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 동안의 고독 - 1982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문학사상 세계문학 6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안정효 옮김, 김욱동 해설 / 문학사상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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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란 참 신기하다. 처음 읽을 땐 그렇게 좋던 것이 두 번, 세 번 읽을 수록 실망스러운 게 있는가 하면 처음엔 그렇게 싫던 것이 두 번, 세 번 읽을 수록 참맛이 나는 경우도 있다. 무엇이든 섣불리 판단내리길 좋아하는 나는, 그래서 종종 민망해지곤 한다. 그럴 때면 책 앞에서 절이라도 해야지. 속죄와 송구의 마음으로, 미안함과 고마움을 담아서.


<백년 동안의 고독>을 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콜롬비아 사람이다. 콜롬비아라고 하면 자살골을 넣은 수비수가 훌리건의 총을 맞고 죽은 나라로 밖에 생각치 않는 우리에게 문학을 떠올리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 이런 인식은 전세계적으로도 그리 낯선 게 아니어서 문학의 창시자라고 생각하는 건방진 유럽, 미국인들 또한 남미라 하면 그저 혼란한 정치, 군사 독재, 마약, 미개한 백성, 가난 등이 한 솥에서 끓고 있는 광란의 부대찌개 쯤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이 바뀐 건 아이러니하게도 자기들의 문학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인식을 하면서부터였다. 그들은 자연스레 남미로 눈을 돌렸다. 그곳에 보르헤스와 마르케스가 있었으니까.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이야기, 마술적 사실주의, 메타 소설 등 새로운 이야기 전략으로 무장한 그들은 일약 세계 문학의 스타로 떠오른다. 보르헤스는 노벨상을 거부했고 마르케스는 바로 이 책 <백년 동안의 고독>으로 노벨상을 수상한다.


보르헤스와 마르케스는 둘 다 남미 문학의 대표자지만 '남미 문학'이라는 한 범주로 담기엔 민망할 정도로 다르다. 보르헤스가 윤회, 시원 등 주로 철학적 관념을 이야기로 승화시키려는 경향이 강하다면 마르케스는(적어도 이 책을 두고 볼 땐) 훨씬 역사적이고 현실적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더 사람 냄새가 난다.


사실 '마술적 사실주의'만 두고 보면 마르케스야말로 진짜 남미 문학의 아버지다. 그렇다면 도대체 마술적 사실주의가 무엇이냐? 나는 불합리한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메타포'라고 생각한다. <반지의 제왕>을 예로 들어보자. 이 소설은 명백히 환상적이고, 마술적이다. 실제로 마법이 등장하잖아? 그리고 이 책이 씌여진 시기를 고려했을 때 사우론은 '나치'의 상징으로 반지 원정대는 '연합군'의 메타포쯤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반지의 제왕>도 마술적 사실주의의 한 부류로 볼 수 있을까? 아니다. 물론 현실 세계의 관점에서 볼 때 <반지의 제왕>은 매우 황당한 이야기다. 불멸의 나즈굴이 용을 타고 날아다니고 유령 부대가 오크를 무찌르니까. 하지만 그 누구도 이 소설에 용과 오크, 유령이 나오는 걸 문제 삼지 않는다. <반지의 제왕>은 애초에 용과 오크, 유령이 가능한 세계를 만들어 놓고 그 위에서 이야기를 짓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술적 사실주의에는 현실과 환상을 구분해줄 경계가 없다. 독자는 작품을 읽는 순간 그 배경이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라고 믿지만 그 안에선 흙과 석회를 파먹는 여인이 등장하고, 4년 밤낮을 그치지 않는 비가 내리고, 사람이 담요를 타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등 황당하기 짝이 없는 사건들이 벌어진다. 그렇다면 이런 짓을 왜 하는 걸까? 작가는 무슨 이유로 자기 작품을 비합리적 사건으로 채워 독자를 혼란에 빠뜨리는 걸까?


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초현실주의 기법으로 풀어낸 소설 <제 5도살장>의 커트 보네거트는 이 소설이 왜 초현실적이어야만 했는지를 묻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대답한 적이 있다. "그토록 비현실적이고 불합리하며 부조리한 현실을 도저히 기존의 사실적인 이야기 방식으로는 써낼 수 없었다"고. 나는 일찍이 이 휴머니스트의 대답보다 마술적 사실주의의 존재 의의를 명백하게 밝혀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렇다. 마술적 사실주의는 도저히 있을 법하지 않은 일들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진지하게 그려낸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이나 헛소리, 광인의 농담 따위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현실이 그렇게 합리적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현실이라는 말을 종종한다. 이 말은 그저 기적처럼 벌어진 일들에 대한 단순한 감탄사일까, 아니면 비로소 깨달은 궁극적 현실 인식일까?


<백년 동안의 고독>은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와 우르슬라 이구아란이 늪지대에 둘러 쌓인 마을 마콘도에 정착해 호세 아르카디오와 아우렐리아노 대령과 아마란타를 낳고 그들이 다시 아르카디오와 아우렐리아노 호세와 17명의 아우렐리아노를 낳고 그들이 다시 미녀 레메디오스와 호세 아르카디오 세군도와 아우렐리아노 세군도를 낳고 그들이 다시 호세 아르카디오와 레메를 낳고 그들이 다시 아우렐리아노와 아마란타 우르슬라를 낳고 아우렐리아노와 아마란타 우르슬라가 결혼해 낳은 돼지 꼬리 달린 아이가 개미들에게 납치당해 사라지기까지, 약 100년에 걸친 부엔디아 집안의 흥망성쇠를 그린다. 이야기는 한없이 솟아 올랐다 한 없이 꺼져내리고 양껏 부풀어 올랐다 힘껏 쪼그라드는 등, 좀처럼 대중을 헤아릴 길 없이 난동을 부리지만, 이 난동이야말로 끔찍하고 부조리한 남미 역사의 진면목이라는 사실을, 그러니까 이 이야기가 현실보다 더 사실적임을, 비로소 우리는 깨닫게 된다.


똑똑한 사람들은 왜 이 따위 헛소리를 하는지, 그 따위 전략으로는 원하는 메시지를 전할 수 없음을, 한편으로는 측은한, 또 한편으로는 근엄한 선생님의 마음으로 마술적 사실주의를 탓할지도 모른다. 일찍히 사도 바울은 이런 똑똑이들을 위해 고린도전서 3장 18절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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