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이덕일 / 김영사 / 200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우암 송시열이라고 들어봤는지 모르겠다. 뭐 조선 시대 어디메쯤 살단 간 양반이겠지, 시큰둥하게 넘어갈려다가도 '당쟁의 대가'라는 말을 듣게 되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게 된다. 


나라를 망하게 한 사람이구나. 


이렇게 생각했다면 당신은 현대의 치열한 경쟁사회를 살아갈 자격이 없다. 아, 정치의 신! 거침없이 정적을 물어뜯고 물 흐르듯 처신하여 자기 자리를 지키는 법을 배워야겠다. 굶고 싶지 않다면 바로 이런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우암 송시열로 말할 것 같으면, 인조를 거쳐 효종, 현종, 숙종에 이르기까지 무려 네 명의 임금을 섬기며 수 십년간 조정의 거두로 머물렀음에도 처세와는 거리가 먼 뻣뻣한 인물이었다. 그는 싸움을 알아도 물러섬은 몰랐다. 그는 왕조차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도리어 왕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갖게 만든 인물이었다. 송시열은 왕보다 높은 신하였다.



동인과 서인


조선의 당쟁사를 이야기 하기 위해선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분열의 시초, 한 번쯤은 그 이름을 들어봤을 동인과 서인의 기원이 바로 이 두 사람이기 때문이다. 


퇴계 이황의(천원짜리에 그려진 할아버지) 학문을 중심으로 뭉친 당파가 바로 동인이다.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는 데 임진왜란 때 다수의 의병장을(홍의장군 곽재우, 정인홍 등) 배출해 정권을 장악한 북인이 인조 반정(영화 '광해')으로 대거 사형당한 탓에 동인은 서애 유성룡(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역임하며 이순신을 추천한 정치인)을 종주로 하는 남인만이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한편 서인은 율곡 이이의(오천원짜리 할아버지) 학문을 바탕으로 한 당파였다. 이들은 쿠데타에(인조 반정) 성공한 이후 비록 중간 중간 부침이 있긴 했으나 조선이 망할 때까지 정권을 놓치지 않은 무소불위의 집권 여당이었다. 송시열은 이 집권 여당의 우두머리였다(나중에 서인은 송시열파와 반송시열파의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한다).


송시열이 서인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그는 율곡 이이의 학맥을 정통으로 이은 자였고 둘째, 성리학에 관한한 조선에서 대적할 자가 없을 정도의 대학자였다. 정통성이 있기에 그의 발언엔 구태여 힘들이지 않아도 무거운 권위가 실렸고 대학자였기에 시열은 그 누구와의 논쟁에서도 지지 않았다. 말로써 정의를 다투는 무리들 사이에서 이보다 더한 성공의 조건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세계는 이미 말로써 정의를 다투는 시대가 아니었다. 조선의 비극은 말로써 정의를 다툴 수 없는 시대에 말로써 정의를 다투려는 사람들이 정권을 잡았다는 데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율곡 이이와 송시열의 예학


성리학을 탄생시킨 주자와 버금갈 정도였다는 대학자 율곡 이이는, 그러나 성리학이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것과 같은 고루한 인물이 아니었다. 율곡은 서자와 천인에게 신분 상승의 길을 열어주고(전방 자원 입대자에게 부여) 공납의 폐해를 시정할 정책을 주장하는 등(대공수미법) 사회적, 경제적으로 개혁을 시도한 혁신가였다. 그 유명한 '십만양병설' 또한 '무'보다 '문'을 중시하는 조선의 주류 정치계에서 대단히 이례적인 발언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송시열에 이르러 성리학은 사대부의 지배를 합리화하고 그것을 영속화하려는 '예학'으로 변질되고 만다. '예학은 한 마디로 말하면 각 신분에 따르는 분수와 예절을 지키라는 주장'이었다.(p.37)


같은 차이는 송시열의 주자학이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은 조선 사회의 극심한 변화를 야기한 대사건이었지만 그 중 최고는 대궐을 비우고 쥐새끼처럼 달아난 지배층에 분노한 백성들이 텅텅빈 관청에 침입해 노비 문서를 불태운 사건이었다. 지배계급에 대한 혐오가 극단에 치달은 데다가 양, 천의 구분이 모호해져 신분제마저 흔들릴 위기에 처하자 사대부들은 과거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이것이 바로 보수의 진면목이다. 



실패한 보수의 성공적 지배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다소 논쟁이 있으나 왜란을 수습하고 당시 중원의 대세로 떠오른 후금과의 실리 외교를 펼쳐 전쟁을 막는 등 여러모로 훌륭한 업적을 이룬 왕이었다. 이 왕이 서인의 반정(反正)으로 폐위된다. 사특한 것을 바로 잡은 고귀한 신하들은 실리 대신 군신의 예를 되찾았고(배금숭명) 이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야기해 자신의 왕으로 하여금 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게 했으며(삼궤구복) 청으로(후금) 끌려간 아낙을 '환향녀(還鄕女)'로 그들이 낳은 자식을 '호로자(湖奴子)'로 만들었다.


무참한 현실을 압도적 무기력으로 대처했음에도 서인 정권은 버림받지 않았다. 그것은 왕권의 한계였다. 왕은 스스로의 힘으로 즉위한 게 아니라 서인의 힘을 빌어 왕좌를 차지했기에 결코 서인을 버릴 수 없었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현대사와 더불어 올바른 방법으로 승계되지 못한 권력이 얼마나 오랫동안 나라를 피폐하게 만드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사특한 것을 바로 잡는다 했으나 사실은 권력욕에 다름 아니었고, 군신의 예를 다한다했으나 결국 오랑캐 앞에 머리를 조아렸던 서인들의 모순은 효종의 북벌론을 맞아 더 큰 모순을 드러낸다.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은 강력한 북벌의지를 내세워 군대를 양성했으나 서인의 반대에 부딪혀 마음대로 뜻을 펼치지 못했던 것이다. 


따지고보면 청을 몰아내고 명을 다시 세운다는 효종의 북벌론이야말로 이른바 예학이 말하는 진정한 군신의 예를 보여주는 것이었으나 집권층인 사대부 중 누구하나 찬성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걸 볼 때 당시 사대부들이 말하는 '예'란 결국 자기 안위와 부귀를 지키려는 껍데기뿐인 사변에 지나지 않았던 게 아닐까?


송시열도 이런 모순을 알고 있었으나 효종의 급서(암살로 추정)로 인해 그는 아무런 정치적 타격없이 진퇴양난의 위기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예송논쟁


다시 정국을 주도하게 된 송시열은 조선 당쟁사상 가장 치열했던 예송논쟁의 단초를 제공하게 된다. 예송논쟁이란 쉽게 말해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가 몇 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당시 예법상 부모는 장자의 상에 3년 복을 입고 이하 중자(衆子)의 상에는 1년 복을 입었기 때문이다. 송시열은 효종이 인조의 둘째 아들이었으므로(첫째 아들인 소현세자는 청에 볼모로 잡혀갔다 귀국한지 두 달만에 독살당한다. 소현세자는 아들을 남겼기에 당연 그 아들이 왕세자가 되야 했으나 소현세자 일가를 극도로 혐오한 인조가 자신의 둘째 아들인 효종을 세자로 책봉한다) 예법상 1년복이 맞다고 주장했다.


송시열의 주장은 얼핏 예법에 한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조금만 돌려 보면 효종은 서자 불과하며 따라서 그의 왕위 계승에도 정통성이 없다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기에 엄청난 파급력을 지닌 주장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정적이었던 남인 학자들이 예송논쟁에 불을 지폈고 송시열의 주장을 못마땅하게 여긴 현종이 남인을 대거 등용하기 시작하면서 서인 세력은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현종의 급서로 위기는 순식간에 와해되고 마니, 이 또한 송시열의 복이라면 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송시열의 최후


단 한 번도 왕 밑에 서본 적 없는 신하. 이 위태로운 지위를 갖고 어찌 그토록 긴 세월을 살았나, 생각해보면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마저 드는 인물이 바로 송시열이다.


송시열은 83세에 정읍에서 사사당한다. 반란죄가 아닌 이상 대신이 사형은 커녕 국문조차 받지 않았던 것을 미루어 볼 때 송시열의 죽음은 그의 삶만큼이나 이례적인 것이었다. 그를 죽일 수 있는 왕은 자존심이 매우 강하면서 동시에 대단히 감정적이어야 했다. 둘 모두를 갖춘 왕은 그 유명한 여인, 장희빈에 빠져 있던 숙종이었다. 이후 숙종은 유례없이 강한 왕권을 누리며 다양한 업적을 세웠으니 다소 감정적으로 처리한 송시열의 사사가 결론적으로 나쁘지만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송시열은 성리학의 대가이긴 했으나 주자를 신성화한 나머지 일체의 반론을 모두 사문난적으로 몰아 무고한 선비들을 죽이는 우를 범했다. 그는 남인이 정권을 잡아 귀양살이를 할 때도 그것을 자신의 불관용이 초래한 결과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사파가 정파에게 가하는 박해라고 생각했다. 이는 전형적인 광신도의 심리상태다. 


아무리 훌륭한 사상이라도 그것이 교조화되어 자유로운 반론을 억압할 때 역사의 비극이 시작된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가 그랬고 주자의 성리학이 그랬다. 송시열은 유학의 대가이면서도 <논어>, 위정(爲政)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을 깨우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군자는 두루 통하고 편벽되지 않지만 소인은 편벽되고 두루 통하지 못한다."(p.398)


군자는 역시 많이 안다고 되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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