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리틀 드러머 걸 판타스틱 픽션 골드 Gold 4
존 르 카레 지음, 조영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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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르 카레의 돼지같은 인내심은 독자를 힘들게도, 기쁘게도 한다. 기다림이 클수록 성취의 맛은 달콤한 법. 산더미같은 서류를 뒤지고 베일것 같이 정교한 준비를 마치고 나서야 사건이 벌어진다. 실제 영국 정보부 MI6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이 늙은 스파이에게 휙, 슉, 펑, 하는 첩보 액션은 도저히 눈 뜨고 봐줄 수 없는 모양이다. 존 르 카레의 작품이 그 어떤 첩보 소설과도 궤를 달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리틀 드러머 걸>은 그 중에서도 최고다. 기억을 떠올려 보자. <팅커, 테일러, 솔져 스파이>, <스마일리의 사람들>,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모스트 원티드 맨>. 이 책의 여자 주인공 찰리는 그동안 내가 읽었던 존 르 카레의 소설 중 유일하게 등장하는 일반인 공작원이다. 이스라엘 정보부에 포섭된 영국인 여자. 배우. 모사드는 그녀를 데려와 대어를 낚는 미끼로 갈고 닦는다. 오색 빛깔의 꼬리를 흔드는 완벽한 미끼. 이 미끼를 만드는데 들이는 모사드의 노력은 흡사 방망이 깎는 노인을 연상시킨다. 철저한 조사를 바탕으로한 지독한 심문으로 한 인간의 마음을 완전히 무너뜨린 뒤 첩보 세계에대한 달콤한 환상, 조작된 사랑을 채워 완전히 새로운 인간을 탄생시킨다. 이들의 작업을 보고 있으면 작은 기계 부품을 시종일관 무표정으로 끝도없이 끼워 맞추는 시계공의 모습이 떠오른다. 신을 시계공에 비유했던 자가 누구였던가? 그렇다면 이들도 신이다. 진짜 공작이 뭔지 아는 어둠의 신.


존 르 카레의 소설을 힘들게 만드는 이유는 이 인내심 말고도 여럿이 있다. 그의 소설은 언제나 이야기의 중간에서 시작된다. 중간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장소와 시간, 시점과 인물을 건너 뛰며 파편적으로 전개된다. 이 늙은 스파이의 눈에는 그것이 결국 핵심으로 향하는 미궁의 지도로 보이지만 우리 같이 평범한 독자들은 문장 하나하나를 세심히 읽어나가지 않는 이상 그의 큰 그림이 쉽게 눈에 들지 않는다. 방망이를 깎는 노인은 독자들 또한 자기와 같은 방망이 깎는 노인이 되기를 바란다. 독자는 이 늙은 스파이와 똑같이 돼지같은 인내심을 갖고 문장들을 뚫어봐야 한다. 때때로 나는 그가 우리들에게 첩보술을 가르치고 있는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게임의 방관자가 아닌 플레이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이야기 속의 플레이어가 되는 순간 독자들도 존 르 카레가 쌓아 놓은 문장들을 훑고 또 훑어야 한다.


감정이나 태도를 모호하게 묘사하는 것도 독자의 미간을 찌푸리게하는 요소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거지? 저 태도가 암시하는 것은? 스파이의 행동에는 항상 두개의 차원이 존재한다. 어떤 스파이가 나를 돕는다면 그 속내를 파악해야 한다. 굳건한 혈맹, 도움이 우정의 발로라고 생각한다면 냉혹한 스파이의 세계에서 마음이 무너지지 않고 살아갈 방법은 없다. 그들에게 윤리와 도덕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목적이 있을 뿐이다. 그들은 기계처럼 임무를 수행해 나간다. 사람과 똑같이 생긴 로봇이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들의 감정을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존 르 카레의 소설엔 승자가 없다. 그들은 모두 회색 공간에 갇힌 비인간들이고, 인간이 아닌 것을 존재의 이유로 삼아야 하는 삶을 살아간다. 그러니 매력적인 첩보의 세계란 말에 존 르 카레가 얼마나 쓴 웃음을 지었겠는가. 나는 이 노인이 존경스럽다. 할 수만 있다면 이 남자의 모든 것을 배우고 싶다. 정의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린, 그 텅빈 회색빛 눈동자마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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