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마인드헌터
존 더글러스 지음, 이종인 옮김 / 비채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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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들어 나이가 드는 걸 실감할 때가 많다. 언제 가장 그러냐면, 뭘 봐도 시큰둥할 때다. 한때 내 감각은 지나칠 정도로 예민했다. 단어, 컷, 멜로디, 디자인. 모든 소설, 영화, 음악, 제품 속에 깃든 디테일 하나하나. 그 모든 것들에 나는 열광했고 거기에 빠져 시간을 잊고 살았다. 그런데 요즘은 뭘봐도 시큰둥. 좋은 걸 너무 많이 봤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렇게 나이가 드는 걸까? 그러나, 회색의 마음에도 가끔 불이 들어올 때가 있다. <하우스 오브 카드>의 케빈 스페이시를, <나르코스>의 오프닝 시퀀스를, <오자크>의 마지막 에피소드를 볼때, 그리고 <마인드 헌터>를 정주행 했을 때 말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마인드 헌터>는 이 책 <마인드 헌터>를 원작으로 만든 드라마다. 책을 완독한 결과 상당히 많은 각색이 이뤄졌음을, 그리고 데이비드 핀처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미친 천재라는 걸 알게됐지만(넷플릭스의 <마인드 헌터>는 <하오카>의 데이비드 핀처가 만들었다) 책과 드라마의 내용을 맞춰가며 당시의 전율을 떠올리는 건 꽤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드라마든 책이든 둘 다 모르는 사람을 위해 말해주자면, <마인드 헌터>는 프로파일러에 대한 이야기다. 프로파일링이라는 개념이 아직 존재하지 않던 시절, 그러니까 범행 수법을 통해 범인을 추정한다는 생각 자체가 공상 과학, 아니 그보다 못한 개소리로 취급받던 시절에 프로파일링의 세계를 직접 만든 FBI 요원의 일대기다. 형식은 에세지만 개인사보다는 FBI에서의 업무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온갖 연쇄 살인범, 성도착증 환자, 아동 성애범, 분노와 망상에 빠져 사는 싸이코패스들. 그 흉악범들을 정교한 프로파일링을 통해 하나하나 검거해 나가는 과정은 소설과 영화 속에서 이런 류의 주인공들이 왜 관객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지 이해하는 실마리가 된다.


뛰어난 프로파일러는 BBC 드라마 <셜록>의 홈즈가 발휘하는 상상 초월의 추리 능력을 현실 세계에서 발휘한다. 홈즈는, 솔직히 실패할 일이 없고, 한다 해도 결국 작가의 도움으로 다시 일어서지만 이 현실 세계의 홈즈들은 실패에 따른 모욕과 경멸, 수사 혼선에 따른 책임, 나아가 인명피해에 대한 죄책감, 더하여 흉악범들의 사악한 정신에 무분별하게 노출되는 심리적 부담까지 안고 살아야 한다. 니체가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들여다보면, 괴물도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본다고. 웬만한 사람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인간과 세상에 대한 신뢰 상실, 점점 둔감해지는 연민과 공감 능력, 지나친 긴장에 따른 정신 붕괴로 일상 생활도 못할 것 같은데 저자는 이런 일을 25년이나 해왔다. 그 정신력과 사명, 책임감에 존경을 표하는 바이다.


혹시 이 책을 통해 프로파일링 기법을 본격적으로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지는 못할 것이다. <마인드 헌터>는 사건 개요와 수사 프로파일링 과정을 체계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이 책은 엄밀히 말해 에세이고, 따라서 에세이 이상의 형식을 갖추지는 않는다. 공부를 하려면 여기서 언급된 모든 범죄자들을 쭉 옮겨 적고 그 밑에 살해 연도, 피해자, 장소, 방법, 프로파일링 결과 및 그 근거를 따로 정리해야 한다. 담당 편집자가 조금만 예민한 사람이었다면 별도 부록으로 이런 내용을 정리해서 담았을 테지만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의 인기에 영합하려는 속셈을 노골적으로 드러낼 뿐, 별다른 노력을 하지는 않는다. 내가 알기론 이 책이 개정판이라는데, 도대체 무엇을 개정했다는 말인가? 넷플릭스 <마인드 헌터>의 '이야기'에 매료된 사람에게도 이 책은 필요 없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 드라마는 상당히 극화되어 있다. 그 침묵의 긴장과 조용한 서스펜스를 기대해선 안된다. 이 책은 이야기의 긴장감을 끌어올리는데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일종의 강의록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나는 앞으로 시간이 날때마다 앞서 얘기한 정리 작업을 꼼꼼히 해나갈 생각이다. 이 쪽 일에 관심이 있어서는 아니다. 셜록 홈즈가 될 생각은 더더욱 없다. 사실 프로파일링은 소설 속 인물의 행동과 대사를 창조하기 위한 훌륭한 솔루션이다. 소설은 인물의 속마음을 행동과 말을 통해 드러내야 한다. 프로파일링은 나의 캐릭터들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해야하는지 알려주는 중요한 참고서이다. 범죄 소설 작가들이 FBI 프로파일링 교육을 왜 그렇게 기를 쓰고 들으려 하는지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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