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산진의 요리왕국
기타오지 로산진 지음, 안은미 옮김 / 정은문고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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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로산진은 만화 <맛의 달인> 속 최고의 미식가로 등장하는 유키하라 유잔의 실제 모델이라고 한다. 요리를 미각만의 전유물에서 해방시켜 보고, 만지고, 듣고, 맡는 종합 예술로 발전시킨 사람이다.


특정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사람의 경우 아주 끔찍할 정도로 까다로운 경우가 많다. 때로는 이 까다로움이 불쾌하게 느껴지고 그것이 시비를 가르는 기준이 될 때(조미료를 넣은 음식은 음식이 아니다, 회를 얇게 썰어 먹는 사람은 회 맛이 뭔지 모르는 것이다 등) 듣는 이의 분노를 일으키기도 한다. "도대체 니가 뭘 알아? 맛은 각자가 느끼는 건데!"


로산진은 현대에 태어났으면 딱 꼰대가 됐을 그런 사람이었다. 맛의 기준이 명확해 판단에 거침이 없다. 취향이 없는 게 전반적 취향이 되버렸고 고급과 저급에 대한 감식안이 떨어진 요즘 세상에선 틀림없이 어마어마한 악플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호오의 판단을 오로지 주관에 맡겨야 한다는 생각에 100% 동의할 수 없다. 주관 또한 불변의 기준이 아니다. 그것은 경험에 의해 형성되며 경험이란 얼마든지 더하고 뺄 수 있기에 주관 또한 시간을 거쳐 다양한 변화를 겪게 된다. 따라서 드라이 에이징 소고기고 나발이고 나는 집 앞 기사 식당의 제육볶음이 제일 맛있다 고 말하는 사람은 물론 매우 행복한 사람일 순 있으나, 그 판단은 아주 미천한 경험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전문가들이 TV에 나와 고기는 어떤게 맛있고 어떻게 해야 맛있고를 떠들고 이 와인에선 타르 맛이 나며 젖은 흙냄새, 오렌지 껍질, 장미 향이 난다고 하는 건 단순히 개수작이 아니다. 우리가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다. 밤이 되면 태양을 볼 수도 그 흔적을 느낄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태양이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솔직히 이런 말을 하는 나도 로산진의 얘기를 듣고 있으면 수시로 분노가 일만큼 그가 보여주는 맛의 기준은 까다롭다. 하지만 그는 엄청나게 많은 음식을 스스로 먹어 본 사람이고 직접 해 본 사람이다. 그의 말이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니지만 그의 말이 맞을 확률이 높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이걸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 사회 전반에 통용되는 직급과 연봉 체계를 거부해야 한다. 오늘날 10년 차의 디자이너가 신입 디자이너보다 직급이 높고 더 많은 월급을 받는 이유가 뭘까? 그래, 때로는 신입 디자이너가 수석 디자이너 보다 높은 퀄리티의 결과물을 낼 수 있고 어떤 사안에 대해 더 맞는 판단을 내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확률'은 확실히 낮다. 그게 아니라면 우리의 직급 체계는 완전히 거꾸로 되야 한다. 부장으로 입사해 시간이 흐를수록 차장, 과장, 대리, 사원으로 떨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맛이나 미를 논하는 것과 객관적으로 평가 될 수 있는 능력을 논하는 건 다른 거라고 말할 수도 있다. 능력이 객관적으로 평가된다고 믿는다면 지난해 말 당신이 받은 고과를 떠올려 보자. B 혹은 C? 당신은 그게 합당하다고 생각하는가? 추호의 의심도 없는 객관적 기준에 의해 내려진 거라고 받아들이는가? 사람들이 맛이나 미를 두고 왈가왈부 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쉽기 때문이다. 보고 맛을 느끼는 것 자체는 어려울 게 없다. 인터넷 검색만 하면 1초 안에 누구나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볼 수 있고 종로의 유명 평양 냉면은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가서 먹을 수 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미와 맛의 세계는 사기꾼, 비전문가의 영역 좋게 말해 오로지 주관에 달린 것이라고 믿게 만든다. 하지만 한 가지만 더 생각해 보자 우리가 프로 화가와 프로 요리사의 지위를 인정한다면(현대 사회에서 이는 거의 논란의 여지가 없다) 프로 비평가와 미식가의 지위를 인정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로산진의 요리왕국>에는 다양한 요리가 등장하고 그 요리를 맛있게 먹는 법, 그 요리를 맛있게 조리하는 법이 등장한다. 딱히 생생한 표현은 없어 건조하게 느껴질 수는 있지만 확실히 "아, 이런 게 있었구나.", "한 번 먹어보고 싶은 걸." 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물론 친절한 사람은 아니다. 자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엔 "아니야." 라고 소리를 질러 버린다. "요리 하나에 뭐 이렇게 까다롭게 굴어." 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알아줬으면 한다. 까다롭지 않은 요리에 매력이 있듯이, 까다로운 요리에도 마찬가지로, 매력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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