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 개정증보판 한 권으로 읽는 실록 시리즈 8
박영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조선왕조실록은 대단한 문화 유산이다. 때로는 정쟁에 휘말려 왜곡된 사실이 적히고 한 때는 나라를 빼앗겨 왜인의 손에 편찬을 맡겨야 할 때도 있었지만 실록은 500년이 넘는 과거의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한다. 한 권으로 읽든 두 권으로 읽든 조선왕조실록은 살아 생전 꼭 한 번 읽어야 할 역사다.


한 권으로 요약하다 보니 너무 빡빡한 건 단점이다. 또 왕의 비빈, 친척들을 주요 내용으로 다루는 데 스토리 없이 신상명세를 읊다보니 지루한 감이 있다. 태정태세문단세 까지는 워낙에 잘 알려진 내용이고 나의 경우 세종실록까지도 읽은 탓에 초반은 상당히 끈적끈적 했다. 후루룩 넘어가고 싶었다.


그래서 본격적인 재미는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에서 시작한다. 호랑이 같던 수양대군. 왕위가 탐나 기어이 할아버지를 따라 왕자를 죽이고 왕이 된 이 남자는 왠일인지 하나같이 자식들이 허약했다.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저주를 받았다고도 하는데 어쨌든 가족 전체가 그 죄책감에 상당히 시달렸고(우리로 따지면 작은 아버지가 조카를 죽인거니까) 가까스로 둘째 아들이 남아 예종으로 즉위하지만 그도 1년 2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 세조의 요절한 장남 덕종이 낳은 둘째 아들이 조선의 제 9대왕 성종으로 등극한다. 성종은 25년 넘게 조선을 통치하며 드디어 아버지, 증조할아버지 대의 칼부림을 끝내는가 싶었지만 그 장남은 그 이름도 유명한 연산군!


이것이 바로 역사를 읽는 재미다. 태종은 수 많은 피바람을 일으켜 문제가 될 만한 싹을 뿌리째 뽑았고 그것이 건국 초의 불안한 왕권을 다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 결과 조선은 세종이라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을 맞이한다. 그러나 그 피 냄새는 수 십 년이 넘도록 족보에 남아 기어이 수양대군의 야망에 불을 지폈다. 태종이 피를 뿌리지 않았다면 수양대군의 야심도 잠자코 눈을 감은 채 평생을 보내지 않았을까? 세조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왕위를 탈환할 수 있도록 도왔던 수 많은 권신들이 그의 사후에는 독처럼 남아 권력을 휘두르고 왕위조차 마음대로 주물렀으니까.


성공이나 성취는 그 당시에만 놓고 보면 확고불변한 완전체 같이 느껴진다. 그것으로 끝. 앞으로는 쭉 그 성공의 단물을 빨고 살면될 것 같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보면 성공을 가능케 했던 바로 그 요소가 오히려 해가 되어 모든 걸 망쳐버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는 성공안에 실패의 씨앗이 있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실패 안에도 성공의 씨앗이 있는 거 아닐까?


역사를 읽으면 일희일비가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를 깨닫게 된다. 지금은 모른다. 죽었다 깨나도 모른다. 오늘의 성공은 내일의 실패로 이어지고 오늘의 실패가 내일의 성공으로 이어진다. 흥망성쇠. 어쩌면 그건 리드미컬하게 순환하는 미지의 흐름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총량은 정해져 있어 행운이 지속되는 자는 그저 몰아서 받는 것 뿐일지도 모르고. 그래서 나는 괜찮아, 울지마, 아프지마 따위의 말 보다는 이 딱딱하고 건조한 역사에서 더 큰 위안을 얻는다. 불행엔 관성이 있어 아무리 애를 써도 그 방향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되지만 긴 시간을 놓고 볼 때 언제나 바닥은 존재하고, 바닥에 닿은 자는 슬픔에 매몰되어 완전히 정신을 잃지 않는 이상 다시 한 번 힘차게 뛰어 올라 숨막히는 절망의 수면 밖으로 솟구칠 수 있다. 비록 내 생애에 그것이 이뤄지지 않을지라도, 그 의지는 반드시 이어진다. 이것은 역사가 증명해주는 사실이다.


500년의 시간을 한 권으로 압축해 읽다보니 그런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인생도 이 한 권처럼 훅, 하고 지나가 그 땐 그랬었지 저 땐 저랬었지 하고 차분히 음미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살아 생전엔 절대로 누릴 수 없다는 게, 인생의 비극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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