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 - 졸업을 앞둔 너에게
커트 보니것 지음, 김용욱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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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제5 도살장>으로 시작했다. 트랄파마도어 행성에 애완지구인으로 잡혀간 적이 있고 그들로부터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인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울뻔 했다. 2차 세계대전에는 포병부대에 관측병으로 참전했다. 단 한 명의 독일인도 죽이지 못했고, 그 탓에 독일인들의 포로가 되었다. 드레스덴. 소이탄이 유서 깊은 건물과 문화를 녹이는 동안 나는 제5 도살장의 지하에 쥐새끼처럼 숨어있었다. 떨림이 모두 멈추고 난 뒤, 독일인들은 완전히 항복을 선언했다. 나는 미국으로 돌아왔다. 가진 건 하나도 없었지만 꽤 잘 사는 여자와 결혼했다. 장인의 후원으로 검안사가 되었다. 사업은 잘됐다. 아마 아이도 낳았을 것이다. 그렇게 몇 년간 행복한 삶을 살았다. 트랄파마도어에 애완 지구인으로 잡혀가기 전까지.


짹짹?


<제5 도살장>은 대충 이런 내용이다. 이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우리에겐 두 개의 갈림길이 나타난다. 하나는 제5 도살장을 떠나 영영 커트 보네거트와 작별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좀 기괴하다. 트랄파마도어인에게 납치되어 그들의 애완지구인이 되는 것이다. 나는 후자를 택했다. 트랄파마도어인들은 내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인지하는 법을 배우기 직전 나를 지구로 돌려보냈다. 이유를 물어보니 비자가 만료됐다고 했다.


무슨 비자?


커트 보네거트가 죽었다는 말이었다. 친절한 외계인들은 트랄파마도어와 지구의 가교 역할을 하던 그 독일계 미국인이 영영 돌아오지 못할 무의 세계로 떠난 탓에 아쉽지만 두 별의 교류도 그것으로 끝이라고 했다. 그들은 떠나는 나에게 커트 보네거트의 전집을 선물했다. 나는 이걸 전부 내게 주고나면 당신들은 어떻게 하냐고 물었다. 당신들은 이 남자를 잊을 생각인가요? 당신들과 이 남자 사이의 우정은 고작 그 정도였나요? 그들은 커다란 네개의 눈을 깜빡이며 서로를 바라봤다. 아마도 내 말을 이해하느라 한참이나 고민하는 것 같았다. 이윽고 그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보고 있으므로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우리가 그를 잊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안심하고 지구로 돌아가세요.


그렇게 가는거지.


나는 커트 보네거트가 보고 싶을 때면 그의 마지막 소설 <타임퀘이크>를 꺼내 아무 페이지나 읽기 시작한다.


딩동댕! 딩동댕!


그리움이 늘 봄볕을 맞은 눈처럼 녹아내리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선 견딜 방법이 없다. 그리움은 뼈에 사무친다.


내가 <그래, 이 맛에 사는거지>를 산 이유는 트랄파마도어인들의 선물 보따리에 이 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 별을 떠나올 땐 아직 이 책이 출간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두 아는 그들은 이 책의 존재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책을 다 읽고 나서야 그들이 왜 이 책을 빼먹었는지 알 것 같았다. 필요한 것이었다면, 그들은 직접 써서라도 이 책을 나에게 줬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내게 이 책이 필요없다고 생각한 게 분명하다. 나는 그들의 의견에 동의한다. 트랄파마도어인들은 지구인보다 훨씬 더 많이, 그 남자를 알고 있다.


이 책은 커트 보네거트라면 무조건 구미가 반응하는 골수팬을 잡아 먹기 위한 파리 지옥이다. 당신이 나와 같은 부류의 인간이라면 어차피 아무런 경고도 무의미할테니, 나는 이제 소화액 속에 누워 누가 또 여기로 굴러 떨어지는지 구경이나 해야겠다. 여러분, 꼭 사서 읽으세요.


짹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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