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 하워드 진의 자전적 역사 에세이, 개정판
하워드 진 지음, 유강은 옮김 / 이후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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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이 말은 지난 오랜 시간 나를 괴롭혀왔던 위대한 중립주의자들에게 그들의 행동이 진정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설명할 실마리가 되었다. 중립주의자들은 차분하고 지적이며 여유롭다. 고귀한 그들은 타인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는 문명인의 불문율을 지키려 짐짓 나의 말을 들어주는척 하지만 사실은 벌겋게 달아오른 두 볼, 주먹을 꼭 쥔 두 손, 흥분으로 갈라진 목소리를 유치하고, 감정적이며, 불확실하고, 편향적이라 생각한다. 그들은 그 모든 걸 온화한 미소를 곁들인 냉담한 눈빛으로 말한다.


달리는 기차 위에 왜 중립은 없는지 생각해 보자. 여기 우측으로 질주하는 기차가 있다. 꼬리칸에 탄 사람들은 이를 좌측으로 달리게 하거나 적어도 멈춰 세워 어디로 가야할지 고민해보려한다. 그들은 이 의견을 전하기 위해 기관실로 향한다. 그런데 기관실에서 보내온 직원은 그들에게 이 기차는 우측으로 가고 있는게 아니며 더 이상 소란을 피우면 기차에서 내쫓겠다고 위협한다. 꼬리칸 사람들이 창문을 가린 커튼을 걷고 밖을 내다본다. 직원의 말이 뻔뻔한 거짓말이라는 걸 알아챈다. 이제 꼬리칸 사람들의 행진에는 피의 대가가 따른다. 바닥에는 축 늘어진 부상자들이 즐비하고 죽음과 추방의 위협은 어린이와 어른을 구분하지 않는다. 이때 위대한 중립주의자들이 그들 앞에 나타난다. 당신들은 왜 이 기차가 우측으로 달린다고 생각하는가? 기관사는 분명 그렇지 않다고 말하지 않는가? 설령 당신들의 말이 맞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이렇게 많은 피를 흘리는 게 정당한가? 당신들은 그렇다고 하고 기관사는 아니라고 하니 나는 판단할 수 없다. 나는 중립을 지키겠다.


기관사 여러분, 우리가 당신들의 말에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꼬리칸 사람들이 맞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건 우리는 이 모든 소동과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당신들이 무슨 짓을 벌이든 우리는 객실에 앉아 조용히 독서를 하겠습니다.


말하고 그들은 자신의 의자에 얌전히 앉는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중립의 허구성이 드러난다.


달리는 기차 위에서 중립을 선언한다는 건 기차의 질주 방향에 몸을 싣겠다는 의미다. 무거운 엉덩이를 딱 붙이고 앉아 아무리 꼼짝 안한다 해도 기차의 움직임을 멈출 수 있는 건 아니다. 진정한 중립이란 기차에서 내리는 것, 즉 이 사회에서 떠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중립주의자들은 기차 안에서 침묵을 지키는 걸, 그렇게 기차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걸 지켜보는 게 중립이라고 생각한다.


역사는 달리는 기차와 같다. 이 비유에서 중요한 건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역사는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그 방향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은 역사에 고삐를 채워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마음에 드는 사람들은 박차를 가해 속도를 높인다따라서 중립을 선언한다는 것, 아무런 방향도 선택하지 않는다는 건 '현재의 방향을 받아들이겠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그들은 단호히 중립을 선언하지만 결코 멈추지 않는 역사는 그들을 '특정 방향'으로 실어간다. 이것이 바로 달리는 기차 위엔 중립이 없는 이유다.


하워드 진은 1922년 뉴욕의 빈민가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유대계 이민자의 2세였던 그는 조선소에서 하급 노동자로 일하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다. 이후 제대군인 원호법에 따라 뉴욕 대학교를 졸업하고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가난한 이민자의 2세가 미국 최고 교육기관의 혜택을 입었다면 대개는 그 혜택을 이용해 상류 사회에 편입할 꿈을 꾸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는 인종차별이 극심한 미국 남부, 그것도 흑인 대학의 역사학 교수가 되어 정든 뉴욕을 떠난다. 물론 그에게 대단한 인권 의식이 있었던 건 아니다. 빈민가 출신답게 그는 유색인종과 친밀했고, 그래서 자기가 잘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며, 결정적으로 그에게 교수직을 제안한 대학이 거기 밖에 없었으므로 그것을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이후 그의 인생은 극심한 진보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가게 된다.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는 하워드 진이 차별과 폭력, 전쟁과 비인륜이라는 가시밭 길을 맨발로 걸으며 기록한 에세이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 미국을 휩쓴 각종 인권, 반전 운동에 이름을 올리며 만인의 자유와 평등, 평화를 위해 싸웠다. 그 역사적 기록들이 사실 우리와는 그닥 관련이 없어 이 담담한 회고록은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이 시사하는 바를 적어도 하나만큼은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으며 최근에 우리가 광장에서 이루어 낸 일을 돌이켜봤을 때 그 이해는 확신으로 이어지기에 충분했다.


세상을 바꾸려는 의지가 있고, 그 의지를 소리내어 말하고, 그 의지를 행동으로 옮기면, 반드시 거기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진보(이 말이 불편하다면 변화)의 가시밭길은 나 홀로 걷는 외길이 아니다. 흐름 속에서 보면 우리는 때때로 웅덩이에 갇히고 바위에 부딪혀 길목에서 맴돌지만 역사적 관점에선 다양한 지류가 큰 강을 이루고 큰 강들이 비로소 거대한 바다에서 합쳐지는 형국으로 보여진다.


"투쟁의 과정에서 낡은 질서의 힘은 부식되기 시작하고 사람들의 생각은 변화한다. 저항하는 사람들은 일시적으로 패배하지만 분쇄되지는 않으며, 결국엔 다시 일어나 반격을 재개한다.


역사의 모든 일은, 일단 벌어지고 나면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됐을거라 믿는 필연성의 유혹에 직면한다. 결과를 보고난 뒤에는 그것과는 다른 모습을 상상하긴 쉽지 않다. 그러나 나는 역사의 불확실성을, 뜻밖의 일이 벌어질 가능성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바꾸기 위해 그 무엇보다도 우리의 행동이 중요함을 확신한다." (본문 중)


하워드 진은 1922년에 태어나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87년이다. 그는 자신의 두 눈으로 변화를 목격하고 자신의 두 손으로 그 변화를 이끌어냈다. 그가 증명한바에 따르면 역사는 기필코 나아간다. 어디로? 우리가 향하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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