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한 십자가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공허한 십자가>는 스쳐 지나가는 두 개의 살인을 통해 사형제도의 허점을 드러내는 장르 소설이다. 일본에서만 30만 부가 팔렸다고 하니 아무래도 장르에 대한 재미에 무거운 주제의식 까지 더해 그토록 많은 사랑을 받았나 보다. 사람들은 재미만 있어도 싫어하고 주제만 있는 건 더 싫어하니까. 440페이지에 걸쳐 사건의 진상을 드러내는 미스테리 소설이니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내용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겠다. 그러면 좀 다른 얘기를 해야 하는데, 이게 정말 고민이다. 아무래도 좋은 말이 나오긴 틀렸기 때문이다.


전세계 수백만 독자의 지지를 받는 작가와 작품을 너 따위가 이러쿵 저러쿵 하는 게 말이 되냐 고 물으면, 솔직히 좀 송구스러운 기분이다. KPOP 스타의 박진영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 이 작가와 작품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겐 모욕이 될 수 있고, 상처가 될 수 있고, 혐오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히가시노 게이고는... 잘 모르겠다. 이 책이 두 번째인지 세 번째인지 모르겠지만 둘이든 셋이든 다 별로였다. 딱히 평을 하기도 애매할 만큼 별로였다. 사실 최악이었다.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동명의 소설가가 쓴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말이다. 책날개의 작가 소개를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온다. "데뷔 후 50여 편이 넘는 작품을 써냈음에도 불구하고 늘 새로운 소재, 치밀한 구성과 날카로운 문장으로 매 작품마다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국내에 출간된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은 전부 번역에 문제가 있는 것이리라. 대단한 다작 작가인데다 나오는 것마다 인기를 얻으니 늘 새로운 소재를 꺼내 보인다는 건 사실인지도 모른다. 내가 그 50편 전체를 읽은 건 아니니까 그에 대한 판단을 보류한다. 그런데 치밀한 구성과 날카로운 문장이라고 한다면 정말 똥그랗게 눈을 뜨고 쳐다보고 싶다. <공허한 십자가>는 억지와 인위의 덫을 보란 듯이 펼쳐 놓고 독자가 걸려들길 바라는 함정 소설이다. 아마 예민한 짐승이라면 어설프게 가린 쇠 냄새에 질려 거들 떠 보지도 않으리라. 소설에 인위적 구성이 아닌 게 어딨는가? 고 묻는다면 인위적 구성 조차 인위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게 바로 좋은 소설의 조건이 아니냐고 되묻고 싶다. 이 책을 읽다보면 어디선가 스스스스하는 소리가 들린다. 대단하게 부풀려진 미스테리는 440페이지에 걸쳐 서서히 바람이 빠지다 종국에 이르러 피식 하는 방구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완전히 쪼그라들고 만다. 이게 정말 치밀한 구성이라면, 내가 한글 공부를 다시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그러나 가장 이해가 안 되는 건 날카로운 문장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책 날개를 쓴 사람이 착각한 것 같다. 다른 건 몰라도 문장만큼은 정말 최악이다. 어설픈 대사는 말할 것도 없고 인상 깊은 문장은 책 전체를 통틀어 하나에서 두 개 도 찾기 힘든 수준이다. 날카로운 문장이란 말을 밋밋한 문체, 짧은 문장, 별 생각 없이 쓴 문장 과 같은 의미로 쓴 거라면 동의한다. 또 이런 조악함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 자체가 문장의 디테일에 힘을 쓰기 보다는 이야기에 집중하는 타입이기 때문이다. 이런 건 스타일 혹은 전략이라고 볼 수도 있다. 오히려 화려한 문체가 이야기의 흐름에 방해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문장을 가져야만 좋은 소설이냐 하는 건 각자가 판단할 문제다. 그러나 날카로운 문장이 아닌데도 날카롭다고 소개하는 건 문제가 있다.


솔직히 이런 독설을 쏟아내는 것도 쉽지 않다. 누가 내 글을 이런 식으로 평한다면 나도 아마 살인 충동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나는 모르겠다. 회사에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이 어마어마하게 많아 작정을 하고 완독하기로 마음 먹었지만 <공허한 십자가>를 읽고 나니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는다. 지루함의 늪과 조악한 문장의 정글을 지나 마침내 발견한 보물 상자에서 고양이도 끌고 들어가지 않을 만큼 어이 없는 잡동사니를 얻는다면 도대체 왜 책을 읽어야 하지? 그러기엔 내 시간이 너무 아깝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정말 혹시 모르니 그의 책 중 가장 인기가 많고 평가가 좋은 책 한 두 권은 더 읽어 보겠다. 이 위험한 모험을 떠나는 나에게, 부디 이야기의 신의 축복이 내리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