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 - 8.15 해방에서 6.25 전야까지, 개정판 한국 현대사 산책 1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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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현대사 책을 만나는 건 쉽지 않다. 아니 현대사 자체를 만나는 게 어려운 일이다. 이유야 여럿이겠지만 우선 '현대'는 아직 '사'가 될 수 없는 시간적 한계가 가장 큰 원인이 아닐까 한다. 역사는 어디까지나 사후 판단. 일어난 일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기에 현대는 너무 가깝고 대부분 현재 진행 중일 확률이 높다.


강준만의 <한국 현대사 산책>은 1940년대에서 시작한다. 해방 정국. 식민 시대의 종말. 저자는 70년 전의 이야기라면 충분히 역사가 될 만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책을 읽어보니 그 생각에 충분히 공감이 간다.


아니 이 책은 굳이 '현대사'라는 타이틀을 달지 않더라도 반드시 나왔어야 할 책이다. 고작 70년 전의 한국이다. 그런데 왜 내가 배워왔고 알고 있던 역사와 이렇게 다른 것인가? 나는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는 사실을 이처럼 뼈저리게 느껴본 적이 없다.


승자의 기록은 그 동안 숱하게 들어왔을 테니 이제는 당시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시간이 필요하다. 저자 강준만은 이 책에서 거의 논평하지 않는다. 책이 상당히 지루해질 것을 감수하면서도 수집한 방대한 자료를 건조하게 늘어 놓는 전략을 택한다. 이 시대의 뜨거움을 전달하려면 그와 같은 차가운 마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1940년대 편은 1945년 부터 1950년 사이를 무려 2권으로 풀어내기에 그 내용을 압축해서 말해주기가 쉽지 않다. 한편 5년을 위해 2권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이 시대가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를 역설적으로 설명해준다.


우선 인물이 폭발한다. 여운형, 박헌영, 김일성, 이승만, 김규식, 김구 등등 해방 정국의 유력한 정치인으로 떠오른 사람만 꼽아도 열 손가락이 모자라다. 내용을 따라가기 어려운 이유도 이 폭발하는 인물 때문인데 이 사람들의 배경과 경력 인물평을 하나 하나 내놓고 가기엔 지면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강준만은 인물이 아닌 사건들에 초점을 맞춘다. 나는 적어도 위에 언급한 6명에 대한 책을 따로 따로 읽은 뒤 다시 이 책을 손에 들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 인물이 당시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 다른 선택은 불가능 했는지에 대한 개인적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솔직히 고백하면 이 책을 읽고 난 뒤 '아 1940년대를 이제 좀 알게 됐구나'라고 생각하기 보단 어마어마한 숙제를 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고작 2권으로 끝내기에 이 시대는 너무나 복잡하다. 읽고 챙겨야 할 것들이 한 두 개가 아니다.


강준만은 이 시대가 좌우 투쟁의 시대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이승만도 김구도 박헌영도 김일성도 인간의 평등과 자유를 위해 싸워온 사람이 아니다. 그들의 계급 의식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정체성은 권력욕에 비해 한 없이 흐릿하고 약한 것이었다. 이승만은 우파가 아니라 공산주의자들에게 권력을 뺏기고 싶지 않은 욕망의 화신이었고 김구는 이도 저도 아닌 채 방황하다 대세가 이미 넘어갔을 때에야 정신을 차리고 애국 통일을 부르짖은 허술한 우파였으며 김일성은 말할 필요도 없는 사이비 좌파였다. 당시의 진정한 좌파와 우파 온건 중도주의자들은 모두 이 사람들의 손에 죽었다(김구는 공공연히 테러 집단을 만들어 정적을 제거했다). 나는 여기서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역사는 언제나 악이 승리하고 정의가 도륙됐음을 증언한다. 그렇다면 우선 살아남아야 하는 게 아닐까? 마키아벨리가 말했듯 정의를 지키고 싶으면 때로 그 정의를 완전히 저버릴 각오가 되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게 아닐까? 선은 언제나 승리에 대한 열망으로 충만하나 승리하는 방법에 대해선 늘 외면해 왔다. 어쩌면 선은 더러운 진흙탕 속에 뿌리를 내리고 마침내 수면 위로 피어오르는 연꽃 같은 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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