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무렵에 면도하기 - 첫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무라카미 라디오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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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생각없이, 문자와 그 밑에 숨은 심오한 의미가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면, 마치 흐르는 물을 즐기듯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를 손에 든다. 이 남자의 수필은 독자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기려는 어떠한 야망도 갖고 있지 않다. 한 봄, 벚꽃이 휘날리는 벤치에 앉아 따뜻한 햇살을 느낀다. 솔솔 잠이 오는 과정에 귓 속에 들리는 아이들의 웃음 소리, 길을 지나는 오토바이, 조곤조곤 벽을 때리는 강물, 마치 유체이탈을 한 듯 멀리 또 가깝게 들리는 이 소리들이 하루키의 수필이다. 기억은 하나도 남지 않지만 꿀잠을 자고 깼을 때 몰려오는 상쾌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책을 덮고 힘껏 기지개를 켜면 온 몸에 힘이 넘친다. 어쩐지 오늘 저녁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다.


한때 하루키 에세이의 강력한 악플러였던 나지만 이제서야 그 용도를 안 것 같다. 문득 내 서재에 빽빽이 꽂혀 있는 하루키의 책들이 눈에 띈다. 오랜 만남은 결국 오해를 녹이고 새로운 가능성으로 나아갔다. 남과 북이 두 손을 맞잡고 군사분계선을 넘듯, 이라고 말하면 너무 과장이려나? 아무튼 지금 제 마음은 그렇습니다만.


하루키가 글을 쓰게 된 계기는 너무 많이 알려져 있지만, 한번만 더 얘기하면, 이 남자는 어느날 저녁 야쿠르트 스왈로즈(맞나?)의 외야석 잔디밭에서 맥주를 마시며 야구를 관람하다 딱, 하며 날아오는 타구를 봤고 그 순간 바로 소설을 써야겠다는 에피파니의 세례를 받는다. 그리고 첫 소설부터 어마어마한 논쟁에 휘말리는데 핵심은 이 남자의 소설은 소설이 아니라는 것. 매년 빠짐없이 노벨상 후보로 오르는 인물이? 라고 의문을 가질 수 있겠지만 사실이 그렇다. 하루키는 이 책에서 독일의 유명한 책 관련 TV쇼에서 있었던 얘기를 해준다. TV쇼에는 당연히 유명한 사람들이 나오고 대중적 인기도 상당했던 것 같다. 그 중 십수년간 고정 패널로 활약한 문예평론가가 있었는데 하루는 그(그녀인가?)가 하루키의 소설은 껍데기이며 이런 껍데기들은 문학계에서 추방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사회자는 반론을 제기했지만 의견은 한 치도 좁혀지지 않았고 머리 끝까지 화가 난 평론가는 결국 프로그램에서 하차를 했다는 얘기.


무표정에, 유유히 자기 삶의 파도를 타고 넘는 쿨가이처럼 보이지만 이런 일이 벌어질때면 그의 마음도 썩 유쾌하지는 않음을, 하루키는 고백한다. 그리고 나는 이 대목에서 하루키에게 글쓰기가 갖는 의미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깨닫는다.


데뷔때부터 수십년간 그런 비난에 시달려왔지만 이 남자는 하루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추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속도와 양, 질에 있어서도 독보적이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였던가? 하루키는 자신이 갓 데뷔를 했을 때 자신의 소설을 읽은 옛 친구들이 그런 것도 소설이면 나도 쓸 수 있겠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 중 실제로 소설을 쓴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하루키는 그걸 필연성이라고 말했던 것 같다. 반드시 소설을 써야한다는 필연성.


결국 소설가냐 아니냐를 가르는 기준은 그 필연성에서 나오는 것 같다. 이야기를 쏟아내지 않고선 견딜 수가 없다. 하루키에게 있어 글쓰기는 숙명이고 숙명이란 자기 자신조차 막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숙명을 망토처럼 두르고 문자로 빽빽한 이야기의 정글을 헤쳐나갔다. 무려 40년동안 말이다.


하루키의 40년에는 그 누구도 쉽게 매도할 수 없는 작가의 위엄이 담겨 있다. 숱한 비난과 악평을 뚫고 넘어온 40년. 더 놀라운 사실은 그가 여전히 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꼴찌에게도 갈채를 보내는 법인데, 자기 자신의 달리기를 이토록 꾸준히 해나가는 남자에게 박수를 치지 않을 이유가 어디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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