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묻어버린 것들
앨런 에스킨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들녘 / 2015년 9월
평점 :
절판


내 책장은 장르 소설의 무덤이다. 한 번 들어가면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한다. 그건 내 취향탓도 있지만, 솔직히 책 잘못도 있다. 한 번 읽는 것도 끔찍할 만큼 엉망인 책들이 많다. 문장에 신경쓰는 작가는 거의 없다. 인기를 끄는 이유는 줄거리, 반전, 트릭 때문인데 아무래도 불감증 환자인지 나는 이런 것들을 통해서는 심장을 추동하는 흥미진진을 느끼지 못한다. 책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주인공이 용의자를 찾아갔다 핀치에 몰린 대목이었다. 나는 두 손을 모아 간절히 주인공이 뒈져버리길 기도했다. 지긋지긋한 장르의 공식이 깨지길 바라면서.


<우리가 묻어버린 것들>은 얼핏 <HQ 사건의 진실>과 비슷한 플롯을 지니지만 HQ보다 어설프다. 나은 점은, 길이가 짧다. 한 200페이지 정도. 대단한 미덕이다. 또 하나, 그래도 작가가 새로운 표현을 써 넣으려 애를 쓴다. '나는 머리를 가득채우고 소용돌이치다가는 저녁 어둠에 부딪쳐 조그마한 물결로 산산이 부서지는 불길한 기분에 잔뜻 짓눌려 있었다' 라거나 '록우드가 저지른 죄의 얼룩이 칼의 이름을 더럽히고 있다' 라거나 '나무의 위엄을 띤 진짜 불이 생겼다' 같은 것들. 때로는 새로운 문장을 쓰겠다는 집착이 과도해 괴물이 탄생할 때도 있지만 중요한 건 노력 아닌가? 게다가 데뷔작이라고 하니까.


장르 소설을 쓴다는 건 특정 공식에 여러 변수들을 채워 넣는 작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해 필요한 캐릭터들을 만들어내고 이 캐릭터들이 관계할 수 있는 사건을 만들고 막힌 흐름을 한 방에 뚫어줄 소품을 복선으로 흩어 놓는다. 좋은 소설이라면 이 모든 게 자연스럽게 존재해 그 존재의 목적을 눈치채지 못해야 한다.


존재의 목적을 눈치채지 못한다?


그렇다. 실세계의 캐릭터(우리들)는 어떤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 사르트르 식으로 말하자면 대자적 존재. 우리 인간은 어떠한 경우라도, 결코, 무언가의 수단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소설 속의 존재는 다르다. 그들은 사건을 일으키기 위해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기 위해서, 또는 범인이 되기 위해서 존재한다. 만일 셜록 홈즈가 코난 도일의 소설에서 범죄를 해결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상상해보라. 홈즈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는 당장 소설의 세계에서 쫓겨날 것이다.


정리하면, 좋은 소설은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존재가 자신의 목적을 감쪽같이 숨긴 채 음흉하게 잠복해 있는 소설이다. 장르 소설은 이런 일을 잘 하지 못한다. 특히 현실 세계를 배경으로 할 때 그 조악함은 앞니에 낀 고추가루 처럼 끔찍하다. 그런데도 이런 소설이 살아남는 이유는 독자들이 이런 조악함을 눈치채지 못하거나, 장르 소설은 원래 그런 거라고 간주하거나, 부분의 매력에 빠져 전체적인 완성도는 무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달고 맵기만 한 짬뽕을 냠냠 맛있게 먹듯이. 난 이런 류의 '영화'는 참 재밌게 보는 편인데 유감스럽게도 책에서만큼은 셋 중 무엇도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런 소설을 읽을 때마다 항상 괴롭다. 


나는 또 한 번 내 책장에 무덤을 파야했다. 그걸 보고 <우리가 묻어버린 것들>이 묻는다. 당신이 묻을 게 뭐냐고. 나는 답한다. 


바로 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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