, 사랑과 우정, 청부살인과 정치, 정경의 유착, 불륜과 팜므파탈까지 알차게 눌러 담았다. 전반적으로 무겁지 않은 이야기가 적당한 긴장과 유머와 함께 술술 풀려나간다.


대한민국 운동권은 크게 NL과 PD로 나눌 수 있다. NL은 National Liberation People's Democracy Revolution이라는 무시무시한 단어들의 앞글자를 따 NLPDR이라 하는데, 그냥  NL로 줄여 부른다. 한국말로 하면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혁명론. 영어로 하든 한국말로 하든 못 알아듣기는 매한가지다. 이들은 자주, 민주, 통일, 이른바 '자민통'을 주요한 구호로 내세운다. PD는 그냥 People's Democarcy. 우리말로는 민중민주주의. 따로 내세우는 슬로건 같은 건 없다. 라문찬은 그냥 '평등파'라고 부른다.


가장 큰 차이는 사상에 있다. NL은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PD는 마르크스, 레닌의 철학을 기반으로 한다. 복지와 인권을 얘기하면 늘 종북좌파로 몰리는 한국이지만, NL계에는 실제 북한의 지령을 받는 빨갱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정말로 김일성과 김정일의 주체사상을 공부하고 북한의 대남 방송을 녹취하여 퍼뜨렸다. 명분은 처지가 다른 외국의 철학이 아니라, 같은 땅에서 나 우리 현실에 더 맞는 사상을 공부하자는 것이었다.


말 자체는 틀린 게 아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맥락을 살펴볼 때 주체사상은 북한의 독재를 정당화하는 프로프간다에 불과하다. 세상에 완벽한 철학이 어디 있겠는가! 비판할 것은 비판하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자는 게 뭐 그리 잘못된 말인가!라고 하면 뭐 좋아, 통 크게 그렇다고 넘어가 줄 수는 있다. 하지만 당시 NL계를 이끌어간 핵심 주동자들 중에는 주체사상과 북한을 숭배한 머저리들이 존재했던 게 사실이다.


믿을 수가 없는 얘기지만 이들 운동권의 다수는 현실 정치에 진출하여 국회의원이 된다. 일부는 우파로 전향하여 그 유명한 뉴라이트(New Right)를 만들고 일부는 보수정당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일부는 진보 정당이라 불리는 곳에 들어가거나 직접 창당을 했다. 생각할수록 가슴이 아픈 통합진보당 사태는 NL계의 조직력과 부정, 부패, 폭력성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주는 단적이 예다.


NL계는 수령을 뇌수로 한 집단주의를 추구한다. 훌륭한 혁명가는 가슴속에서 떠오르는 의문을 눌러 담고 꿋꿋이 자기 할 일을 해나가는 사람이다. 정당을 장악하기 위해 사람을 패는 건 옳은 일인가? 의심하지 마라. 선거에 이기기 위해 부정을 저지르는 건 옳은 일인가? 의심하지 마라. 그래서 이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든 엄청난 조직력을 발휘한다. PD는 토론을 중시하여 말발이 세고, 그래서 필연적으로 재수가 없어 보인다. 세를 불리는 데는 NL을 따라갈 수가 없다. PD는 늘 소수파로 남고, 진보는 NL의 손에 넘어간다.


<드보크>는 이 내용을 사랑과 우정, 청부살인과 정치, 정경의 유착, 불륜과 팜므파탈로 엮어나간다. 후루룩 책장이 넘어가는, 재미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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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환담
윤채근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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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환담>은 우리의 역사를 소설로 극화한 팩션이다. 그냥 역사 소설로 부르면 될 것을 굳이 환담이라 하냐면, 사실보다는 이야기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역사란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듯 공백이 많다. 빈 부분은 다양한 방법으로 채워야 하는데 퍼즐의 개수도 많고 모양도 제각각이다. 그것을 이야기로 채우나 사실로 채우나, 넓게 보면 그닥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소설은 총 3부로 이루어졌다. 1부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 현장이 그 무대다. '전쟁과 혁명'. 서로 다른 욕망이 부딪쳐 큰 불꽃이 일어나는 시간의 무대를 팩션이 그냥 지나칠 순 없다. 이순신에 대한 존경과 증오를 고백하는 왜장 와키자카. 수나라 병사의 시체를 쌓아 '경관'을 만든 고구려 최종 병기 우이치모테르(을지문덕). 역성혁명을 주장한 정여립과 그의 배후로 지목된 길삼봉. 역동적 사건을 쫓는만큼 1부는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파트다.


2부는 판타지, 추리, 스릴러라는 형식 안에서 공백을 메꾼다. 살인 사건의 수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정조, 채제공, 이덕무의 대립. 한양의 깡패에서 시작해 호란 당시 중군 오위장이 된 이충백. 라틴어 성경이 맺어준 정약용과 책쾌 조신선의 인연. 스믈스믈한 이야기가 상상력을 자극해 머리를 간지럽힌다.


3부는 시대를 대표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각색한다. 우리 역사에서 중요했던 여성을 떠올려보자. 신사임당? 유관순? 좀 더 시야를 넓혀보면 백제왕자와 결혼한 선화, 왕자 호동을 사랑한 낙랑의 공주, 바보를 남편으로 맞은 평강이 눈에 들어온다. 당시나 지금이나 이들은 모두 남자가 사랑한 대상 혹은 내조를 잘해 명장을 길러낸 열부라는 개념 안에서 해석되어 왔다. 3부는 그 왜곡을 시원하게 두드려 편다.


소설들은 모두 짧다. 찰나의 인생을 구경한 뒤 시공간을 건너뛰는 여행자가 된 기분이다. 질질 끌지 않는 점이 마음에 든다. 각 소설의 끝에는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허구인지를 명확히 밝혀 괜한 오해를 하지 않도록 돕는다. 술술 풀려나가는 재미있는 단편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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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뒤로하고
루만 알람 지음, 김선희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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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두개 다 보고 읽을거라면, 넷플릭스의 영화를 먼저 보고 소설을 읽을 것을 추천합니다.


온 가족이 뉴욕을 떠나 여름휴가를 간다. 근교, 시골이다. 아빠와 엄마 아들과 딸. 완벽한 구성. 완벽한 날씨. 에어비앤비로 예약한 집까지. 누가 이런 집에 사는 걸까? 어떻게 하면 이런 집을 가질 수 있을까? 집 뒤엔 숲이 펼쳐지고 근처엔 해변까지 있다. 나무와 바다. 부족하면 집에 돌아와 근사한 수영장을 이용하면 된다.


깊은 밤,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배달은 시킨 적도 없다. 아이들은 잠에 들었고 부부만 거실에 남아있다. 이보다 더 불길한 상황이 있을까? 부부는 얼어붙었다. 피식자의 직감. 무기가 될만한 걸 찾아보지만 눈에 띄지 않는다. 야구 배트? 클래식하다. 에어비앤비로 예약한 집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다. 그때 침입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미안합니다, 계세요?


그런 게 존재한다면 가장 공손한 침입자 상을 받을만한 대사다. 미안하다니, 상황은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이 시간에 남의 집을 두드리는 건 대단히 미안한 일이다. 생각해 보면 어떤 침입자가 문을 두드리고, 계시냐고 물어보겠는가? 그건 바보나 할 짓이다. 아니면 고도로 숙련된 침입자거나. 남편은 자신의 운을 전자에 걸어본다. 문이 열린다.


두 명의 흑인이 서 있다.


<세상을 뒤로하고>는 아포칼립스를 다루는 유별난 소설이다. 멸망하면 떠오르는 그 어떤 클리셰도 적지 않는다. 파괴된 도시, 약탈자가 된 생존자들, 텅 빈 가게, 식료품 하나를 두고 펼쳐지는 총격전, 어두운 하늘, 괴물이 된 짐승들. 대신 이 소설에는 사슴이 등장한다. 한두 마리? 수 만 마리다. 떼 지어 어딘가로 이동한다. 또 플라밍고. 플라밍고 떼가 집 앞 수영장에 나타나 물장구를 친다. 이 나라에 야생 플라밍고는 존재하지 않는데도.


루만 알람은 독자가 원하는 건 단 하나도 주지 않겠다는 심산으로 소설을 이끌어나간다. 이 제한된 정보가 독자와 등장인물을 하나로 엮는다. 그 누구도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모른다. 사건은 뜩, 하고 등장하고 상황은 극한의 무지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감정은 불안과 희망 사이를 널뛰기한다. 별 일 아닐 거야. 집은 튼튼하고, 도로도 멀쩡하잖아. 차도 있어. 조금만 나가면 식료품점도 있고. 지하실에는 구호 물품도 충분해. 그런데 왜 어디서도 사람이 보이지 않는 걸까?


미친듯한 굉음이 하늘을 찢는다. 어른들마저 비명을 지를 정도로 크고 무서웠다. 아기 돼지 삼 형제 중 셋째가 지었을 것 같은, 너무 튼튼해서 영원토록 가족을 지켜줄 것 같았던 집 유리에 눈에 띄지 않게 금이 간다. 갑자기 아들의 이빨이 빠진다. 새빨간 피를 머금은 아들이 손 위에 이빨을 뱉어낸다.


딸이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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