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늑대 - 괴짜 철학자와 우아한 늑대의 11년 동거 일기
마크 롤랜즈 지음, 강수희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이 늑대와 함께 문명 세계에서 살아가는 걸 상상하는 건 쉽지 않다. 알다시피 늑대는 야생의 존재다. 주변의 동물을 잡아 먹거나 지나가는 사람을 물어 죽일 수도 있다. 아니 심지어 자신을 키우는 주인마저도.


어릴 때 부터 큰 개와 친하게 지내왔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늑대를 키울 생각을 하다니, 그건 차원이 다른 문제다. 당연한 말이지만 늑대는 개가 아니다. 웨일스어로 왕 이라는 뜻인 '브레닌'을 이름으로 얻은 이 늑대는 무게가 68kg에 키는 170cm가 넘었다.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그저 큰 개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아마 그렇게 상상했다간 실제로 이 늑대를 만났을 때 두 발이 굳어 땅 위에 철썩 달라 붙을지도 모른다.


진화의 어느 순간 인간과 함께 살기로 결정한 개와는 달리 늑대는 야생에 남았다. 여기엔 단순히 거주지가 다르다는 것 이상의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지프 차의 짐칸에 개와 늑대를 놔두고 잠시 장을 보러 갔다고 하자. 물론 각각 다른 차에 말이다. 추가로 늑대와 개 모두 갇혀 있는 걸 잘 못한다고 가정하자. 개는 늑대만큼 큰 대형종으로. 이 경우 개는 갇혀 있는 것이 답답해 시트를 물어 뜯거나 바닥에 똥 오줌을 갈겨 불쾌함을 표출하는 게 전부일 것이다. 당신은 이 개가 차 시트와 천장을 갈기 갈기 찢어 놓고 접이식 의자를 완전히 박살낸 뒤 숨이 막히지 말라고 살짝 열어둔 창문을 내리고 탈출해 유유히 마트의 시식 코너를 활보할 거라는 상상을 하진 못할 것이다. 그러나 늑대는 그렇게 한다.


방문을 닫고 개와 함께 있어보라. 잠시 후 오줌이 마려워진 개는 나가기 위해 방문을 두어 번 긁은 뒤 당신을 쳐다볼 것이다. 개는 인간과 함께 살아가기로 결정한 이래 인간을 문제 해결의 수단으로 활용하게끔 진화해 왔다. 문을 열수 없다고? 그럼 인간에게 도움을 구하면 된다. 하지만 늑대는 문을 여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한다. 야생에는 그들을 도울 인간이 없기 때문이다. 늑대의 추론 능력은 개보다 훨씬 뛰어나다. 늑대는 이 추론 능력을 활용해 문제의 해결책을 스스로 찾아낸다. 이것이 개와 늑대의 차이다. 그래서 늑대를 기른다는 말은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행동하는 동물과 함께 산다는 의미다. 마치 결혼해서 두 사람이 함께 사는 것처럼 말이다.


야생의 존재를 마음대로 인간의 집에 들이는 게 늑대에겐 폭력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본성을 억누르게끔 교육 받아온 늑대가 진정 행복할 수 있냐는 것이다. 브레닌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집을 나갈 수 있었다. 1미터의 돌담 따위는 한 번에 훌 쩍 뛰어 넘을 정도였으니까. 그럼에도 브레닌은 야생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 남자와 사는 게 행복했기 때문이다. 야생은 생각보다 혹독한 곳이다. 매번 먹이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를 벌이고 덫을 피하기 위해 바짝 신경을 곤두세우고 사냥꾼의 총을 피해 달아나고, 심지어 무리의 알파 수컷 외에는 섹스도 금지된다. 브레닌은 저자와 함께 11년을 살았다. 혼자 있는 게 싫어 저자를 따라 강의실에 앉아 있었다(저자의 직업은 교수다). 수업이 지루해질 때면 길게 울었고 배가 고프면 학생의 가방을 뒤져 도시락을 훔쳐 먹었다. 와중에 집을 뛰쳐나가 동네 암캐를 덮치기도 했다(암캐의 주인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매끼 질 좋은 고기와 사료는 보너스였다. 아마 브레닌이 야생에서 태어났다면 이 모든 일들은 꿈에서 조차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여전히 누군가는 이 모든 편의들이 진정 늑대를 위한 것은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늑대는 야생에서 사는 게 더 옳다. 그들은 이렇게 주장하고 싶을 것이다. 이 말은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저마다 주어진 삶의 조건이 있고 그것을 절대로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말로 들린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떨까? 반군에 의해 황폐화된 땅에서 태어나 동물의 썩은 시체를 주워 먹고 사는 아프리카의 아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살아야 할까? 인간은 자신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조건을 찾아 끊임없이 환경을 바꾸는 동물이다. 그렇다면 늑대라고 이렇게 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당신은 늑대에게 선택의 자유가 없었다고 말할 것이다. 두 삶을 모두 경험한 뒤 어느 것이 더 낫고 못한지 판단할 기회가 없었다고 말이다. 아까 그 아프리카 아이를 태어나자 마자 입양했다고 가정해 보자. 당신은 아이가 7, 8살 때 쯤 됐을 때 다시 아프리카로 보내 그 생활을 경험하게 할 것인가? 스스로 어떤 삶이 더 나은지 판단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


인간이 자기 삶에 늑대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순간 늑대도 자신의 삶에 인간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것이다. 11년에 걸친 두 종의 동거기를 읽다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나는 늑대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했다고 믿는다. 이 늑대를 보고 있으면 이성이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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