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 - 마늘에서 초콜릿까지 18가지 재료로 요리한 경제 이야기
장하준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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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현상과 그것에 대한 학문 사이의 심리적 거리가 먼 순으로 우열을 가리는 대회가 있다면 아마 경제학이 압도적으로 우승을 거둘 것이다. 경제, 경제, 경제.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단 일초도 거르지 않고 피부로 느끼는 실제가 어떻게 학문으로 변했을 때 그토록 다른 향기와 모양을 갖는 걸까? 실업과 도토리만 한 월급은 치가 떨릴 정도로 생생한데 자유무역이나 관세, 자본의 국제적 이동이라는 말은 밤하늘 저 끝의 흐릿한 별보다도 멀게 느껴진다. 그들이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에도 말이다.


장하준이 전 세계에 처음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 책은 <나쁜 사마리아인>이다. 이 책은 그의 전작 <사다리 걷어차기>와 거의 같은 얘기를 했음에도 판매부수에는 엄청난 차이를 만들었다. 둘 다 읽어본 내 입장에도 <사다리 걷어차기>보다는 <나쁜 사마리아인>이 훨씬 재미있었다. 벌써 10년도 더 된 일이라 기억이 정확 지는 않다는 점을 감안하고 말하면, 전자는 통계가 가득한 논문에 가까웠던데 비해 후자는 훨씬 이야기 같았다.


<나쁜 사마리아인>은 내 경제학 입문서였다. 이후 장하준 교수의 책은 물론 수많은 경제학 저서를 전전했고 하이에크 같이 저자와는 완전히 다른 별에 존재하는 경제학자를 만나기도 했다. 물론 당시에는 내가 상당히 경도된 시절이라 다른 사상이라면 무조건 물어뜯기 바빠 그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그 시절 장하준 교수의 책들은 내 사상의 방패이자 창이 되어주었다.


장하준 교수 책들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보다 쉽고 명료하다는 점이다. 하지만 몇 년 전 다시 읽어본 <나쁜 사마리아인>은 결코 쉬운 책이 아니었다.(내 독해 능력이 떨어졌다고 믿고 싶지는 않다. 알면 알 수록 어려워진다는 우주적 진리가 적용했음을 간절히 바랄 뿐이다.) 교수님도 그런 점을 의식했는지 글에서 점점 더 무게를 덜어내는 것 같다. <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는 그 길의 정점에 선 책이다.


이 책에는 마늘부터 초콜릿까지 총 18개의 식재료가 등장한다. 이를 이용한 실제 요리 레시피를 소개하면서 정치, 경제 이야기로 휙휙 방향을 트는데 어떤 과정은 예측 가능하기도 했지만 많은 것들은 솔직히 말해 의식의 흐름을 따라 퀀텀 점프를 하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야기 자체는 무척 재미있고 유익했다. 지금까지 장하준 교수가 세상을 향해 외쳐온 경제학 이론을 손에 닿을 정도로 가깝게, 입에 넣고 싶을 정도로 맛있게 조리한다. 경제학 에세이라고 볼 정도로 부드럽고 포근하다. 식탁에 마주 앉아 손수 요리한 음식을 먹으며, 와인 한 잔을 곁들이고, 해가 질 때까지 조곤조곤 담소를 나누는 기분.


여행을 가서 왜 책을 읽어?라고 묻는 사람도 있겠지만, 추천한다면 <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야 말로 그 취지에 딱 맞는 책이 아닐까 한다. 실제로 나는 료칸에 놀러 가 온천을 마친 뒤 연한 붉은색으로 물드는 노을을 바라보며 이 책을 읽었다. 그런 경험을 하고 나면, 산다는 게, 행복이라는 게, 정말 별 거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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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들의 침묵 (리커버 에디션)
토머스 해리스 지음, 공보경 옮김 / 나무의철학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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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에 출간된 토마스 해리스의 장편 소설 <양들의 침묵>은 그야말로 서스펜스의 마스터피스라 할 만하다. 토마스 해리스는 한니발 렉터가 등장하는 이 시리즈들 이후로 이렇다 할 작품을 내지는 못했는데, 아마도 여기서 본인이 가진 문학적 에너지를 모두 쏟아버렸기 때문인 듯하다. 그렇다고 이 작가를 감히 원 히트 원더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해리 포터>의 조앤 K. 롤링을 아무도 그렇게 부르지 않듯이, 토마스 해리스는 소시오패스 천재 살인마가 등장하는 서스펜스 장르에서, 우주의 역사가 다한다 해도 변하지 않을 주춧돌을 놓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양들의 침묵>을 읽고 있으면 요즘 나오는 그 세련된 범죄 이야기들이 모조리 빛을 잃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1988년이라니. 35년 전 이야기가 이토록 생상하게 읽힌다는 건 이 소설이 가진 생명력을 21세기 내에선 사실상 측정 불가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적어도 2100년까지는 이 시리즈가 문학계에서 차지한 자리에서 먼지 한 톨만큼도 밀리지 않을 것이라 확신한다.


토머스 해리스는 기자 출신답게 이야기를 완벽하게 구성한다. 수많은 문장들 중 단 하나만 거짓이 있어도 모든 게 무의미해지는 기사처럼 이 소설은 구성의 허점을 용납하지 않는다. FBI가 연쇄살인범의 도움을 받아 다른 살인범을 추적한다는 것 자체는 그렇게 놀라운 점이 아니다. 실제 FBI의 행동과학부는 수많은 연쇄살인범들을 인터뷰해 '악의 마음을 읽는 지도'를 개발했고 이것이 바로 오늘날 '프로파일링'이라 부르는 수사 도구의 시발점이라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훌륭한 점은 자칫 반복되고 따분해질 수 있는 한니발 렉터와의 면담을 획기적으로 전환하는 방식에 있다. 이야기는 덩치 큰 여자의 가죽을 벗겨 옷을 만드는 버펄로 빌의 새 희생자를 상원이원의 딸로 설정함으로써 자기 꼬리에 불을 붙인다.


렉터를 출세의 도구로 이용하려는 정신이상 범죄자 수감소의 소장 프레더릭 칠튼은 이 사건을 계기로 욕망의 고삐를 단단히 쥐는 기회를 마련한다. 칠튼-렉터-스털링으로 이어지는 삼각관계에서 힘을 잃고 주저앉던 한 축이 일어서자 이야기에 균열이 생기고 그 사이로 새로운 사건들이 고여든다. 그중 백미는 역시 렉터의 탈옥일 것이다.


버펄로 빌과 스털링의 마지막 대결은 손에 땀을 쥔다는 말로는 민망할 정도로 압도적인 긴장감을 선사한다. 스털링은 연쇄살인마의 집에서 그와 마주치는 순간 희생자의 생명, 범인의 검거, 자신의 안전이라는 연쇄적 도전에 직면한다. 스털링은 이 무게에 밀려 전기가 나간 지하실에 갇힌다. 야간 투시경을 끼고 먹잇감을 향해 다가오는 버펄로 빌과 창백하게 질린 여성 수사관. 담담히, 또 대범하게 묘사해 나간 이 대목은, 어떻게 해야 이야기를 팽팽하게 당길 수 있을지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두고두고 참고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소설의 결말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완벽하게 알고 있었음에도 마지막 순간까지 숨을 죽였다. 페이지를 넘기는 두 손은 힘이 들어가 떨렸고 이마에는 땀이 흘렀다. 양들이 결국 비명을 멈춘다는 비밀을 아는 건 이 이야기의 재미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양들의 침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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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을 디자인하라 (40만 부 리커버 에디션) - 없는 것인가, 못 본 것인가?
박용후 지음 / 쌤앤파커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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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을 디자인하라>는 동류의 책들이 갖고 있는 치명적 한계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선언은 있는데 구체적 방법이 없다는 것. 좋은 사례를 여럿 제시하면 그것을 귀납적으로 추론해 핵심을 뽑아내는 건 독자의 몫일까? 뭐 두어 발 양보해 그렇다 쳐도 사례 자체가 그다지 신박하지 않은 건 용서할 수 없는 부분이다. 워낙 옛날에 나온 책이라 개정판을 뽑았음에도 내용이 낡았다. 게다가 같은 내용이 반복된다. 너그럽게 보면 유명 마케터의, 자기 자랑 섞인 에세이로 읽어줄 수 있을 것이다.


무명의 내가 하는 말을 여러분이 들어줄지 모르겠지만, 이대로 끝낼 수는 없으니 몇 마디 남겨보려 한다. 그래도 창의력이 요구되는 직종에서 십수 년 일하다 보니 나에게도 나름의 방법이 생겼다. 물론 나는 석사도 박사도 아니고 이름만 대면 누구나 다 아는 서비스를 만든 적도 없다. 그러니 지금부터 하는 말은 아, 뭐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구나 정도로 받아들여주면 좋겠다.


관점을 달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관점을 물리적으로 바꿔보는 것이다. TV를 예로 들면, 보통 우리는 이 사물을 앞에서 바라보지 않는가? 이걸 옆이나 뒤 혹은 아래에서 쳐다보라는 것이다. 거짓말 같지만 진짜로 다르게 보인다. 이렇게 한번 봤다고 세상을 뒤흔들 새로운 TV 디자인이 나오는 건 아니지만 낯섦은 새로운 가치가 흐를 수 있도록 사고에 균열을 낸다. 이 균열이 겹치고 겹쳐 결국 다른 세계가 깨어나는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은 서로 다른 개념 혹은 단어를 임의로 붙여보는 것이다. 한쪽에는 생각나는 동사를 잔뜩 적어놓고 다른 쪽에는 명사를 꺼내놓은 뒤 무작위로 조합해 보자. 비는 보통 내린다와 함께하는데 이 방법을 통하면 터진다와 짝꿍이 될 수도 있다. 터지는 건 보통 뭔가에 맞았거나 부딪혔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니 이번엔 그 대상을 임의로 붙여보자. 벽, 지렁이, 구름, 라이터, 귀, 빛? 귀에 맞아 터진 빗방울. 빗방울이 빛에 부딪혀 터져 버렸다. 좋은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분위기가 달라진 것만큼 확실하다. 그냥 '내렸다'와 짝을 이뤘을 때 보다 뒷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세 번째는 사물의 핵심을 완전히 반대로 끼워보는 것이다. 소리가 나지 않는 스피커. 빛이 없는 전등. 바람이 불지 않는 선풍기. 이런 식으로 사고를 확장해 나가면 어느 순간 드리프트하듯 아이디어기 미끄러져 들어가는 게 느껴진다. 소리가 나지 않는 스피커에서 벽면 자체가 진동하는 영화관을, 빛이 없는 전등에서 간접 조명을 떠올리는 건 지나친 비약일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여기에 언급한 방법들은 치열한 연구의 결과도 공인된 방법도 아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이 바로 이 방법의 무용함을 증명하는 산증인이기도 하지 않은가! 하지만 방법이 아니라 그것을 활용하는 내 능력의 한계가 문제일 수도 있다. 양자 역학의 세계를 열어준 건 아인슈타인이었지만 그걸 정립한 건 후대의 과학자들인 것처럼. 오늘은 이 정도에서 정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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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틴스타 2023-11-15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한깨짱 2023-11-19 10:14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트러스트
에르난 디아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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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하나의 진실을 네 개의 관점에서 서술하는 독특한 구성을 취한다. 물론 독자에 따라 '독특함'이란 표현에는 동의를 거부할 수도 있다. 흔히 '라쇼몽 식'이라 불리는 이런 서술 방식이 여러 미디어에 심심치 않게 존재해 왔던 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특함이란 단어를 좀 더 유심히 돌아보면 확실히 '유일함'과는 다른 궤를 그린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트러스트>는 유일하지는 않지만 독특한 소설이다.


총 4부로 구성된 이 이야기의 1부는 주식으로 억만장자가 된 앤드류 베벨의 이면을 폭로하는 소설 속 소설이다. <채권>이라 불리는 이 소설에서 앤드류는 대공황기에 공매도를 때려 주식 시장을 궤멸시키고 본인은 떼 돈을 번 인물로 그려진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도덕적으로 지탄했지만 앤드류는 오히려 거품 낀 주식 시장을 자신이 바로 잡아줬다고 생각한다. 1부에서 이 논란만큼 중요한 건 헬렌이라는 가명으로 등장하는 앤드류의 아내 밀드레드 베벨이다. <채권> 속에서 그녀는 남편만큼 재능 있었지만 정신 병원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는 여성으로 묘사된다.


2부는 앤드류 베벨이 자서전을 쓰기 위해 남겨놓은 노트다. 이 이야기에서 그는 자신을 신격화한다. 고귀한 피와 재산을 물려받은 그는 그 부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증식시킨 주식 천재이자 자상한 남편이다. 반면 아내 밀드레드가 가진 재능은 철저히 지워진다. 그녀는 음악과 소설, 꽃꽂이를 좋아하는 허약하고 순종적인 여성으로 그려진다.


3부는 앤드류 베벨의 자서전을 완성하기 위해 고용된 대필작가 아이다 파르텐자의 회고다. 그녀는 앤드류 베벨의 지시에 따라 그의 인생 곳곳을 땜질하고 이어 붙여 매끄러운 거짓을 만들어낸다. 앤드류는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해럴드 배너의 소설 <채권>에 극심한 분노를 느꼈다. 그는 <채권>이 진실을 왜곡했다고 믿었기에 온갖 수단을 동원해 해럴드 배너의 인생을 망가뜨린다. 파르텐자는 앤드류가 저지른 '현실을 구부리는 일'에 자신이 동참했다는 자책을 느낀다. 시간이 흘러 중견 작가가 된 그녀는 이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추적을 나선다.


4부는 아이다 파르텐자가 발견한 밀드레드 베벨의 일기다. 이 일기에 따르면 앤드류의 성공적인 주식투자는 모두 밀드레드의 결정이었다. 그녀는 주식 시장의 허점을 발견하여 주가 조작의 위험성을 경고했는데, 오히려 앤드류 본인이 그 점을 악용했다는 걸 알게 되자 둘 사이는 소원해진다. 이 일기에서 앤드류는 재능 없는 멍청이일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파산한 인물임이 드러난다.


<트러스트>의 1, 2부는 솔직히 지루하다. 3부에 이르러 소설은 진실을 찾아 떠나는 탐정의 흥분을 불러일으키고 4부에서는 마침내 진실이 거짓을 몰아낸 '것 같은' 승리를 제공한다. 독자는 <트러스트>의 진실이 4부에 있다고 믿기 쉽다. 그러나 이 소설 속의 등장인물은 모두 사실을 구부려 현실을 창조하려는 사람들로 볼 수도 있다. 밀드레드 베벨이 맞다고 믿는 이유는 그것이 일기이기 때문인가? 이 이야기가 맨 마지막에 등장했기 때문인가? <트러스트>는 이 일기가 어떤 의도로 언제, 어떻게 적혔는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밀드레드에 대한 진실은 오히려 <채권>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정신병을 앓았다는 게 사실이라면 이 일기가 그녀의 환상이 아니라는 확신을 어디에서 얻을 수 있을까? 결국 <트러스트> 또한 우리 세상에 속한 현실 작가 에르난 디아스의 텍스트라는 걸 이해해야 한다. 그는 <트러스트> 속 인물들처럼 이 이야기를 통해 뭔가를 '구부리려'한다. 그것이 왜곡된 현실을 바로 잡는 것인지, 아니면 제자리에 선 진실을 가리려는 건지, 이를 밝히는 건 모두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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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파니르 2024-01-10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재미있게 쓰셔서 1페이지부터 주루룩 읽다가 갑자기 나름 반전을 알게 되었네요... 스포일러 주의가 필요한 리뷰 같습니다!

한깨짱 2024-01-21 09:01   좋아요 0 | URL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바젤탑 - 국제결제은행(BIS)의 역사, 금융으로 쌓은 바벨탑
아담 레보어 지음, 임수강 옮김 / 더늠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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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결제은행 BIS의 역할을 이해하려면 우선 지급결제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거의 현금 없는 세상을 살고 있다. 실물 카드조차 구닥다리가 되어가는 실정. 사실상 돈은 디지털화된 신호를 따라 전자 장부에 적힐 뿐 물리적인 이동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은행 앱에 찍힌 내 월급의 지폐 더미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매달 우리 회사의 금고에서 은행 금고로 현금이 이동되는 걸까? 어떤 존재의 의미를 확실하게 드러내려면 그것의 부재를 가정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지급결제 시스템이 없다면 바로 앞에서 언급한 현금의 이동이 매 순간 일어나야 한다. 카카오뱅크 앱에서 신한은행으로 5만 원을 보냈다? 그 순간 카뱅의 직원은 현금을 들고 신한은행으로 달려가야 한다. 이 돈을 받은 신한은행이 금고에 5만 원을 넣고 당신의 계좌에 적어 넣으면 비로소 이체 완료다.


이 방법이 얼마나 위험하고 비효율적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과거 은행들은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다자 혹은 양자 간 지급결제를 이용했는데, 이 말은 상호 간의 이체 거래는 일단 장부에만 적어놓고 실제 현금의 이동은 정기적으로 날을 맞춰 이동시키자는 것이다. 그러나 퍽 효율적으로 보이는 이 방식도 참가자가 늘어나면 극도로 복잡해진다. 바로 이 지점에서 청산과 결제를 담당하는 공동기관이 탄생한다. 오늘날 우리는 이 기관의 이름을 중앙은행이라 부른다.


모든 은행은 중앙은행(한국은행)에 당좌 계좌를 연 뒤 일정 금액을 예치한다. 대한민국에서는 하루에만 70조 원이 넘는 돈이 손을 바꾸는데 일방적으로 주거나 받기만 하는 경우는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주고받은 돈의 총합이 0이라면 현금은 이동할 필요가 없고 차액이 있다면 그만큼만 중앙은행의 금고에서 또 다른 금고로 이동하면 된다. BIS는 바로 이 기능을 국가 간 거래에서 제공하는 기관이다.


<바젤탑>은 BIS의 역사를 다루는 책이다. 내가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국가 간 지급결제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뤄지며, 그 핵심에서 발견할 기회는 무엇인지, 리플 같은 암호화폐가 도대체 무엇을 하려는지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바젤탑>은 정확히 다른 방향을 지향한다. 이 책은 BIS의 기능보다 정치적 역할에 집중한다. 독일의 1차 세계대전 전쟁 배상금을 수취하여 다른 나라에 지급하기 위해 탄생한 이 은행은 이후 나치의 전쟁 경제를 운영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다. 사람들은 각국의 중앙은행을 사악한 정치적 입김으로부터 보호해야 할 신성한 기관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중앙은행은 권력자의 의도나 이해에 따라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세계 정부의 중앙은행이라 볼 수 있는 BIS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선술 했듯 BIS의 역사는 그 어떤 은행보다 정치적 똥투성이로 가득하다.


사실 중립이란 말만큼 허구적인 게 없다. 특정 목적을 달성하려는 집단의 노력을 '정치'라 정의한다면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인간의 행위는 정치적이다. 은행이 정치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정치적 통제와 감시를 받는 것 또한 합당한 게 아닐까? 더욱이 단 한 번의 결정으로 수많은 지구인들이 직장을 잃거나 삶이 파괴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기관이라면 말이다.


취지에는 상당히 공감하는 바이나 이러한 얘기를 반복해서 지루하게 늘어놓는 게 <바젤탑>의 한계다. 그들의 선택과 존재가 실물 경제에 구체적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그들을 어떻게 견제해야 하는지는 제시하지 않는다. BIS와 나치의 관계를 부각하여 사람들에게 이 비밀스러운 슈퍼파워의 존재를 드러내려는 목적은 알겠으나, 그 내용을 400페이지나 반복하면 효과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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