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데이 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카트 멘쉬크 그림, 양윤옥 옮김 / 비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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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한 장에 그림 한 장. 카트 멘시크의 일러스트레이션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고는 하나 63페이지 밖에 되지 않는 책이다. 그림 빼고, 줄간, 여백을 고려했을 땐 1만 6천자가 겨우될까 싶은 단편 하나가 한 권의 책으로 묶여 나왔다. 이거 상술이 너무한데,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실례는 아니다. 그러니 하루키의 단편에 어지간히 굶주려 있는 게 아니라면 이 책을 손에 들기 전 한번쯤 생각해보기 바란다. 책값도 1만 3천원이나 된다고.


카트 멘시크와의 콜라보가 처음은 아니다. <잠>이라는 책이 처음이었는데 그 쪽은 분량도 단편 이상은 됐고 이야기의 밀도가 상당히 짙었다.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는(글이 나오지 않았던) 하루키의 불안이 잠, 꿈, 불면을 매개로 현실과 환상을 모호하게 뒤섞어 놓은 이야기. 마치 처음부터 한 장의 비단이었던 것처럼 부드럽게 경계를 지우는 작가의 솜씨가 압권이었던 작품이다. 반면 <버스데이 걸>은, 글쎄 뭐랄까, 냄새는 나지만 그 편린이 너무 작아 충분히 즐길 수 없었달까?


스무 살 생일날, 그녀는 평소와 똑같이 웨이트리스 일을 했다(p.9).


이 레스토랑의 주인은 같은 건물 육층에 살고 그는 매일 저녁 8시, 가게가 가장 붐빌 때 자신의 집으로 배달을 시켜 먹는다. 배달은 늘 홀 매니저의 몫이었지만 그날따라 우연이 겹쳐 그가 배달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리고 배달 업무는 오늘 바로 20세가 된 그녀에게 할당된다.


괴물을 만나는 건 아니다. 레스토랑의 사장일 뿐이다. 노인이라고는 들었지만 어떤 외모인지, 어떤 성격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배달을 시키는 이유도,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도(레스토랑 사장이라고는 하지만 한번도 내려온 적이 없으니까). 그녀는 시간이 되자 카트를 끌고 사장이 사는 604호로 향한다. 홀 매니저는 그녀에게 "벨을 누르고 식사입니다, 라고 말하고 놓고 오기만 하면 되"(p. 22)라고 말했는데 사장을 마주한 그녀는 무슨 이유에선지 "식사를 안으로 들여가도 될까요?"(p.26) 라고 말한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사장의 방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내가 말해줄 수도 있지만, 역시 그건 실례가 되는 일이겠지?


나는 이 짧은 단편 소설이 인생의 메타포 혹은 인생에 대한 한줄 요약 같은 건 아닌가 싶다. 20세의 생일. 한 인간에게 20세는 충분히 이정표가 될만한 나이다. 이제 그녀는 사회가 제시해온 길을 떠나 '스스로' 인생을 선택해야 한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게 과연 나의 선택만으로 움직이는걸까? 감히 말하건대, 인생은 우연과 선택이 날실과 씨실처럼 엮여 저마다 고유의 문양을 드러내는 카펫짜기 같은 것이다. 완성된 패턴은 내가 의도한 것도 세상이 의도한 것도 아니다. 운이 좋은 사람이라면 두개가 반반쯤 섞인 문양을 얻게 되겠지.


그녀가 20세 생일날 레스토랑 근무를 하게 된 것도 애초에 그녀의 의지는 아니었다. 친구의 대타였으니까. 하필 그날 매니저에게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긴 것도 마찬가지. 하지만 그녀에게 배달 임무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받아들인건 그녀 자신이었다. "식사입니다, 라고 말하고 놓고 오기만 하면 되" 라는 말에 "식사를 안으로 들여가도 될까요?" 라고 답한 것도 그녀 자신의 선택이었다. 이 우연과 선택이 604호실 안에서 인생에 느낌표를 찍을만한 사건을 일으킨다. 어쩌면 그건, 인생에서 처음으로, 그녀가 얻어낸 문양일지도 모른다. 최초의 무늬. 아마 그녀의 인생은 이 문양을 토대로 점점 더 커다란 그림을 짜 나갈 것이다. 


버스데이 걸.


그날 그녀의 인생에서 무엇이 태어났을까? 책을 다 읽는덴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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