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노센트
이언 매큐언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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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매큐언이라는 생소한 이름 덕분에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부응하듯 소설은 정말 재미가 없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의 베를린이 배경이다. 독일은 동서로 분리됐고 서쪽엔 미국이 동쪽엔 소련이 각각 주둔했다. 아시다시피 세계 대전 이후의 세계는 이데올로기 싸움의 장이었고 모든 국가가 소련편과 미국편으로 나뉘어 Cold War, 냉전이라는 것을 치뤘다. 


그런데 냉전은 눈에 보이는 싸움보다 물 밑에서의 암투가 훨씬 치열한 전쟁이었다. 각국의 정보 조직이 서로를 엿 먹이기 위해 엄청난 돈과 인력을 쏟아 부었다. CIA의 솔트도 MI6의 더블오세븐도 다 거기서 생겨난 놈들.


<이노센트>의 주인공 레너드 마넘은 영국 체신국의 엔지니어다. 그가 MI6의 부름을 받아 비밀 취급 인가를 얻고 스파이 활동에 가담한 이유는 MI6가 CIA와 손을 잡고 땅굴을 팠기 때문이다. 미국 쪽 본부에서 동독 놈들의 정보부 건물까지. 그 밑엔 각종 전화선이 있었고 레너드 마넘은 놈들이 소련 놈들과 교신을 할 때 마다 신호를 포착해 자동으로 녹음하는 역할을 맡는다. 


동독 경찰 포포스는 미국 놈들의 건물에 드나드는 모든 인물을 쌍안경으로 감시하지만 자기 발 밑에 그런 음침한 터널이 깔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미국 놈들은 특유의 긍정과 개척 정신으로 그 무모한 계획을 성공시킨다.


이 짜릿한 성공을 타고 레너드 마넘의 인생도 부드럽게 활강한다. 여기서 잠깐, 한 가지 충고를 하고 넘어가자. 인생이 잘 나갈 땐 최대한 변수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 변수가 많을 수록 예측이 불가능해지니까. 특히 비밀을 취급하는 스파이한테는. 외국에 나온 독신남에겐 뭐가 제일 큰 변수겠는가? 물어보나마나지.


마리아는 놓칠 수 없는 미모의 여자였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멍청한 남자와 결혼한 전력이 있는 농염한 여자였다. 체신부 엔지니어 레너드 마넘은 아직 여자와 자본 적도 없는 숫총각. 마리아는 남자가 여자를 어떻게 만족시켜야 하는지 하나씩 하나씩 가르쳐주고 마넘은 이 농염한 여자의 나체에 정신을 잃는다. 베를린의 살벌한 겨울도, 온수가 나오지 않는 아파트도 그들에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파멸의 시간은 정사를 나누는 침대 옆 옷장에 마리아의 전 남편 오토가 잠들어 있는 걸 발견했을 때였다. 그들은 황급히 옷을 입고 옷장을 열었고 오토를 끄집어냈고 자기도 이 집에서 살 권리가 있다는 오토의 주장에 반발했고 반발에 반발한 오토가 마넘의 귀와 부랄을 가격하고 가격당한 마넘이 오토의 볼을 물어 물어 뜯고 입 속에서 그 붉은 살덩이를 뱉어내자 마리아가 마넘에게 구두 한 짝을 건넸고 그 구두발이 오토의 머리에 박혀 그의 두개골을 아작내는 순간 이 지루했던 소설은 걷잡을 수 없이 재미의 핵심으로 빨려들어간다.


진정한 사랑은 시련이 왔을 때 증명된다. 두 사람은 사후 경직이 끝난 오토를 부엌 식탁에 올려 놓고 새로 산 최신형 공구로 그 시체를 잘라 가방에 담는다. 마리아는 마넘에게 줄곧 남자답게 행동해 주기를 바랐고 마넘은 누구의 전남편 때문에 자기가 살인자가 됐는지만을 떠올렸다. 마넘은 마리아가 꾹꾹 눌러 담은 케이스를 들고 그 음흉한 사무실로 간다. 도대체 왜? 이유는 직접 책을 통해 확인하시라.


뜨거웠던 사랑은 토막난 시체처럼 산산조각났다.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읽지 못했다. 마넘이 영국으로 돌아가게 됐을 때 마리아는 곧 따라가기로 약속하고 부모님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길 원하지만 마넘은 얼버무린다. 그는 이 아름다운 여자가 얼마나 끔찍한 짓을 벌였는지 잘 안다. 마리아는 그저 이 사태에서 도망치기만을 바라는 나약하고 멍청한 남자에게 신물이 난다. 마넘은 그 태도에서 다른 남자의 냄새를 맡는다. 마리아는 오토가 채워주지 못한 것을 찾아 자기에게 왔다. 그리고 이제는 자기가 채워주지 못한 것을 찾아 다른 남자에게 가려 한다. 한 번 태어난 오해는 관계를 박살내기 전까진 절대 죽지 않는다.


그 누구도 사건의 전말을 파악할 수 없는 비밀의 구덩이에서 그저 해야할 일을 할 뿐인 인간들, 그리고 그게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일임이 밝혀지는 이야기는 카프카의 부조리를 연상케 한다. 그렇다면 <이노센트>란 제목은 그저 반어법에 불과한 걸까? <이노센트>는 마지막 책장을 덮기 전까지 이 소설이 왜 이노센트인지를 알려주지 않는다. 그걸 확인하는 방법은 직접 읽는 것 뿐이다. 부디 겹겹이 쌓인 비밀을 뚫고 진실에 닿을 수 있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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