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의 여자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오후세시 / 2013년 6월
평점 :
절판


인간이 근본적으로 악하다는 생각은 나만 하는 게 아닌 것 같다. 도처에 그 증거가 흘러넘치니 어찌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나아가 인간은 지구에 이빨은 꽂은 기생충이요 따라서 박멸해야할 존재라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 이런 생각으로 대규모 테러를 정당화하는 범죄자들이 나오는 소설 또는 영화를 본 것도 같다. 하지만 나는 이런 생각엔 다소 회의적이다. 그 내용이 끔찍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악행을 능동적, 자각적으로 여기게 만드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유명한 구절을 빌려 말하자면, "그들은 그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인간은 자신의 행동이 악하다는 자각하에 그런 짓을 벌이는 게 아니다. 그들은 모른다. 무지 속에선 선악조차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오쿠다 히데오는 친애하는 한국 독자 여러분께 보내는 글에 이렇게 썼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양심이라는 것을 갖고 있으나 그것이 발휘되는 건 주로 자신에게 불이익이 돌아오지 않는 경우에 한 합니다.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의를 소중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때때로 타인을 비난하는 경우에 한해서만 발동되곤 합니다.

(p.7)


오해하지 말자. 정의나 양심은 그 자체로 선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어디서 어떻게 발휘되었느냐에 따라 그 성격이 결정된다. 정의나 양심도 악을 위해 봉사할 수 있다.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악들은 모두 이 경우에 등장했다.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다!"고 외치고 나면 그 어떤 살인도, 거짓도, 전쟁도 용서된다.


<소문의 여자>의 주인공 미유키는 대단히 수완이 좋은 여자다. 그리 예쁜 얼굴이 아닌데도 육감적 몸매와 색기를 이용해 묘한 매력을 뿜어낸다. 거기에 남자들이 넘어가고 넘어온 남자들을 죽여 재산을 차지한다. 돈을 향한 미유키의 질주는 멈추지 않는다. 차지한 재산으로 고급 룸싸롱을 열어 새로운 희생자를 물색하고 평범한 유치원 교사를 유혹해 업소에 취직 시키는가하면 청탁을 받아 잘 나가는 회사의 사장을 추문에 끌어들이기도 한다. 미유키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절대악이지만 오쿠다 히데오가 주목하는 건 이 악과 은밀히 공모하고 그 덕을 보려는 보통 사람들의 욕망이다. 그들은 미유키를 방패막이 삼아 양심의 가책을 잘라낸다. 그들은 죽었다 깨도 자신이 무슨 악을 저질렀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장편 소설이긴하나 10개의 에피소드가 서로 느슨히 묶인 구성이다. 긴장감 넘치는 소설을 기대해선 안된다. 에피소드가 전개될 때마다 하나씩 하나씩 퍼즐이 맞춰져가는 미스테리도 아니다. <사랑과 전쟁> 또는 MBN의 <기막힌 이야기 실제상황>을 떠올리면 된다. 구성의 치밀함이나 문장의 완성도는 애초에 이 책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저 멍하니 책장을 넘기게 하는 것. 악이 극단적 스포트라이트로 강조되어 입체감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깊이는 언제나 무념의 독서에 방해 요소니 거론치 말자. 애초에 방향이 다른 것이다.


뭐 대단한 명작이라 부를 수는 없고 이것을 범죄 스릴러로 홍보하는 게 맞는지 의심이 들기도 하지만 그럭저럭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가장 큰 미덕은 미유키라는 거대악을 중심으로 스륵스륵 모습을 드러내는 평범한 악들의 서식지다. 그것은 우리의 일상 생활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악은 도처에 있다. 그 악의 침입을 막기 위해 꽁꽁 문을 닫고 총구를 겨눠보지만 이내 해는 지고 캄캄한 창 위에 내 얼굴이 비친다. 그리고는 깨닫지, 바로 나 자신이 악이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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