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란
윤대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두 명의 미란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남자가 있다. 미란. 갓 제대를 한 뒤 여행을 떠난 제주도에서 만난 여자였다. 미란은 타인에게 마음을 여는 것이 두려웠던 어린 소녀였고 그녀는 우물쭈물 다가왔다 홀연히 떠났다. 짧았던 것 만큼 여운은 깊었다. 이후 남자는 사법고시에 합격해 번듯한 청년이 되지만 마음 한구석은 뻥 뚫린 채 껍데기만을 안고 살아야했다. 난파된 배의 잔해들처럼, 바다 위에서 부유하듯.


부유하던 잔해를 건져 올린 건 또 하나의 미란이었다. 땅 밑에 굳건히 뿌리를 내린 듯한 육지같은 여인. 이후 남자는 새로운 미란과 결혼을 한다. 하지만 신혼여행을 떠난 빈탄에서 태초의 미란과 재회한 후 남자의 삶은 다시 안개 속에 휩싸이게 된다. 



타자는 곧 자신이다


누군가를 잊는 게 괴로운 이유는 그것이 곧 자기 자신을 죽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진정한 타자가 존재할 수 있을까? 우리에겐 '내가 인식한 타자'가 있을 뿐이다. 나와 관계를 맺는 타자는 곧 '나'라는 고치로 똘똘 쌓여 마음 속에 저장된다. 우리가 타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수 많은 사람들은 사실 내가 쌓아놓은 내 자신의 일부인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뜯어 내는 게 내 살을 뜯는 것 처럼 아플 수 밖에.


남자 주인공 연우는 태초의 미란과 재회하자 자신의 마음 속에 여전히 뻥 뚫린 공동이 자리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두 번째 미란과 결혼하여 몇 년을 살았고 아이까지 낳아 기르고 있음에도 결국 연우는 이국땅의 미란을 찾아 한국을 떠난다. 그러나 연우는 그것을 알아야했다. 자신의 그런 행동이 한 아이의 아버지이자 한 여자의 남편으로 존재했던 미란의 타자를 박살낼 수 밖에 없음을. 자신의 공동을 메우기 위한 여행이 남겨진 사람의 마음 속에 또 하나의 공동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말이다. 



타자로 인한 슬픔은 오로지 나의 책임인가?


나는 한국으로 돌아온 연우가 부인 미란의 고통에 그토록 담담할 수 있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진짜 타자'와 '나의 타자'의 괴리로 인한 슬픔은 결국 '나의 타자'를 만든 그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을까? 오히려 연우는 타자와 관계를 맺고 살아가기로 작정했을 땐 그 모든 걸 담담하게 받아들일 자신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는가를 되묻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란은, 


'당신은 자신을 이해시키려고하지 않으니까요. 좀처럼 그런 기회를 주지도 않죠. 당신은 저에게 당신이 바라는 바를 구체적으로 얘기한 적이 없어요. 자신을 이해해달라고 요구한 일이 단 한 번도 없단 말이죠. (중략) 당신은 또 저에게 요구하지 않는 대신 저에 대해서도 조금씩 이해하기를 포기하더군요.'(p. 314)


라고 항변한다. 


예전의 연우는, 그러니까 제주도에서 처음으로 미란을 만난 그 때의 연우에게는, 어쩌면 타인을 참을성 있게 지켜보며 끝까지 이해해 보겠다는 각오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각오는 홀연히 사라진 미란으로 인해 산산히 박살나 버렸다. 그리고 그는 어른이 된다. 단단한 껍질을 둘러싸 마음의 공동은 가렸으나 덜어낸 무게까지는 채울 길이 없어 그저 부유하듯 살아갈 수 밖에 없는 남자. 연우는 두 명의 미란 그 누구와도 완전한 사랑을 이루지는 못한다. 태초의 미란은 끝내 연우의 공동이 되기를 바랐고 연우 자신은 또 다른 미란의 공동이 됐기 때문이다.



그후로 연우와 미란은


의외로 평범하게 잘 살았다. 삶은 다시 제자리를 찾았고 잔잔한 파도를 오르내리며 순항했다. 그리고 하루하루 변함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마음은 무뎌진 신경을 축복처럼 받아들인다. 타자니, 이해니, 사랑이니 하는 것은 이제 자그마한 흠집도 내지 못한다. 남자는 들키지 않게 바람을 피우고 적당히 흐물거리며 세상과 타협한다. 여자는 여자를 버리고 엄마와 주부가 된다. 도저히 유지될 수 없을 것 같은 두 사람의 관계를 단단히 묶어 주는 건 아이다. 아이는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럭무럭 자란다.


인간은 모두 이렇게 변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군자란 2013-12-03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사회가 만들어 낸 압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인간이라는 게 결국은 자기 자신의 길을 홀로가는 존재일뿐 거기에 가치를 부여하고 정당화하며 살아가는 불완전한 존재일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너무 깊게 들어갔나요?
저는 너무 심각한게 문제입니다.^^

한깨짱 2013-12-03 22:06   좋아요 0 | URL
요즘같이 경박한 시대에 심각한 건 오히려 축복일 겁니다. 저는 때때로 타인이 지긋지긋하게 싫어질 때가 있는 데 그럴 때 마다 심각한 우울에 빠져요. 얼마전에는 사람을 만나기가 싫어 카카오톡도 지웠어요. 별일 없더라구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