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대로
켄 브루언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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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가 줄어드는 게 아까운 책이 있다. <런던 대로>는 우리 나라에 소개된 켄 브루언의 작품 두 개 중 하나다. <밤의 파수꾼>은 이미 세 번이나 읽었으니 이 책이 마지막이다. 마지막 잎새를 세는 심정으로, 한 자 한 자 마음을 졸이며 읽었다.


<런던 대로>는 헐리웃 고전 <선셋 대로>의 리메이크 소설이다. 영화를 소설로 옮겼다. 골조는 그대로 유지했지만 영화의 주인공 조 길리스(시나리오 작가)를 범죄자 미첼로 대치함으로써 켄 브루언 특유의 범죄 소설이 탄생했다.


원작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재치 있는 입담이 이 소설의 특징이다. 노숙자를 집단 폭행해 죽이고 그 범인을 찾아 무릎에 총알을 박아 넣는 등 끔찍한 중범죄가 커피를 마시듯 태언하게 벌어지지만 아이러니와 비아냥을 뒤섞어 놓은 유머가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 지구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소설가들의 능력 중에 하나만 골라가질 수 있다면 주저 않고 이 능력을 갖고 싶다.


미첼은 이제 막 3년 복역을 마치고 복귀한 범죄자다. 폭력 전과였다. 나오자마자 친구와 함께 고리 대금업을 시작한다. 마음에 드는 일은 아니었지만 친구가 그 일로 차지한 고급 아파트와 옷들을 제공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동행한다. 그런데 복귀 환영 파티에서 만난 여기자 한 명이 그에게 새로운 직업을 하나 소개한다. 이모의 집에서 잡역부를 해달라는 것. 미첼은 흔쾌히 받아들이며 자신을 선택한 이유를 묻는다. 여기자가 말한다. 당신이 썩 잘생겼기 때문에. 퇴폐적인 에로티시즘에 범죄의 냄새가 섞여 들어온다.


여기자의 이모는 한때 잘 나갔던 연극 배우지만 지금은 퇴물이 된 노인이다. 그녀는 언젠가 연극계가 자신을 다시 불러줄 거라는 헛된 희망에 갇혀 산다. 엉터리 각본을 쓰고 자기만큼 늙은 대저택의 연습용 무대에 올라 대사를 읊는다. 이 그로테스크한 여자에게 미첼의 육체가 반응한다. 파멸의 시작.


저택엔 노망난 여배우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이상한 존재가 같이 머문다. 이 집의 집사 조던이다. 여배우의 전 남편이자 그녀의 매니저. 온갖 잡다한 일을 도맡아 처리하며 매일 아침 그녀에게 배달할 팬레터까지 손수 작성한다. 매우 단련된 육체에 지적이기까지 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완벽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한다. 그는 ex wife와 평생을 함께 살며 그녀의 수발을 들고 그녀에게 섹스 파트너를 제공하는 일까지 묵묵히 해치운다.


그로테스크한 저택에서 벌이는 퇴폐적 에로티시즘의 묘사로 끝날 수도 있었을 소설을 검은 범죄의 웅덩이로 이끄는 건 범죄 조직의 두목 간트다. 간트는 미첼과 함께 고리 대금업을 하는 친구의 두목이었다. 미첼은 단박에 간트의 눈에 들었다. 하지만 그 보다 더 좋아한 건 대저택에 고이 모셔둔 롤스로이스 실버 고스트. 간트는 그 사실을 털어놓고 미첼은 장난감 가게에서 실버 고스트 모형을 산 뒤 예쁘게 포장하여 간트에게 보낸다. 전쟁의 시작 된다.


대저택에선 정체 불명의 집사 조던과 미첼이 한 팀을 이루고 다른 쪽에선 간트와 그가 동유럽에서 고용한 암살자가 한 편이 된다. 전쟁은 미첼의 친구가 대저택의 나무에 매달려 죽는 것으로 시작한다. 섹스대신 카시트를 축축히 적시는 핏물이 소설을 채워간다. 그 피가 다 마르기도 전에 다른 피가 흘러 나온다. 모든 범죄 소설에서 피가 멈추는 시점은 언제나 똑같다. 그것은 더 이상 흘릴 피가 없을 때이다.


켄 브루언의 주인공들은 저학력에 알콜 중독자 혹은 범죄자지만 하나 같이 책을 끼고 산다. 그들은 범죄 소설에 푹 빠져 살다 어느 순간 그 소설과 크게 다를 거 없는 삶을 살아간다. 고독과 우울, 심각한 정신적 결함 그리고 독서의 결합.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소설 전체에 형언할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번역된 대사가 너무 올드하고 짧은 문장이 독특한 리듬을 만들어내는 문체를 잘 살려내지 못한 번역이었음에도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책이었다. 2017년에 작은 소망이 하나 있다면 이 작가의 책이 모두 한국에 소개되는 것이다. 흔한 말로, 인생 작가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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