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의 길 -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진실, 자유주의시리즈 60 나남신서 1157
프리드리히 A. 하이에크 지음, 김이석 옮김 / 나남출판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노예의 길


하이에크는 복지 사회와 사회주의에 대한 인간의 갈망이 나치즘과 파시즘을 만들어낸 주된 동력이라고 믿었다. 복지 사회와 사회주의는 계획과 통제를 강화하는 큰 정부를 필요로 하고 이렇게 집중된 권력이 자신에게 반대하는 집단을 폭력적으로 제압함으로써 결국 전체주의 사회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작은 정부와 시장의 절대적 자유를 옹호한 이 초자유주의자는 1980년대 대처와 레이건의 경제 정책을 통해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아버지로 불린다2014년의 대한민국을 사는 나는, 이 초자유주의자의 말이  간절히 기도할 뿐이다.



어떻게 어디로 선을 그을 것인가?


하이에크는 무정부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민간 사업체가 수익성이 낮다는 이유로 투자를 꺼리는 분야 예컨대 도서 지역에 대한 도로, 전기, 수도 시설은 정부가 직접 개입해 공급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그는 정부의 개입을 무조건적으로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최소한의 개입'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좋은 생각이다. 그렇다면 인육 캡슐 시장에 대해 정부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 


하이에크는 '거래 상대방을 찾을 수 있는 한 어떤 것도 생산하여 팔고 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도 바보는 아니기에 인육 캡슐을 사고 파는 걸 옹호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기존의 의견에 '기본적인 인권을 저해하지 않는 한 무엇이든 사고 팔 수 있다'는 단서를 추가하겠지. 그럼 이제 대리 임신 시장에 대해 생각해 보자. 가난한 나라의 여성은 한 번의 대리 임신을 통해 하루 20시간의 중노동과 질병이 창궐하는 주거환경 등에서 벗어날 수 있다. 정부는 이 대리 임신 시장을 규제해야 할까? 규제를 옹호하는 사람은 대리 임신이 출산이라는 고귀한 행위를 생산의 수준으로 격하시킨다 둥 인간의 존엄성 문제를 운운할 것이다. 하지만 대리 임신 서비스의 규제 때문에 한 여성이 평생 동안 기본적인 인권조차 보장 받지 못하는 환경에 노출될 수 밖에 없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정부는 대리 임신 시장을 규제했을 때와 그렇지 않았을 때 저하되는 인간의 존엄성의 양을 측정해 판단해야 할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다양한 도덕적 딜레마와 가치의 첨예한 갈등이 폭발하는 활화산 같은 곳이다. 이런 곳에서 '최소한의 개입'이란 모호하기 짝이 없는, 아니 어떠한 판단의 근거도 제공해 주지 못하는 무의미한 원칙일 뿐이다. 이 원칙이 동작한다면 아마 갖가지 단서와 예외 조항이 포함되 더 이상 '최소한의 개입'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양의 규제로 변했을 때 뿐일 것이다.



제도의 개입 없이 노동의 가격은 공정하게 결정될 수 있을까?


하이에크는 최저 임금이 그보다 낮은 임금에 노동을 제공할 의사가 있는 집단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기 때문에 특정 집단에 대한 일종의 특혜라고 생각했다. 특히 그는 파업을 무기로 임금 협상을 벌이고 각종 권리를 보장하려 한다는 점에서 노동조합에 심한 거부반응을 느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노동의 악다구니를 벌여보지 않은 자의 생각은 이토록 잔인하고 피상적이다.


하이에크는 낮은 임금을 받아들이는 노동자가 모두 자발적일 것이라는 잘못된 전제를 내리고 있다. 실업율이란 기업에 의해 조절될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은 대체 인력을 얼마든지 구할 수 있을만큼 실업율이 유지되는 한 기업은 원하는 만큼 임금을 내릴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노동의 가격은 그 노동의 가치에 의해 산정되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유지되는 실업율과 가진게 오로지 노동 밖에 없는 노동자의 절박함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일하지 않으면 하루도 살 수 없는 노동자들은 낮은 임금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 따라서 협상력을 갖춘 노동조합, 정부의 최저 임금제 같은 제도가 도입되지 않는다면 노동자는 기업의 횡포에 끊임없이 낮아지는 임금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복지는 정말 전체주의로 귀결되는가?


하이에크는 우리가 시장 체제에 간섭하여 완전한 안전을 보장하려 노력할수록 불안정이 더 커진다고 했다. 고용 보장, 연금, 노동조합 등의 제도가 도입되면 이 제도의 혜택을 받는 특권층이 생겨나고 이 특권층과 비특권층의 대비가 확연해지면서 사회의 불안정이 증폭된다. 더 큰 문제는 비특권층의 위험이 가중될수록 특권층이 누리는 보장이 더욱 소중한 것으로 평가될 것이고 창의적 도전 보다는 이 특권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만이 치열해 진다는 것이다.


'젊은이의 결혼 적합성은 스스로 성공할 수 있는 자신감보다는 연금을 탈 확실한 권리가 될 것이다. 한편, 젊은 시절에 봉급을 받는 지위의 도피처에 입장을 거절당한다는 것은 최하층 천민의 소름끼치는 상태가 평생 지속된다는 것을 뜻하게 될 것이다.' (p.197)


하이에크는 21세기 젊은이의 초상을 완벽하게 예언했다. 그러나 그 이유에 대해선 끔찍할 정도로 잘못 짚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이 공무원 시험과 대기업 취업에 목숨을 거는 이유는 한국 사회가 완전한 안전을 보장하려 노력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대한민국이 아무런 안전도 보장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노후 생활에 대한 불안감이 팽배한 대한민국에선 창의적 도전과 실패로 젊은 시절을 낭비할 시간이 없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빨리 직장을 구해 있는 힘껏 돈을 벌어둬야 하는 것이다. 


경쟁이 치열하고 이로 인해 미래에 대한 불안이 팽배한 사회는 '잘 살아 보세'라는 정치적 주술에 취약할 수 밖에 없다. 경쟁에 지친 개인은 하나하나 숙고해 볼 여유를 갖지 못하고 선전과 선동에 이리저리 휩쓸려 다닌다.


전체주의 국가로 가는 지름길은 복지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이 사실을 증명하는 덴 2014년의 대한민국 하나로도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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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태 2017-05-11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의 경우 1971년부터2006년까지 생산성증가와 임금상승의 비가 0.998로 사실상 동치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자유롭다는 미국마저도 0.935로 1에 가깝습니다.
한국에서 천국 처럼 묘사되는 스웨덴은 어떨까요? 0.934로 미국보다 낮군요.
망할자본가가 6퍼센트나 착취하다니 정말 비참하군요..
과연 글쓴이는 지적정직성을 가지고 자기 고정관념과 반대되는 현실을 찾아보기라도 하셨습니까?
혹 자기 입맛에 맞는 주장들만 흡수하시는건 아닌지요..
이 책에서 초반부에 하이에크가 바로 그런점을 지적했지요.
그리고 참고로 악덕 자본가가 넘치는 한국에선 30대 대기업중에 16개가 도산하였습니다. 한국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방법을 더 열심히 배워야겠습니다.
영 성과가 별루네요

한깨짱 2017-05-11 13:04   좋아요 0 | URL
좋은 의견 감사드립니다. 이 글을 쓴지도 벌써 3년이 되가는군요. 저도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 있는 사람이라고 봐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다른 얘기지만 이런 의견을 본명으로 주시는 분은 처음 봤습니다. 비아냥이 아니고, 정말 존경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