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후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편 (반양장)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3년 4월
평점 :
절판


현대 미술과 고전 미술을 구분하는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재현성'에 있을 것이다. 고전 미술은 그것이 무엇을 재현하는지 명확한 입장을 취했다. 미켈란젤로는 성당 천장에 하나님과 아담을 그렸고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캔버스 위에 성모 마리아와 루트루비우스의 인체비례를 그렸다. 그러나 여기 현대 미술이 있다. 그것은 형체를 잃고 주제를 버렸으며 의미를 숨긴 것처럼 보인다. 현대 미술을 마주한 우리는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무엇도 재현하지 않기에 미술은 순수하게 그 자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미술은 더 이상 '~을 위해 존재' 하거나 '~을 재현하지' 않는다. 미술은 말한다. 나는 '~을 하기 위해' 여기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오로지 '나이기 위해 이곳에 있다'. 이름만 들어도 성스러워지는 Fine Art의(순수 예술) 시작이다.


Fine Art는 자연이 아니라 예술 자체를 탐구한다. 더 이상 그 무엇도 재현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을 재현'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재현 대상과 재현 결과인 예술 사이에 위계를 만들어낸다. 실재보다 더 실재같은 건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재현을 주제로 하는 예술은 태생 자체가 저급한 것이다. 그것은 아무리 잘해도 결국엔 실재를 뛰어넘을 수 없다는 한계에 가닿고야 만다.


재현을 포기하기 위한 가장 극단적 방법은 사물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이런점에서 뒤샹은 급진적일 뿐만 아니라 천재적이었다. 뒤샹은 변기에 서명을 한 뒤 전시회에 출품했다. 이미 만들어진 변기는 자기 자신 이외에 그 어느것도 지시하지 않는다. 예술은 사물 그 자체가 됨으로써 가장 순수한 것이 된다. 여기가 바로 모더니즘의 클라이막스였다.





모더니즘은 근대를 극복하기 위한 기획이었다. 다른 말로 그것은 그 당시의 '현재'를 극복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현재를 극복하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이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더니즘 예술의 급진성은 자기 자신을 미래로 규정하기 위한, 혹은 자기 자신을 미래에 위치 시키고자 하는 노력으로 봐야한다. 그러나 여기 시간의 숙명성이 있다. 미래는 결국엔, 언젠가, 현재가 된다. 더불어 그것은 과거가 된다. 뒤샹이 변기를 '샘'으로 명명하는 그 순간 모더니즘은 현재를 극복하고 전통을 극복하고 체제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샘'이 그것을 설명하는 오디오 가이드와 함께 미술관의 '현대 예술' 섹션에 위치하는 순간 모더니즘의 생명은 다한다.


1960년대에는 이미 "아방가르드주의 자체가 전통이 되고, 예외로서 규칙이 되어버리는 미래 사회의 징후"가 나타나 있었다. (중략) 여기서 아방가르드의 극복이 '끝없는 자기 부정'이라는 아방가르드의 계승이라는 역설이 성립한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포스트모던은 이 역설에서 출발한다(모더니즘편 p.357).



포스트모더니즘, It's just happening


이 책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설명하기 위해 추상표현주의(잭슨 폴록), 앵포르멜, 색면추상, 미니멀리즘, 개념미술, 상황주의 인터내셔널, 팝아트, 플럭서스, 해프닝 등을 언급하고 있지만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오로지 '해프닝' 뿐이다. 


'해프닝'은 '간단히 말해 그냥 일어나는 사건'(p. 223)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해프닝은 '예술과 삶의 경계를 구별하지 않으'며 '단 한 번만 실연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예술과 삶의 경계를 구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해프닝은 예술가 혹은 예술이 취하는 특권적 위치를 포기한다고 볼 수 있다. 자기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주장하는 예술을 위해 비평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진짜 바보에게 바보라는 말은 욕이 될 수 없듯이 여기서 너를 예술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비평의 협박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런데 이게 왜 중요할까?


고대에는 새조차 무엇이 더 위대한 예술인지 알고 있었다(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의 그림 경연을 떠올려 보라!).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비평은 단순한 사후 해석을 넘어 예술 자체를 규정하는 심판자가 된다. 비평 없이는 그 누구도 작품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로써 예술과 비평 사이에 견고한 카르텔이 형성된다. 그러나 카르텔은 기본적으로 이권에(利勸) 대한 입장의 일치다. 이 말은 예술이 문화 산업에 굴복하고 그것을 살찌우기 위한 도구로 전락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해프닝은 예술이 되기를 거부했다. 그것은 그저 삶 자체일 뿐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해프닝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해프닝은 예술을 이용해 살을 찌우려는 그 어떤 주체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다. 진정한 Fine Art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한편 '단 한 번만 실연되는 것'을 원칙으로 하기에 해프닝은 영원히 '현재'일 수 있는 가능성을 얻는다. 초기에 해프닝은 꽤 엄격한 스크립트가 있어 관객과 퍼포머 사이에 행위를 규정하곤 했으나 후기로 갈수록 '즉흥성'을 더 강조해 그 기획과 실연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이를테면 그는 구경꾼들을 몰고 나가 마당 위에 얼음 벽돌을 함께 쌓았다. 얼음은 결국 녹을 것이다. 얼음이 녹고 나면 해프닝은 그저 해프닝으로 끝나고 만다. 


모던을 극복하려는 수 많은 포스트모던적 시도는 '작품'을 남기는 우를 범하므로써 언젠가 그 자신이 과거가 되는 참사를 겪는다. 전통을 극복한 위대한 작품들이 모든 열정과 힘을 쏟아 낸 뒤 박물관으로 돌아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전통이 되는 것이다전통을 극복하려는 그들의 야망은 일시적이지만 해프닝은 그 자체가 '일시적' 이었기에 오히려 영원히 '현재'로 남게 된다. 작품을 남기지 않은 것은 정말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체제를 극복하겠다는 정신이 결국엔 체제가 되어 군림하는 것만큼 치명적인 일은 없기 때문이다.


모더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은 애초에 시지프스가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이 둘은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순간 자기 자신을 부정해야만 자기 자신을 부정하지 않는 게 되기 때문이다. 모더니즘은 자기가 영원히 미래에 있으리라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어느새 과거가 되버렸고 자기를 부정할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그러나 해프닝은 애초에 부정될 '자기'를 남기지 않음으로써 그 윤회의 고리를 벗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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