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양장)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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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은 뒤 하루키의 소설이 미친 듯이 읽고 싶어 서점에 들렀지만 실패한 적이 있다. 지난 번 글에도 쓴 적 있지만 나는 그 '청량감'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1Q84>는 재밌지만 너무 길다. <해변의 카프카>는 손에 드는 순간 끈적끈적한 뭔가가 온 몸을 덮어 기분을 잡칠 것 같았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는 '세계의 끝'의 지루함을 견뎌야 한다. <회전 목마의 데드히트>나 <1973년의 핀볼은>은 애초에 관심 목록에 들지도 못했지만 동네 서점에 있을리도 없었다. 남은 건 민음사에서 새로 나온 <노르웨이의 숲>이나 사자, 바다 표범 어쩌고 하는 에세이들 뿐인데, 그런 걸 읽느니 차라리 낮잠이 자는 게 더욱 나았기에 결국 포기하고 말았던 것이다(솔직히 말하면 <노르웨이의 숲>을 계속 만지작 거리긴 했다).


그런데 두 번째 서점을 찾은 그 날 나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만나고 말았다. 2015년 12월 3일에 찍은 2판 30쇄가 반짝 반짝 빛을 내며 누워 있었다. 고작 167페이지. 페이지당 글자수는 꽉 채워봐야 700자가 넘질 않으니 바로 이거야 하고 소리를 지를 수 밖에.


물론 고려 요소가 분량에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처음 몇 페이지를 읽어보니 나름 하드보일드를 사랑하는 작가의 작품답게 담담한 문체가 마음을 끌었다. 담담함이야 말로 가슴 속 청량감을 망치지 않는 유일한 열쇠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온 '나'와 그의 친구 '쥐'가 함께 보낸 18일 간의 기록을 담고 있다. 뚜렷한 내러티브가 있어 기승전결을 이루는 소설이 아니다. 소설의 전통적 구성, 줄거리에 강박 관념이 있는 사람들에겐 뭐가 뭔지 모를 소설이다. "이게 끝인가요?" 혹은 "이게 무슨 뜻인가요?" 라고 묻거나 "저랑은 잘 맞지 않네요."라고 말할 확률이 높다. 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될지 중요한 소설이 아니기에 줄거리와 상관 없는 딴 얘기가 범람한다. 이야기가 단편적으로 느껴져 집중을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좋았다. 아주 만족했다 라고 말하면 나를 반사회적 인경장애자로 여기겠지만 부디 개인의 취향을 존중해 주시길.


확실히 이 소설을 대작이라고 부르기는 어렵지만 이제는 대가가 되버린 작가의 데뷔작을 읽는다는 건 상상을 뛰어 넘는 재미가 있었다. 초등학교 때 썼던 일기장을 몰래 꺼내 훔쳐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데뷔작 다운 엉성함이 오히려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가게를 마치고 부엌에 앉아 매일 밤 원고지를 채워 나갔을 하루키의 모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진다. 두 주먹을 꼭 쥔 채 화이팅을 외치고 싶은 심정.


흔히 하루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젊은이들을 풍요의 시대 속에서 자기를 잃고 방황하는 존재, 혹은 메마른 청춘 따위로 묘사하는데 나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들은 뭔가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게 아니라 옳고 그름도 따져 볼 새 없이 무자비하게 정해진 방향으로 질주하는 역사와 시간에 조용히 저항하는 게 아닐까? 하고. 과거의 세대가 쇠파이프와 화염병을 들고 사람을 죽여가며 역사의 방향을 틀려했다면 오늘의 세대는 열심히 방황함으로써 혹은 방향 없이 부유함으로써 정해진 경로를 거부하고 그를 통해 폭력적 전진을 막는 것 아니냐는 말이다. 물론 등장인물들이 이렇게 뚜렷한 목적 의식을 갖고 있는 건 아니다. 하루키의 의도도 거기에 있진 않을 것이다. 그저 의도치 않은 결과랄까.


'나'는 도쿄로 돌아가는 날 저녁 매일 들르던 바에 얼굴을 내밀고 주인과 짤막한 대화를 나눈다.


"쥐도 틀림없이 서운해할 거야."

"그렇겠죠."

"도쿄는 재미있을까?"

"어디나 마찬가지죠, 뭐."

"그렇겠지. 나는 도쿄 올림픽이 있었던 해 이후로는 이 고장을 떠나본 적이 없어."

"이 고장을 좋아하세요?"

"자네도 말했잖아, 어디나 마찬가지라고."

"그렇네요."


이 대화에 쓸쓸함이 없는 건 아니다.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니다. 눈물을 흘리지 않을 뿐이다.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다. 도쿄에 가면 가는대로의 삶이, 고향이 남으면 남는대로의 삶이 펼쳐질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하면 같이 하는대로의 삶이, 헤어지면 헤어지는 대로의 삶이 펼쳐질 것이다.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그저 바람이 부는 대로 나아간다. 파도의 흐름에 몸을 맡긴다. 하루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어린 주인공들은 왠지 그 비밀을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진정한 관계 맺기에 실패한 패배자가 아니다. 그들은 그저 흘러가는 대로 놔둘 뿐이다. 이 하드보일드한 삶의 태도에 기어이 무의미를 쑤셔 넣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 굳이 허무를 낙인 찍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 이런 것들은 모두 가짜요 이 세상 어딘가에 뜨거움과 영원을 간직할 곳이 있다고 믿는대도 좋다. 나는 당신이 행복과 사랑과 관계를 어떻게 정의하는지에 대해선 아무런 관심이 없다. 나는 그저 말할 뿐이다. 그런 것들은 결코 당신이 정해 놓은 의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진 않을 거라고. 당신이 열심히 가두려 할 수록 그것들은 더더욱 멀리 달아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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