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90일만 더 살아볼까
닉 혼비 지음, 이나경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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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 혼비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은 재미다. 둘째는 캐릭터다. 훌륭한 캐릭터들이 위트있는 대사로 황당한 이야기를 만든다. 이것이 <딱 90일만 더 살아볼까>를 설명하는 가장 적합한 문장이다.


<하이피델리티>만큼 현실감이 있지는 않지만 그건 이 소설의 등장인물과 상황이 <하이피델리티>보다 더 황당하기 때문이다. 주요 등장인물은 총 네명으로 다음과 같다.


마틴: 전직 유명 토크쇼 주인공. 10대 소녀와의 섹스 스캔들로 사회에서 매장. 돈과 명예를 모두 잃고 나락으로 추락한 남자.


제이제이: 슈퍼 빅 밴드를 꿈꾸며 영국으로 넘어온 미국 락커. 한때 R.E.M의 매니저가 연락을 해 올 정도로 잘나갈 뻔 했지만(Almost Famous!) 팀은 해체, 피자 배달로 연명하는 남자.


모린: 중증장애 아들을 둔 50대 여자. 젊은 시절 딱 한번, 낯선 남자와 섹스 후 가진 아들이 바로 눈물의 씨앗이 된다. 단 한번의 실수로 평생 족쇄에 묶여 사는 불쌍한 여인.


제스: 언니가 행방불명된 후 소외감을 느끼고 방황하는 틴에이저. 타인에게 상처받기 전에 먼저 상처를 주는 전략으로 18년을 살아왔다. 그렇게 열심히 관계를 파괴하다 더이상 파괴할 게 없어지자 스스로를 파멸시키기로 결심한다.


보시다시피 이렇게 이상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렇게 클라스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한 권의 소설 속에서 이야기를 끌어갈 수 있을까? 그건 이 네명이 희망과 열의와 사랑과 우정과 온갖 종류의 다짐, 온갖 종류의 의지가 뒤섞여 광란과 흥분의 시간을 만들어내는 신년 이브, 우연히 토퍼스 하우스 옥상에서 마주치기 때문이다. 처음엔 마틴 그리고 모린, 제스, 제이제이의 순서로. 그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듯 찬바람 아파트 옥상에서 서로를 마주한다. 목표는 같다. 옥상 밑으로 뛰어내려 자신의 대갈통을 더러운 보도 위에 짓이기는것!


자살을 결심한 네 명이 우연히 한 장소에서 만나 서로의 사연을 공유하고 어느새 모락모락 피어오른 애정의 열기 속에 그들을 다시 한번 생에의 의지를 불태우고... 같은 뻔한 이야기가 예상되지만 그건 닉 혼비를 너무 얕잡아 보는 것이다. 참신한 문장을 쓰지 않으면 자동으로 전기 충격이 가해지는 고문 의자에 앉아 집필을 하는 듯 닉 혼비는 혼신의 힘을 다한 블랙코미디를 발작적으로 전개한다. 때로는 그 강렬한 독설에 마음이 마비되기도 하지만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후려갈기는 그의 문장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갖고 싶은 탐나는 보물이다.


닉 혼비가 자살을 너무 희화화하는 건 아니냐고 느낄 수도 있지만 얘기를 들어보라. 사실 중증장애 아들을 둔 모린의 실제 모델이 닉 혼비 본인이다. 그는 첫 결혼에서 낳은 첫 아들이 생후 18개월 중증자폐아라는 진단을 받는다. 이쯤에서 우리는 절망을 이기는 방법에 대한 어렴풋한 실마리를 쥐게 된다. 하나는 고백이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거란 걱정은 버리고 마음 속에 응어리진 고통을 입 밖으로 뱉어내는 것이다. 그것이 설령 지나치게 희화화된다 하더라도 그건 조롱이나 좌절의 의미가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한다. 그것은 일종의 치유다. 유머는 사실 가장 비극적인 상황에서 잉태되는 눈물의 열매인 것이다. 고난의 체에 거르고 걸러진 슬픔이 순도 높은 정수가 되어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세우고 마침내 열어내는 꽃. 그것마저 시련의 바람에 떨어지고 나면 그 밑에서 잔뜩 웅크리고 있는 황홀할정도로 새까만 빛을 내뿜는 열매 하나를 얻게된다. 그게 바로 유머인 것이다. 


고난을 당해본 사람들만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안다. 하지만 내 바람은 여러분들이 평생 이 말의 뜻을 모르고 사는 것이다. 그럴수만 있다면, 그럴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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