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의 생각은 어떻게 상식이 되었나
로베르트 미지크 지음, 오공훈 옮김 / 그러나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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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의 기원은 178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랑스 대혁명, 왕의 백성이던 신민이 주체적 시민으로 거듭난 사건. 그러나 절대왕정의 붕괴와 함께 현실의 권력이 고스란히 시민에게 이관된 것은 아니었다. 귀족들은 여전히 땅과 성과 돈을 갖고 있었다. 국민공회는 자연스럽게 두 개의 파벌로 나뉘었다. 귀족의 이해를 대변하는 왕당파와 부르주아의 이해를 대변하는 공화파(이 역사의 아이러니를 보라. 오늘날 보수의 핵심 집단인 부르주아가 당시엔 진보의 최전선에 서 있었다.)가 그것이다. 이 때 공화파들은 좌측에 섰고 왕당파는 우측에 섰다. 이것이 바로 좌파와 우파의 탄생이다.


또 하나의 설은 이렇다. 1792년 국민공회는 드디어 루이 16세의 목을 단두대의 칼날로 싹둑 잘라낸 뒤 왕당파를 축출한다. 그러나 공회는 또 다시 두 파로 갈라진다. 좀 더 급진적이며 대중의 이해를 대변하는 자코뱅파와 보수적이며 부르주아를 대표하는 지롱드파가 그것이다. 이 때 자코뱅파는 좌측에, 지롱드파는 우측에 섰다.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진보-보수의 대립이 여기서부터 기원한 것이다.


18세기에 시작한 좌-우의 대립은 21세기가 지나도록 현재진행형이다. 물론 세상이 언제나 제자리 걸음만을 해왔던 것은 아니다. 일부 비관론자들은 상위 계층에 집중된 부와 이를 조장하는 정부 정책, 그 정책을 지지하는 보수당의 장기 집권을 예로 들며 역사의 진보를 애써 외면하려 하지만 딱 100년 전으로만 돌아가도 이 세상이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 알 수 있다. 그 때는 차마 웃지 못할 모순이 많이 있었다. 예컨대 시민의 참정권과 자유를 맹렬히 부르짖는 열혈 진보주의자가 흑인과 여성의 참정권에 대해선 몸소리를 칠 정도로 거부했던 것 말이다. 당시의 진보주의자들은 흑인과 여성을 백인 남성과 동일한 존재로 취급하지 않았다. 시민권은 인간에게만 주어질 수 있으므로 인간이 아닌 그들에겐 숭고한 권리를 부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이러한 생각은 극우파의 극우파의 극우파의 할아버지가 온대도 쉽게 가질 수 없는 생각이다(가끔은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기도 하지만).


좌파의 주장은 시간이 흐를수록 본래의 영역이었던 정치를 떠나 경제, 사회, 문화에로까지 스며들었다. 그들의 생각은 세상 온갖 곳에 고인 부패와 불평등과 차별, 소외와 폭력에 맞서 싸운다. 오늘날 좌파라 불리는 사람들은 정치, 경제 영역에선 신자유주의와 전쟁을 벌이고 사회, 문화계에선 여성과 약자를 억압하는 보이지 않는 권력과 결투를 벌이며 국제 사회에선 인종차별, 전쟁과의 끝장전을 벌이고 있다. 이렇게 전쟁을 벌이는 일부 전사들 사이에선 전투를 어렵게 하는 가장 큰 방해물이 대중의 무지와 그에 따른 무관심이라는 말도 나온다. 하지만 이는 눈 앞의 적만을 너무 가까이 해온 탓에 자기 등 뒤에 서 있는 지지자들의 마음을 충분히 관찰하지 못한 탓이다. 대중이 이러한 일들에 무관심한 이유는 무지해서가 아니라 수백 년간의 투쟁으로 쟁취한 오늘의 사회가 이제는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 됐기 때문이다. 그들은 묻는다. "아직도 그런 일이 있어요?", "요즘 세상에 누가 그런 짓을?" 상식이란 세상 사람 모두가 의심의 여지 없이 받아들이는 공통 의식이다. 대중은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 생각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늘 멍한 표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좌파의 생각은 어떻게 상식이 되는가>는, 이처럼 시민 의식의 함양 과정을 역사적, 철학적으로 밝히는 책처럼 생각되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다(사실 이 책의 원제는 <나는 좌파인가>이다). 서론에서만 아주 잠깐 언급할 뿐이다. 이 책은 기승전결을 갖춘 하나의 논문이라기 보다는 한 칼럼니스트의 철학 에세이에 가깝다. 마르크스에서 그람시, 사르트르를 거쳐 푸코까지 넓은 의미에서 좌파로 구분할 수 있는(반항아들)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부분적인 철학 상식을 깨우치긴 좋으나 사고의 지평이 파괴되는 경험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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