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중지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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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무도 죽지 않았다."

(p.11)


<죽음의 중지>다. 이 사실을 듣고 기뻐하는 사람은 죽음의 중지가 고통의 중지, 질병의 중지, 가난의 중지 등등 온갖 부정적인 것들의 중지라고 생각했을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 오로지 죽음만이 중지한다. 세상은 지옥이 된다.


나는 아주 오래 전 부터 죽음이야말로 최후의 안식처이며 진정한 구원이라고 생각해 왔다. 사람들은 대개 우리가 발 붙이고 감각하며 살아가는 이 세계를 현실, 죽은 뒤에 가는 곳을 지옥과 천국으로 구분하는데 도대체 어떤 근거로 이런 허무맹랑한 얘기를 믿는지 잘 모르겠다. 내 보기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이야 말로 지옥이다. 전쟁과 살인, 강도와 강간, 정치인과 사장님, 부와 빈곤... 그러므로 이 세계로부터 우리를 영영 떠나게 해주는 죽음이 구원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구원일 수 있겠는가?


<죽음의 중지>는 이 같은 구원론이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소설이다. 물론 어조는 이렇게 어둡지 않다. <카인>에서 보여줬던 장난스런 풍자와 시큰둥한 조롱이 주를 이룬다. 사실 사라마구는 두 소설 모두에서 기절할 정도로 늘어지는 만연체 문장을 구사하는데 <카인>에 비해 <죽음의 중지>는 유머의 예리함이 떨어진다. 그래서 좀 지루할 수 있으니 선택하려는 사람은 참고하길 바라든지 말든지.


자, 이제 다시 소설로 돌아가 죽음이 왜 중지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 소재는 정말로 매력적이다. 참신하다. 70이 넘은 작가가 생각했다고 보기엔 너무나 탱탱하다. 한 탐정이(하드보일드 한) 죽음이 사라진 이유를 쫓는 이야기를 그리면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기가막힌 스릴러를 써낼 수도 있다. 세상을 영원불멸할 지옥으로 만들기 위해 악의 무리가 죽음을 찾아 사냥하는(죽음을 거대한 용으로 묘사하자) 이야기라면 엄청난 판타지가 될 수도 있다. 나도 전에 이런 소재를 갖고 소설을 쓴 적이 있다. 두 편이다. 하나는 거대한 농장을 꾸려 이 땅을 지배했다고 믿는 초창기 인류에 대한 얘기다. 어느날 나그네 하나가 가장 큰 농장을 가진 주인을 찾는다. 주인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자신이 어떻게 세상을 굴복시켰는지 얘기해준다. 주인은 정중하지만 거만하다. 넘치는 자신감을 숨기지 않는다. 나그네가 이 모든 것이 영원할 것 같냐고 묻자 주인은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 말에 나그네의 마음이 정해졌다. 그는 원래 잠시 머물다 세상을 떠날 생각이었으나 주인의 오만에 마음을 바꾼다. 나그네는 주인에게 이곳에 남아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지 묻는다. 주인이 흔쾌히 그를 고용한다. 주인이 나그네의 이름을 묻는다. 그가 대답한다. 나의 이름은 죽음. 그렇게 인류와 죽음의 영원한 동거가 시작된다.


또 한편은 이렇다. 앞 소설에서 인간에게 들러 붙은 죽음은 오랜 시간 인간을 죽이며 살아간다. 그러다가 죽음은 한 여자를 만난다. 


사랑에 빠진다. 


그녀와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와중에 죽음은 자신으로 인해 그녀가 점점 죽어간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것은 막을 수 없는 일이다. 죽음이 있는 한 죽음은 사라질 수 없다. 여자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죽음은 자신도 확신할 수 없었던 일을 실행에 옮긴다. 자기 자신을 죽이기로 결심한 것이다.


사라마구의 죽음은 어떻게 와서 어떻게 사라졌을까? <죽음의 중지>에 그 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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